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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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화
작성일 : 16-07-14     조회 : 485     추천 : 0     분량 : 5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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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놀란 노사태는 들고 있던 불진을 떨어뜨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운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그럼 너는 정말 학정봉의 반정도관에서 살고 있단 말이냐? 네 사부님의 존호가 정말 광명존자이시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그곳이 학정봉의 풍소애에 있다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는데.”

 “으음―”

 소정 사태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문밖에서 운영 비구니의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어젯밤에 명하신 대로 그 아이를 산 아래까지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잠시 운몽을 바라보던 소정 사태가 낮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그럴 것 없다.”

 “예?”

 “조회 준비나 하여라.”

 “예.”

 운영 비구니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러났다.

 소정 사태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수양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은은한 노여움과 두려움, 회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운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묻는다.

 “그래, 너는 누구를 찾아왔다고?”

 “작은 여자 중이요.”

 여전히 중이라고 부른다. 소정 사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법명이 무엇이던고?”

 “운지라고 하던데요?”

 “운지…….”

 소정 사태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바로 자신이 몇 년 전에 받아들인 막내 제자였기 때문이다. 손수 삭발을 해주고 구족계를 내려주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운지가 내 품에 들어온 것도 이 아이만 했을 때였구나.’

 운몽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 아이를 어찌 아느냐? 학정봉과 이곳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좀체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그게 말이죠…… 제가 노란 작은 새를 보았거든요? 그런데 노란 새가 달아났어요. 저는 길을 잃어버리고 울었는데, 어라? 노란 작은 새가 작은 여자 중이 되어서 돌아왔네요? 그래서 만났어요. 저를 업어주고 길도 찾아주었어요.”

 “무슨 소리냐?”

 운몽의 말은 요령부득이었다. 소정 사태가 어리둥절해하다가 빙긋 웃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 통통한 볼이며, 나불거리는 붉은 입술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소정 사태는 나이를 잊고 문득 이 작은 꼬마 아이를 골려주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너는 헛걸음을 했구나.”

 “왜요?”

 “그 작은 여자 중은 다시 작은 노란 새가 되어버렸거든. 조금 전에 문 앞에서 노래하고는 호르르 날아가 버리더라. 에그, 너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니 보지 못했지.”

 “아!”

 운몽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재미있고 사랑스러운지 소정 사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소정 사태의 말속에 장차 운몽이 맞아야 할 사랑의 시련이 예고되어 있었지만, 그건 소정 사태도 운몽도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운몽이 울 듯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이고말고.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작은 노란 새 대신 커다란 검은 새를 잡아줄 수는 있다. 다시는 네게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발목에 노끈을 묶어줄 수도 있어. 어떠냐? 그런 새를 대신 잡아줄까?”

 운몽이 상심한 얼굴을 하고 한동안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그 커다란 검은 새는 커다란 여자 중이 되겠네요?”

 “그렇겠지? 하지만 커다란 여자 중이라면 너를 더 잘 업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

 “쳇, 싫어요. 커다란 여자 중은 예쁘지 않아요.”

 “왜?”

 “커다라니까요.”

 “커다랗다고 다 예쁘지 않은 건 아니다.”

 “쳇, 할머니 중도 커다랗잖아요. 하지만 예쁘지는 않아요.”

 “뭐라고?”

 소정 사태가 짐짓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지만 입가에는 재미있어하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정 사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인지 모른다.

 운몽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노사태의 근엄하던 마음에 한 가닥 훈훈한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작은 여자 중아!”

 소정 사태의 손을 잡고 대웅전 앞에 나온 운몽이 갑자기 소리쳤다.

 뜰 아래 가득 늘어서 있던 백여 명의 비구니들이 모두 놀라고 어리둥절해서 사부를 보고 작은 꼬마 아이를 본다.

 나이 지긋한 비구니들은 물론이고 중년의 비구니들과 젊은 비구니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주지이면서 아미파의 원로이고 대사부이기도 한 소정 사태가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서서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으니 그렇다.

 언제나, 특히 조회 시간에는 더욱 근엄하던 노사태이기에 놀람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왼쪽에 다섯 명의 비구니가 따로 늘어서 있었는데, 소정 사태의 내제자들이다. 그 맨 끝에 작은 여자 중, 운지가 서 있었다.

 운몽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바라본 운지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아!’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던지 제 눈을 마구 비벼댄다.

 소정 사태의 손을 뿌리친 운몽이 쿵쾅거리며 함부로 대웅전의 높은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저런, 저런…….”

 노사태가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급히 거두었다. 아이가 저러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지만 경솔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쿵쾅거리며 마구 계단을 뛰어내려 간 운몽이 비구니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운지의 가슴으로 폴짝 뛰어 매달렸다.

 “작은 여자 중아, 너를 보려고 밤새 왔어. 어때? 반갑지?”

 운지의 목을 꽉 끌어안고 매달려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운지는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부의 눈길이 따갑게 느껴지고, 일제히 바라보는 동문 사형들의 눈길에 어쩔 줄을 모른다.

 하지만 운몽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다. 오직 운지를 다시 만났다는 것 하나로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좋아한다.

 “히히, 좋다, 좋아. 이 냄새도 좋고 따뜻한 가슴도 좋아. 히히, 작은 여자 중아, 나는 네가 좋아. 정말이다.”

 “저리 비키지 못해? 어서 떨어져.”

 운지가 운몽의 엉덩이를 꼬집으며 꾸짖지만 운몽은 막무가내였다. 더욱 목에 매달리니 운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운지가 얼굴을 붉히고 운몽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부끄러움이라는 걸 아는 나이였지만 운몽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냥 제가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일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운지가 볼을 꼬집든 볼기를 때리든 머리를 쥐어박든 상관없이 그저 좋기만 했다.

 그렇게 그날 아침의 엄숙해야 할 조회는 운몽으로 인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다시는 오지 마.”

 “왜?”

 “너 땜에 창피해 죽겠어.”

 “왜?”

 “자꾸 왜? 왜? 소리 할래? 그것도 아주 듣기 싫어. 짜증나.”

 “왜?”

 “너!”

 “히히, 알았어. 오지 않을게. 대신 네가 반정도관으로 와야 해.”

 “흥, 내가 왜?”

 “우리는 서로 닮았잖아.”

 “뭐라고?”

 “내가 왜? 한다고 밉다면서 너도 왜? 그러잖아. 그러니까 닮은 거야.”

 “말도 안 돼.”

 타박하고 흥, 흥, 거리면서도 운지는 꼭 쥐고 있는 운몽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열 살 난 비구니와 여섯 살 난 작은 꼬마가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복호사 안을 돌아다녔다.

 운지는 운몽에게 제가 사는 곳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고, 운몽은 그저 운지가 가니까 따라갈 뿐이다.

 어린 마음에도 그녀가 가자고 하면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갈 작정이 되어 있었다.

 마주치는 비구니들마다 그런 운지를 보고 운몽을 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어머나, 정말 귀여운 동자님이네.”

 달려들어 운몽의 볼을 쓰다듬거나 머리를 쓸어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더러는 번쩍 안아 들고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운지는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안절부절못했고, 운몽은 히히, 웃으며 좋아했다. 운지가 눈을 흘기지만 못 본 척한다.

 그렇게 복호사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동안 한나절이 지나갔다.

 마주치는 비구니들마다 하나같이 예쁘다며 안아주니 운몽에게는 이곳이 제가 사는 반정도관보다 백배는 더 좋아졌다. 게다가 운지가 있지 않은가.

 늘 바윗덩이처럼 묵직하고 말이 없는 사부보다 방긋방긋 웃어주는 비구니들이 천 배는 더 예뻐 보인다.

 “다시는 오지 마. 장난 아니다?”

 운지가 거듭 다그치는 데에는 사형들이 모두 운몽을 만지고 안아주는 게 내심 못마땅했기 때문이고, 운몽이 그때마다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게 미워서였다.

 하지만 그런 운지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운몽은 두리번거리며 어디에 또 예쁜 비구니가 없나 찾을 뿐이다. 입으로는 응, 응, 하고 대답하지만 눈은 다른 데에 가 있다.

 “알았어. 네가 오면 내가 안 오지 뭐.”

 “나는 안 가. 그러니 너도 오지 마.”

 “응, 응. 그러지 뭐. 딱 한 번만 더 오고.”

 “요 꼬마가 정말?”

 “응, 응. 알았어.”

 

 그날 밤도 운몽은 소정 사태의 정실에서 보료를 깔고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소정 사태가 운지를 불러서 말했다.

 “네가 이 아이를 불러들였으니 네가 돌려보내야겠다.”

 “예.”

 “학정봉 아래까지 데려다 주고 오거라.”

 “예.”

 대답하는 운지의 얼굴이 곧 울 듯했다.

 사부의 명이 지엄한지라 아무 소리 못하지만 학정봉까지 다녀오려면 제 걸음으로도 하루가 꼬박 걸릴 일인데, 운몽의 걸음을 따라가야 하니 이틀 길이다.

 그게 싫으면 운몽을 업고 가야 하는데 그것 또한 힘들 것이다.

 작은 운지에게 사부의 명령은 너무 가혹한 것일 수 있었다.

 소정 사태가 이번에는 운몽에게 말했다.

 “학정봉에서 이곳까지는 너무 멀고 위험하며 힘든 길이다. 어린 너에게는 더욱 그렇겠지. 다시는 오면 안 된다.”

 “왜요?”

 “다른 말은 필요없다. 오지 말라면 오지 않는 게야.”

 “…….”

 운몽이 시무룩한 얼굴을 푹 숙였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소정 사태의 근엄한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운몽이 아무 말 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소정 사태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안녕히 계시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운몽은 제 불만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더니 소정 사태의 정실을 자박자박 걸어나간다.

 “얘, 같이 가야지.”

 당황한 운지가 부르고 서둘러 일어섰다.

 “필요없어.”

 운몽이 쌀쌀맞게 말했다.

 “혼자 왔으니 혼자 갈 거야. 너 작은 여자 중은 오지 않아도 돼.”

 “뭐라고?”

 운지가 기막혀 하고, 소정 사태도 의아해져서 운몽을 바라본다. 운몽이 야무진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는데, 조금도 장난기가 없었다.

 “나는 어차피 학정봉으로 가야 하지만 너는 이곳까지 다시 돌아와야 하니 나보다 배는 더 고달프겠지?”

 “…….”

 “혼자 왔으니 혼자서 갈 수 있어. 둘이 가도 다리가 아프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괜히 너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 나는 부지런히 갈 테야.”

 그리고 물끄러미 운지를 바라보는데,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눈빛이 애절했다.

 소정 사태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과 함께 어린것에 대한 연민이 샘솟듯 솟았다.

 ‘얼마나 대견한 아이인가. 얼마나 훌륭한 생각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마음인가.’

 당장이라도 운몽을 끌어안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가기도 했다.

 ‘작은 아이의 마음과 생각이 벌써부터 저와 같으니 장차 또 하나의 불행을 가져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아, 아미파가 도대체 그와 전생에 무슨 악연을 맺었기에 이와 같이 오래도록 나쁜 인연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아미타불…….’

 소정 사태의 엄숙한 마음속에는 한 사람의 관옥 같은 얼굴과, 그와 얽혔던 많은 일들이 한순간에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 오랜 수양에도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잠시 격동했던 노사태가 길게 탄식하고 손을 저었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말거라.”

 악연을 쫓듯이, 자신의 나쁜 기억을 쫓듯이, 속세의 애증을 쫓아내듯이 손사래를 친다.

 지그시 운지를 바라보던 운몽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돌아섰다.

 그의 작은 등을 멍하니 보고 있는 운지의 눈가에 조금씩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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