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운몽은 타박타박 도관을 나섰다.
“어디를 가는 게냐?”
난간에 기대서 발아래 운무 자욱한 골짜기를 내려다보던 광명존자가 묻자 운몽이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금방 다녀올게요.”
“흘흘, 금방이란 말이지?”
운몽은 씩씩하게 도관을 떠났고, 광명존자는 말리지도, 격려해 주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는 저를 부르는 노란 새도 없으련만, 운몽은 자박자박 산길을 걸어 끊임없이 나아갔다.
우거진 수풀을 지나는 일도 겁내지 않았고, 깊고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다.
자박자박―
작은 아이의 더 작은 발이 작은 소리를 내고 있는 산중에는 깊은 적막이 충만했다.
아미산에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기로 이름 높았다. 늑대도 있고 곰도 있다. 그러나 운몽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작은 여자 중, 운지를 찾아간다는 것만 머릿속에 가득하고, 빨리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초조함만 가슴속에 가득할 뿐이다.
부스럭.
음산하고 비린 바람이 불어가더니 숲이 우는소리를 냈다.
불쑥,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자박거리며 다가오는 운몽을 바라본다. 아쉬운 대로 한 끼 저녁거리가 될 거라고 여기리라.
놈이 잔뜩 몸을 웅크리고 털을 눕혔다. 바야흐로 한 번 훌쩍 뛰어서 운몽의 머리통을 물어뜯을 작정인 것이다.
단번에 물어 죽이지 않고 한참을 이리저리 굴리고 던지며 희롱하다가 꽉 물어버릴 게 틀림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운몽은 입술을 잘근 깨문 야무진 얼굴로 앞만 바라보며 자박자박, 인적 없는 산중을 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호랑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뒷다리에 불끈 힘을 준 순간.
크앙!
놈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무려 두 길이나 튕겨진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으악!”
운몽이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뻣뻣이 굳어버렸다.
그런 아이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은 호랑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
운몽은 어리둥절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저 뒤에 저보다 더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 또 있었던 모양이라고 나름대로 타당한 추측을 할 뿐이었다.
더 부지런히, 호랑이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더 빠르게 자박거린다.
늑대들이 군침을 흘리며 튀어나왔다가 기겁을 하고 놀라 달아났고, 곰이 불쑥 일어섰다가 마찬가지로 불침을 맞고 놀란 것처럼 허둥지둥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운몽은 저것들이 죄다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갸웃거리다 키득키득 웃었다.
그 뒤로도 꼬마 아이는 여러 차례 더 복호사를 찾아갔었는데, 그때마다 호랑이와 늑대와 곰들은 매번 아이를 노렸고, 매번 놀라서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이제 맹수들은 멀리서 운몽의 모습이 보이고, 자박거리는 발소리만 들려도 지레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리는 지경이 되었다.
운몽은 그것이 제 사부가 몰래 지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루 종일 걸어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자 깜깜한 밤이 되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대로 세 개의 골짜기와 다섯 개의 개울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중들에게 물어 복호사에 무사히 다다랐다.
그때 운몽은 지칠 대로 지쳐 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 작은 아이가 종일을 쉬지 않고 걸어서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 세 개의 골짜기와 다섯 개의 개울을 건너왔다는 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건 운몽이 특별한 아이라는 증거가 된다.
험한 학정봉에서 이때까지 살아온 산 꼬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세간의 어떤 아이도 흉내 내지 못할 끈기와 체력과 인내심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복호사의 굳게 닫힌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두드릴 기력도 없이 탈진했다.
커다란 황동의 문고리를 쥐었다가 그만 스르륵 무너져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깊이 잠들어 버린다.
“어머나, 이게 웬 아이람?”
이웃의 암자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여승 한 명이 그런 운몽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큰일 났네. 이렇게 잠들면 입이 비뚤어질 텐데, 어린아이가 그 모양이 되면 얼마나 보기 흉할까? 어디 보자. 에그, 예쁘게도 생긴 사내아이로구나.”
여승이 복덩이를 주웠다는 듯 소중하게 운몽을 안아 들었다.
제2장 아미산(峨眉山)의 연정(戀情)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소정 사태(素情師太)의 자애로운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 앞에서 운영(雲暎) 비구니는 어쩔 줄 모르고 진땀만 흘린다.
그녀는 소정 사태가 거둔 다섯 명의 내제자들 중 둘째 제자인데,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온후했으나 덜렁거리는 성품 때문에 종종 혼나곤 했다.
소정 사태는 복호사의 주지이면서, 아미파의 원로이자, 비구니들의 큰 사부이기도 하다. 자애로운 비구니의 한마디에 아미산이 들썩일 만큼 위세가 높은 것이다.
강호에서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를 듯해서, 누구나 아미파에는 소정(素情)과 소화(素華), 소령(素翎)이 있다고 말한다.
삼소(三素)의 노비구니들이 직계와 방계, 속가의 삼천 젊은 제자들을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는 말로 그들 아미파의 세 명 노비구니에 대한 찬사를 했다.
배분으로는 육십을 넘긴 소정 사태가 가장 높았으나 장문 직은 둘째인 소화 사태가 맡아 금전(金殿)에 머물렀고, 셋째인 소령 사태는 아미금정(峨眉金頂)을 올려다보는 순양봉(純陽峰) 기슭의 뇌음사(雷音寺)에서 칩거했다.
강호에서는 그들 세 명의 아미파 노사태를 두고 평하기를, ‘소정 사태의 공력이 그중 깊고, 소화 사태는 아미의 진전을 가장 충실히 물려받았으며, 날카롭고 기묘하기는 소령 사태가 제일이다’라고 했다.
그밖에 넷째인 소양(素楊)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일하게 속가제자로서 진산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소 자(素字) 항렬을 받았다.
게다가 사대고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므로 강호에서는 그 일을 두고 아미파의 이변이라고까지 수군댔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삼십 년이 넘도록 소양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미파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므로 강호의 인사들은 저마다 멋대로 추측을 했다.
수많은 소문들 중 가장 신빙성이 가는 것은 그녀가 병에 걸려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삼십 년의 세월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아미파에 소양이라는 막내 제자가 있었고, 그 무공이 위에 있는 세 언니를 무색케 할 만큼 높았다는 걸 모두 지워 버렸다.
아미파에서는 여태까지도 소양의 일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다.
현재 아미파 최고의 배분이 된 소정 사태는 오래전부터 강호에서 존경을 받았던 인후한 비구니였다.
하지만 그런 소정 사태의 안색이 굳어졌으니 크나큰 벌이 떨어질 것이다.
사부가 노여워하는 기색이니 운영 비구니는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얼굴마저 창백해져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서는 여전히 작은 꼬마 운몽이 새근새근 숨을 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운영 비구니는 사부의 명을 받고 이웃에 있는 만년암(萬年庵)에 다녀온 길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산문 앞에서 주웠다며 어린 꼬마 아이를 안고 와서 좋아했던 것이다.
자랑스럽게 제 사부의 정실까지 안고 들어와 얼마나 귀여운 사내아이냐고 호들갑을 떨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다.
“어쩌자고 덥석 안고 들어온 것이냐? 그것도 사내아이 아니더냐? 네가 키울 작정이냐?”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소정 사태가 다시 안색을 온화하게 하고 물었다.
전전긍긍하던 운영 비구니는 운몽을 밀쳐놓고 납작 엎드렸다.
“제자가 아둔해서 또다시 사부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너는 천성이 순박하고 정이 많으며 착해서 좋은데 경솔한 게 흠이다. 그것만 고친다면 장차 크게 쓰일 것이다.”
“제자, 명심하겠습니다.”
“이곳은 청정한 곳이다. 외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해져 있고, 더구나 사내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예, 예.”
“그것이 아무리 철부지 어린 꼬마라고 해도 용납할 수 없어.”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깊은 밤중에 다시 내칠 수는 없는 일. 오늘 밤은 내 정실에서 재우겠다. 네가 내일 아침 일찍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운영 비구니가 절하고 물러났다.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고 염불을 하던 소정 사태가 슬며시 운몽을 돌아보았다.
꼬마 아이는 보료 위에 누워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근엄한 소정 사태의 노안에도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어 있는 운몽은 일찌감치 눈을 떴다.
어리둥절해한다.
제 생각에는 반정도관의 제 방 안이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젯밤 제가 기어이 복호사에 찾아왔고, 산문 앞에서 쓰러졌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아!”
운몽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쪽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노비구니가 눈을 뜨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구세요?”
“…….”
엉뚱한 첫 마디에 소정 사태마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는 너는 누구인고?”
“저는 운몽이라고 해요.”
“나는 소정이라고 하느니라.”
노사태의 복장과 머리를 본 운몽이 고개를 끄덕인다.
“할머니 중이로군요?”
“스님이라고 해야지. 아니면 사태라고 하거나.”
“왜요?”
“다들 그렇게 부르느니라. 중이라는 건 별로 좋은 호칭이 아니야.”
“왜요?”
“누가 너를 이놈아,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안 좋겠지?”
“왜요?”
운몽은 소정 사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정도관에서 사부님은 언제나 ‘이놈아’ 또는 ‘이 녀석’, ‘고얀 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게 귀에 익숙해져서 당연한 걸로 여기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니 의아하다.
소정 사태는 어린 운몽이 꼬박꼬박 왜요? 라고 되묻는 게 이상했다.
“너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른단 말이냐?”
“다른 말도 많이 알아요.”
“그럼 대답해 보아라. 대체 그 깊은 밤중에 이곳에는 무엇 하러 왔던고?”
“아, 여기가 복호사 맞지요? 그렇죠?”
“그렇다.”
“잘됐다, 잘됐어. 그것 봐, 나는 할 수 있다니까?”
“뭐가 말이냐?”
“사부님은 멀어서 절대로 갈 수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나는 왔어요.”
“그러니까 왜 왔느냐?”
“작은 여자 중을 보려고요.”
“응?”
소정 사태에게는 뜻밖의 말이었다.
이 녀석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하는 얼굴로 운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너는 어디에 사느냐? 부모님께서 걱정하며 찾고 있지 않겠어?”
“부모님은 없어요.”
“응?”
소정 사태는 또 한 번 놀랐다.
“누구인지도 모르는걸요?”
“그럼 여태까지 어떻게 살았어? 누가 너를 돌보아준단 말이냐?”
“사부님이요.”
“맞아. 조금 전에 사부님이라고 했었지. 그래, 네 사부는 어디에 사는 누구신고?”
“반정도관에 사시는 분인데, 광명존자라고 하세요.”
“무엇이? 반정도관? 광명존자?”
소정 사태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