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더니 얼른 정신을 차리고 호호, 웃으며 운몽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어색할 뻔했던 분기가 저만큼 달아나 버린다.
“호호, 요 작은 꼬마가 못하는 말이 없어. 내가 물건이야?”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만…… 재미있게 놀 수 없다는 거였어. 정말이야.”
운몽도 제가 한 말이 얼마나 엉뚱한 것이었던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래서 서둘러 변명하는데, 말이 자꾸만 더듬거려진다.
“그럼 어쩌지?”
운지가 슬픈 얼굴을 했다. 운몽이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저기 운대봉에서 만나자. 거기면 학정봉과 복호사의 중간쯤 될 거야. 혼자서 먼 길을 오가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응, 그렇긴 하겠네.”
운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복호사에서 만나면 사부님의 눈치가 보이고, 이곳에서 만나면 언제 광명존자의 눈에 띄게 될지 몰라 불안할 텐데, 운대봉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매일매일 만날까?”
“그건 안 돼.”
운지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왜?”
“이렇게 몰래 나오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어.”
“몰래 나온 거였어?”
“사부님께 말씀드리면 당장 종아리를 맞을걸?”
“그럼…….”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해.”
하늘을 올려다본 운지가 서둘렀다. 운몽은 이렇게 그녀를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싫었다. 겨우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 아닌가.
“조금만 더 놀다 가자. 우리 누가 빨리 달릴 수 있나 볼까?”
“얘는? 싫어.”
“그럼 내가 얼마나 빨리 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는지 볼래?”
“아이, 참.”
운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늦게 돌아가면 저녁 예불에 참석할 수 없잖아. 그러면 사부님께 들키고 말아.”
운몽의 눈앞에 소정 사태의 근엄한 얼굴이 하나 가득 떠올랐다.
인후하고 자상한 노사태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한지 운몽도 잘 알고 있었다.
더 고집을 부리면 운지가 노사태에게 혼날 것이고, 그러면 자기를 보러 몰래 나올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풀이 죽었다.
“가. 내가 바래다줄게.”
“정말?”
“저기, 운대봉까지만.”
“응, 거기까지만이라도 좋아.”
운지가 활짝 웃고 운몽의 볼을 꼬집었다.
작은 사내아이와, 그보다 조금 큰 소녀 비구니가 손을 꼭 잡고 타박타박 숲 속을 걷는다.
울창한 삼림도, 음침한 골짜기도 무섭지 않았다.
운몽의 기척이 숲 속에 들리는 즉시 아미산에 득실거리는 호랑이는 물론 곰도, 늑대도 모두 꼬리를 말고 달아난다.
깡총깡총 뛰기도 하고, 운지 등에 업히기도 하며 쉴 새 없이 쫑알거리는 운몽의 얼굴에, 온몸에 오랜만에 커다란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났다.
그건 운지도 마찬가지여서, 누가 들을까 봐 겁낼 것 없이 까르르, 높은 소리로 웃었다. 주먹을 흔들며 운몽을 쫓아가다가 멈추어 서서 눈을 흘기기도 한다.
“잠깐만.”
운몽이 깜짝 놀란 듯 말하더니 후다닥 개울로 달려갔다. 그리고 곧 돌아와 젖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받아, 내 선물이야.”
“어머, 예쁘다.”
운지가 물에 젖어 반짝이는 작은 조약돌을 쥐고 활짝 웃었다.
검고 단단한 차돌이었다. 갈색 줄 몇 개가 그어져 있는데, 물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것이 검은 보석 같았다.
저물어가기 시작한 햇빛이 비쳐 더욱 영롱하게 빛난다.
운지는 이처럼 예쁜 조약돌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고마워.”
손에 꼭 쥐고 다른 손으로 운몽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더니 살짝 얼굴을 숙여 아이의 환한 이마에 입맞춤한다.
“……!”
운몽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어리둥절해졌다.
금방 떨어진 운지의 입술이지만, 그것이 닿았던 이마 복판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운지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운몽을 외면했다.
‘이게 뭐지?’
운몽은 머릿속에 쿵쿵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불 속에 떨어진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이마에 닿았던 불덩이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서 저를 태워 버리는 것 같다.
‘이게 뭐지?’
운몽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그 이상한 경험에 어리둥절하다가 어색하고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의 얼굴도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어머, 저기 다람쥐다. 예쁘기도 하지.”
운지가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괜히 호들갑을 떨며 마구 달려갔다.
멍하니 그런 운지의 팔랑거리는 잿빛 옷자락을 바라보던 운몽이 가만히 제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냄새를 맡아본다.
가슴에 소중히 대고 지그시 눌렀다.
쿵쾅거리는 제 심장의 고동이 생생하게 손바닥으로 옮겨왔고, 운지가 심어준 뜨거운 불의 기운은 심장으로 옮겨갔다.
그런 날들이 꽃이 피고 지듯이 흘러갔다.
아미산의 계절은 다른 곳보다 훨씬 빠르게 바뀌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욱이 피어나는 안개와, 운해의 꿈틀거림을 닮은 탓일 것이다.
아미산의 시간은 다른 곳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흘러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골짜기마다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콸콸거리고 급하게 흘러가는 개울물을 닮은 탓일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건 산이었다. 그리고 피고 지는 두견화처럼 빠르게 변하는 건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운몽과 운지가 그랬다.
어느덧 그들은 어엿한 청년이요, 아가씨의 티가 났다.
여섯 살 꼬마이던 운몽이 열여섯 살이 되었으니, 운지는 스무 살의 성숙한 아가씨가 된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그래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제5장 첫 싸움 그리고 첫 패배
운몽과 운지는 늘 그랬듯이 한 달에 한 번씩 운대봉의 정상에서 만났는데, 어떤 때는 운몽이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올라와 찬바람을 맞으며 운지를 기다렸고, 어떤 때는 운지가 운몽보다 더 일찍 나와 있기도 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 손을 잡고 아미산의 골짜기를 쏘다녔으며, 산짐승을 뒤쫓았다.
운지의 걸음이 빠르고 가벼웠다면, 운몽의 걸음은 이제 그녀를 앞지를 정도가 되어 있었다.
“네 사부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셔?”
운지가 물으면 운몽은 먼 하늘의 한 조각 구름을 가리켰다.
“뜬금없는 분이셔?”
“응.”
“제멋대로야?”
“응.”
“핏,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사부님의 엄명이셔.”
“뭐라고?”
“네가 절대로 학정봉에 올라오지 않는 것과 같아. 나는 절대로 사부님이 누구신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왜?”
“사부님의 엄명이라니까.”
“그러니까 왜?”
“쳇, 너 작은 여자 중은 말투마저 나를 닮아가는구나.”
“그래서, 싫어?”
“아니, 귀찮아.”
“이 꼬마 녀석이!”
운몽은 키가 훌쩍 커서 운지를 내려다보게 되었고, 운지는 가슴이 불쑥 솟아서 운몽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운지에게는 턱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나기 시작한 운몽이 여전히 작은 꼬마 아이로 여겨졌다.
열여섯 살의 어엿한 사내가 되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운몽은 달랐다. 운지가 이렇게 발끈 화를 내거나, 샐쭉해서 토라지거나, 환하게 웃을 때면 현기증이 나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긴, 나도 네 사부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게 좋겠다.”
“왜?”
“모르겠어. 내 사부님께서는 이제 학정봉은커녕 학정봉이라는 말조차도 금하셨다. 그래서 아미산의 제자들은 누구나 남쪽을 바라보는 것도 조심스러워해. 그런데 내가 네 사부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하면 화를 당하겠지.”
“왜?”
“모르겠어.”
운지가 근심스런 얼굴을 했다. 운몽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다.
운지는 어쩌면 사부님이 이렇게 운몽을 몰래 만나 한참을 놀다 들어가는 걸 다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짐짓 눈감아주는 게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것 때문에 큰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짐작을 했고, 그러면 두려움에 가슴이 멎을 것 같았다.
언제던가…….
열네 살 되던 때일 것이라고 기억한다.
사부가 불러 앉히더니 엄하게 꾸짖던 일이 떠올랐다.
“너는 이제부터 복호사 주위 십 리 안을 떠나지 마라.”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지는 사부님의 화난 듯한 그때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눈길에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도 생생히 기억한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사부님의 명령 때문에 그 달에는 운대봉으로 가지 못했다.
운몽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운지는 종일 화엄보탑의 계단 위에 멍하니 서서 운대봉을 바라보기만 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저를 기다리고 있을 운몽의 어린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운지는 그때 제 사부가 몰래 그런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늙은 사부가 합장한 손을 떨며 쉬지 않고 부처님의 가호를 비는 염을 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른다.
운지를 훔쳐보면서 그 마음에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이 가득해져서 소정 사태 또한 눈시울을 붉혔던 것이다.
사부님의 엄명이 있었지만 운지는 이제 운몽을 보지 않고서는 괴로움 때문에 제가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어린 마음의 외로움이 운몽을 만나면서부터 그 작은 꼬마에게 급히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혈육에 대한 정에 굶주려 있기는 운지나 운몽이나 다를 게 없었는데, 두 아이의 서로를 잡아당기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마음은 거기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운몽과의 첫 만남은 운지에게도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으로 새겨져 있었다.
늙어 꼬부라져서 한 톨의 그리움도 담을 수 없는 퍼석거리는 가슴을 갖게 되어도 그 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운지는 그런 제 마음을 저도 알 수 없었다.
사부와 사형들의 눈을 속이고 만나는 만남이 왜 더 짜릿한 건지, 그 만남이 거듭될수록 왜 정이 쌓이고 쌓이기만 하는 건지. 그리하여 아미산만큼 높아지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다음 달, 약속의 날이 돌아오자 운지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사부의 명을 어겼다.
사형들에게는 이웃에 있는 순양봉 아래의 뇌음사로 사숙인 소령 사태를 보러 간다 하고 태연하게 복호사의 산문을 나선 것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듯이 달려 곧장 운대봉으로 향했다.
그런 일이 거듭되었고, 기어이 사부에게 다시 불려갔는데, 반년이 지난 뒤였다.
“네가 어째서 사부에게 거짓말을 하느냐?”
“사부님…….”
운지의 눈에 당장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일전에 소령이 왔더니라. 네가 늘 뇌음사로 놀러 간다고 했기에 소령에게 너를 보았느냐고 물었지.”
“…….”
“한 번도 네가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하더구나.”
“사부님, 저는, 저는…… 운몽이 너무 보고 싶어요. 한 달에 한 번 그 작은 아이를 보지 않으면 밥도 먹기 싫어져요.”
울음을 꾹꾹 삼키며 겨우 말하고 나서 기어이 와앙, 하고 울어버리는 어린 제자 앞에서 소정 사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사이에 싹트는 정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남녀 간의 정이란 급히 흐르는 물과 같다. 둑을 쌓으면 잠시 멈추는 듯하지만 기어이 그 너머로 흘러넘치고, 둑마저 무너뜨리지 않던가.
그걸 막기 위해서는 둑에 구멍을 내서 물이 흘러나갈 길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법이다.
소정 사태는 그런 이치야말로 이 작은 비구니의 마음이 어긋나지 않게 다스리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엄하게 꾸짖고 금족령을 내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