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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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화
작성일 : 16-07-14     조회 : 516     추천 : 0     분량 : 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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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저쪽으로 가자.”

 운몽이 운지의 손을 잡고 끌었다. 운지가 머뭇거린다. 그걸 본 화운평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운몽에게는 운지가 화운평의 눈치를 본다는 게 아니꼽고 화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

 “가자니까. 나 호천(虎泉)의 물을 마시고, 그전처럼 함께 수국의 꽃잎을 세며 놀고 싶어. 그리고 화엄보탑(華嚴寶塔)에서 탑돌이도 하자. 응?”

 운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쩔쩔매는 건 화운평의 안내를 맡으라는 사부의 명을 받은 탓이었다.

 그 말은 곧 화운평이 아미산에서 엉뚱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잘 감시하라는 뜻도 있음을 알고 있다.

 아미산에는 금지(禁地)도 많고, 여승들이 기거하는 암자며 사찰이 수없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화운평이 자칫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사히 그를 데리고 복호사로 돌아왔으니 제 임무는 끝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운지는 마지못한 듯 운몽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화운평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운몽은 몇 년 만에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운지를 만나 복호사 뒤편의 호젓한 호천에 왔지만 예전과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운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고, 자꾸만 화운평의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운몽은 그런 저의 마음이 질투의 감정이라는 걸 아직 몰랐지만, 그 고통스러움은 어린 마음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느끼고 있었다.

 소중히 여기는 내 장난감을 다른 아이가 가지고 노는데, 그 아이의 부모가 곁에서 편들어주고, 그 아이의 힘이 저보다 세기 때문에 다시 빼앗아올 수 없을 때의 속상함이다.

 운몽에게 운지는, 비록 네 살이 많기는 하다지만, 아미산에서 유일하게 만난 제 또래의 소녀이고, 사부에 대한 것과는 다른 따뜻한 감정을 갖게 된 비구니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의 상황이 극적이었던지라 결코 잊을 수 없고, 더욱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 운지가 제가 아닌 다른 사내 녀석을 만나고 있었다는 게 속상했다.

 운지는 언제까지나 저 혼자만 알고, 저 혼자만 독차지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헤어져 있던 지난 삼 년 동안 어느덧 운몽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그 녀석은 누구야?”

 운몽의 말에 화엄보탑의 계단에 앉아 멍하니 수국을 바라보고 있던 운지가 깜짝 놀랐다.

 “누구?”

 “화운평 말이야.”

 “나도 몰라.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온다.”

 “왜?”

 “화 공자 아버님이 사부님과 잘 아는 사이인가 봐. 그래서 이곳에 당신 부인의 유골을 모셨어. 때문에 기일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거야. 그리고 한 번 올 때마다 많은 돈을 기부하기 때문에 그게 복호사의 운영에 큰 힘이 된다고 해. 그러니 우리 절에서는 정성껏 화 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려주지 않을 수 없지.”

 운지가 장황하게 말하는 건 자기가 화운평과 함께 있었던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그녀의 여린 가슴에 왠지 운몽에게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운몽이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아까 그 사람이 화운평의 아버지였군.”

 “아니, 그분은 화 공자의 숙부님이셔. 매년 화 대인이 몸소 화 공자를 데리고 오셨는데, 금년에는 어쩐 일인지 숙부가 화 공자를 데리고 왔어.”

 운지는 온화하게 말했는데, 그 말투에 화 대인이라는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운몽은 더 속상했다.

 “흥, 숙부든 아버지이든 똑같겠지 뭐. 어쨌든 나는 화씨가 싫다.”

 “어째서? 너는 오늘 처음 본 것에 지나지 않은데?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잖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질려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더 알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렇지 않아. 화 대인께서는 인후하고 너그러우신 분이다. 네가 본 화군악이라는 분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

 화운평의 숙부인 화군악에 대해서는 운지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거만하고 잘난 척을 했기 때문인데, 사부가 그를 공경해 주므로 어쩔 수 없이 공경했을 뿐인 것이다.

 운몽이 볼을 씰룩거렸다.

 “그러니까 그 화 대인이라는 사람도 복호사에 드나들었군? 흥, 복호사에는 남자가 들어올 수 없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운지가 운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래듯 말했다.

 “화 대인은 예외야. 사문에서도 그분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예외를 두고 있어.”

 그것은 아미파가 그의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는 것이겠고, 화 대인에게 그동안 신세진 게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미파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운몽은 그런 걸 이해할 만큼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다.

 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즉시 얼굴에 드러내고 말로 뱉어낼 뿐이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사문의 존장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 낙산에 칩거하고 있지만 그 위명이 강호에 진동한다고 해. 소림이나 무당 같은 큰 문파에서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더라.”

 “왜?”

 “그는 강호를 뒤흔들 만한 고수이거든.”

 “강호? 그게 뭐야?”

 운몽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사부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의 고수들이 의와 협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기도 하면서 각축을 벌이는 무림을 말하는 거지. 넓게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오라, 무림이라는 데가 있었군. 무공을 익혀서 고수가 되면 또 다른 세상에 사는 거나 같겠네?”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아니겠니? 굳이 일반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과 구분을 할 필요가 있을까? 민간에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이 무림이라는 곳 또한 그럴 뿐일 거야.”

 “그런데 조금 전에 말한 아미파란 건 또 뭐야? 여기가 복호사지 어째서 아미파야?”

 운몽은 궁금증으로 잠시 화운평을 잊은 듯했다. 운지에게는 그게 다행스런 일로 여겨진다.

 운지가 운몽의 손을 잡고 그 손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마치 다정한 오누이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오순도순 옛날이야기라도 하고 듣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림에는 수많은 문파와 방회, 독립적인 세력가들이 있는데, 저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하더구나. 그중 명문정파로 꼽히는 역사 깊은 문파가 아홉 개, 방회가 한 개 있어. 강호에서는 그곳을 두고 구파일방이라고 하며 존경하지. 아미파는 그 구파일방 중 한 곳이란다. 복호사는 물론 아미산에 흩어져 있는 많은 사찰, 암자들이 다 그 아미파에 속하는 거야. 대단하지 않아?”

 “그럼 그 구파일방의 무공이 제일 세겠네?”

 “보통 그렇게들 말하지만 누가 알겠어? 강호에는 또 기인이사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니 그중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 고수도 있겠지.”

 “그럼 화운평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사부님이 그처럼 공경하는 걸로 보아서는 그런 것 같기도 해.”

 “응, 그렇구나.”

 운몽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운지의 말처럼 화운평의 아버지가 강호의 절정고수라면 화운평 또한 장차 제 아버지를 이어서 그렇게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두고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자 부러움과 함께 제 자신이 더욱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운지 앞에서 화운평보다 제가 더 멋지고 당당해야 하는데 저에게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 기가 팍 죽는다.

 그런 운몽의 기분도 알지 못하고 운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부님께서도 강호에서 명성이 아주 높으신 분이란다. 절대로 화 대인 아래가 아닐걸? 그리고 우리 아미파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역사가 깊고 고수가 많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야. 명문정파의 기둥이지. 그런 점에서는 낙산에 있는 화 대인의 신검장(神劍莊)보다 뛰어날 거야.”

 제 사문과 사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걸 보면서 운몽은 더 우울해졌다.

 ‘나에게도 사문이라는 게 있고, 소정 사태처럼 훌륭한 사부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끝에는 제 사부에 대한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없이 좁아터진 반정도관 안에서만 죽치고 있는 사부 아니던가. 기껏 한 달에 두어 번 도관을 떠날 뿐이다. 그 외에는 늘 말도 없이 돌부처처럼 앉아서 잠만 잔다.

 지금은 그것이 자는 게 아니라 정좌운기(靜坐運氣)하는 것임을 알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사부가 가르쳐 준 무공이라는 것도 별것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강호에 무슨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정도관 자체가 복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데, 그런 곳에서 늙어가는 사부에게 무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무공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운몽은 사부가 그 모양이니 제자인 자신도 초라한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운지나 화운평은 그렇지 않았다. 사문이 뛰어나고 가문이 훌륭하니까 의젓하고 기품이 있지 않은가.

 얄밉기 짝이 없지만 운몽은 화운평이 저보다 점잖고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많은 탓에 덩치도 훨씬 컸다. 게다가 힘도 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운지를 돌아보자 그녀가 달라 보였다. 자기 꼴을 훑어보고 다시 보자 더욱 달라 보인다.

 어린 마음에도 운몽에게는 왠지 운지가 저보다 화운평과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지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려고 지난 삼 년 동안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는데, 그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은 운몽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아미파에서 저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무공을 배웠을 운지는 물론 화운평이 본다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자 끔찍해진다.

 운몽이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운지에 대한 상심(傷心)으로 풀이 죽고 괴로워하는데, 저쪽에서 화운평이 천천히 보장전(寶藏殿)의 깨끗한 돌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화 공자.”

 그를 본 운지가 얼른 운몽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운몽은 제 손에 남아 있는 운지의 체온이 빠르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서 물끄러미 발아래의 하얀 돌계단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에서 저 혼자만 버림받은 것 같은 쓸쓸함이 밀려들어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화운평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기는커녕, 누가 나를 낳아주었는지도 모른다. 내 사부는 소정 사태처럼 인자하고 명성이 높지도 않다. 내 생긴 모양은 화운평처럼 의젓하지도, 잘나지도 못했다. 내 입고 있는 이 낡은 옷과, 화운평의 저 깨끗하고 화려한 비단옷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신고 있는 신발만 봐도 나는 그의 종보다 못할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운몽은 제가 아직 아홉 살의 꼬마이고, 화운평은 벌써 열네 살의 어엿한 소년이라는 건 잊었다.

 운지를 사이에 놓고 보자 저와 화운평이 동등한 한 사람의 남자로 여겨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비교하는 마음이 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천천히 다가온 화운평이 운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운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운지 사매, 이곳이 그윽하고 운치있기는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나는 아직 나한전(羅漢殿)의 부처님께 참배하지 못했는데 사매가 나를 안내해 주지 않을 테야?”

 운지가 운몽의 눈치를 보았다. 운몽은 화엄보탑의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채 얼굴도 들지 않았다.

 한숨을 쉰 운지가 그런 운몽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래? 화 공자를 나한전으로 안내해서 그가 참배하는 걸 도와준 다음에 곧 올게.”

  “싫어!”

 내내 얼굴을 푹 숙이고 있던 운몽이 갑자기 소리치고 벌떡 뛰어 일어났다.

 “나는 가겠어. 흥! 화 공자인지 화 미꾸라지인지하고 잘 놀아! 다시는 오지 않을 테야!”

 작은 주먹을 꼭 쥐고 화운평을 매섭게 노려본다.

 “아?”

 운지는 돌변한 운몽의 말과 태도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화운평은 운몽이 저를 미꾸라지에 비교하자 참고 참았던 화가 울컥, 치솟았다.

 “저런, 버릇없는 꼬마 놈이 감히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누구에게서 그런 못된 말버릇을 배웠느냐? 네 아버지냐?”

 그가 가뜩이나 열등감의 원인이 된 아버지를 들먹이며 꾸짖는 데에 운몽 또한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에잇!”

 소리치더니 그대로 화운평에게 부딪쳐 간다.

 돌계단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모습이 확실히 삼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날렵하고 힘차 보였다.

 하지만 화운평에게는 가소롭기 짝이 없을 뿐이다.

 그가 슬쩍 운몽의 발길질을 걷어내며 비웃었다.

 “꼴에 어디서 무공이라는 걸 몇 수 얻어 배운 모양이구나?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형편없는 수법이로군. 이 못된 꼬마야, 그런 주먹질로 어디 허수아비나 제대로 칠 수 있겠어? 차라리 나에게 배우는 게 어떻겠느냐? 우리 집으로 와서 내 시동이 되어 신발을 들고 다닌다면 내가 그보다 훨씬 나은 무공을 가르쳐 주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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