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녀석이 제법이구나?”
한결 여유를 갖게 된 운수가 급박한 공세를 멈추지 않으며 감탄성을 터뜨렸다.
단번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처음의 기대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벌써 세 번이나 초식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운몽을 잡지 못했다.
운몽이 까다로운 아미파의 고수를 두 번째 놀라게 한 셈이다.
하지만 운몽은 제가 이 중년의 비구니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달아나는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운수의 손에 얻어맞기 전에 몸을 빼야 하는데, 거미줄에 붙들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으니 애간장이 탔다.
불쑥, 운몽의 귀에 귀왕수(龜王手)를 전해주던 사부의 말이 들렸다.
그건 광명존자의 절기 중 하나였는데, 존자는 처음으로 운몽에게 제대로 된 자신의 절기를 전수해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 달 전의 일이었다.
무공 초식을 전수하기에 앞서서 존자는 원리에 대한 강론부터 해주었고, 운몽은 처음 듣는 무리(武理)에 지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경청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는데, 이 절박한 순간에 불쑥 그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엉뚱하다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존자는 말했다.
“척발(擲發:던지는 것)과 질(跌:넘어트림)을 익힘에는 우선 몸의 펴짐과 굽힘, 수축을 능숙하게 해야 하느니라. 신체에는 대가(大架:큰 틀)와 소가(小架:작은 틀)의 구별이 있고 상·중·하의 구별이 있으며, 운동에는 추사(抽絲), 전사(纏絲), 면냉(綿冷), 강유(剛柔)의 부동함이 있다. 전변(轉變)에는 절질(折迭), 진퇴(進退), 쾌만(快慢), 계단(繼斷)의 부동함이 있다.”
그 말은 원리이면서 귀왕권의 허리가 되는 요결(要訣)이기도 했다.
사부의 말을 떠올린 즉시 운몽이 불쑥 몸을 일으키고 가슴을 내밀며 온몸에 힘을 불어넣어 뻣뻣하게 했다.
추사(抽絲)의 비결을 실행한 것인데, 그것이 지나쳐서 잔뜩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경험과 숙련의 미숙일 테지만 어쨌든 그는 새로운 경험으로의 첫발을 내딛은 셈이었다.
그가 어지럽게 흔들던 몸을 바로 세우자 마치 운수 비구니 앞에 단단한 바윗돌 하나가 불쑥 솟아난 것 같았다.
의외의 일이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몽의 운신법이었기에 운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강호의 경험이 아미파의 이대 제자들 중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는 운수로서도 대적의 상황에서 이와 같이 운신하는 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몸을 세운 즉시 운몽이 두 손바닥에 잔뜩 공력을 불어넣어 두 개의 칼로 내려치고 휘둘러 베듯 무찔러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무거운 짐수레를 끄는 황소의 그것처럼 무겁고, 몸의 움직임은 그놈의 등 위에 발을 까닥이며 걸터앉아 있는 목동(牧童)처럼 가볍고 유쾌했다.
또한 허공을 휘젓는 그의 양 수도(手刀)에는 엉킨 실타래를 일시에 끊어버리겠다는 기세가 담겼고, 능숙한 요리사가 반죽을 떼어내고 고기를 썰어대는 것 같은 익숙함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귀왕권(龜王拳)의 첫 번째 초식으로서, 광명존자가 강호에서 활동할 때 귀왕번자(龜王藩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던 절초였다.
공력이 더해지면 맨손으로 능히 바위를 두부처럼 가르고 보검을 꺾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아직 운몽의 공력은 일천했으나, 의외의 수법과 대적세(對敵勢)로 상대를 놀라고 당황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너 이놈! 그게 무슨 수법이지?”
크게 놀란 운수 비구니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즉시 좌로 맴돌았다.
공세를 멈추고 비켜서는 비구니를 향해 운몽이 성큼 발을 들이밀며 쫓아 들어간다.
운몽은 홀린 듯이 귓전에 울리는 사부의 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보법에는 나아감과 뛰어넘는 구별이 있다. 조예의 깊고 낮음은 용력(用力), 용착(用着), 용경(用勁), 용기(用氣), 용신(用身)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데, 용신이 가장 끝에 있는 건 나머지 네 가지가 결국 용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라. 반드시 마음이 오면 정신이 따라야만 매 동작을 할 수 있고, 그 가운데에서 척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성공한 것이며, 비로소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운몽은 그중 착(着)과 경(勁)의 비결을 본능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오히려 제가 운수에게 달라붙으려고 하는데, 매미가 나무둥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굳센 기운과 뜻으로 밀고 나아가니 철우경지(鐵牛耕地)라는 말과도 같다.
운수 비구니는 생전 처음 당하는 일에 더욱 놀랐다.
원래 아미파의 권법은 접근전에서 더욱 위력을 발휘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최대한 파고들어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걸 묘미로 삼고 있는데, 오히려 운몽이 더 악착같이 달라붙으려 하니 당황한 것이다.
운몽은 처음으로 제가 십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수련해 온 공력을 남김없이 끌어올렸다.
단전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고, 그곳에 축적되어 있던 공력이 급류가 되어 기경팔맥을 타고 흐르더니 운몽의 두 팔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마른 참나무처럼 단단해진 운몽의 두 팔이 어지럽게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는데, 두 손바닥을 통해 막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니 이제 운수 비구니의 놀람은 극에 달했다.
“이놈이 필히 음흉한 내력이 있는 놈이로구나! 내 반드시 너를 잡아서 정체를 밝혀내고 말리라!”
악착같은 음성으로 소리친 운수가 역시 공력을 끌어올려 마주쳤다.
굳세고 서늘한 그녀의 장력이 비수처럼 뻗어 나와 운몽의 두 손과 충돌했다.
꽈릉―!
경력과 경력이 부딪치자 폭약을 터뜨린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충돌점을 중심으로 하여 뜨겁게 달아오른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으음―”
운몽이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역시 그의 공력은 아미파의 걸출한 비구니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가슴으로 무거운 충격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어 정신이 아뜩해졌다.
운몽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짜릿한 통증이 의식을 붙들어준다.
“에잇!”
버럭 소리치며 두 손을 다시 한 번 벼락치듯 앞으로 내뻗자 운수가 조금 전처럼 가볍게 대하지 못하고 신중한 모습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후요접운(猴搖接雲)의 수법으로 도도하게 상대를 맞으려는 것이다.
운몽은 운수 비구니와의 충돌로 인해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괴로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내력을 끌어올리자 기경팔맥이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원래의 내력은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더 왕성하게 움직여 반응했다. 화가 난 것처럼 함부로 기경팔맥을 따라 뛰어다닌다. 그것이 운몽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이얏!”
제 몸 안에 있는 그 괴물을 밖으로 모두 쏟아내 버리려는 듯 운몽이 우렁찬 기합성을 터뜨리며 와락 쌍장을 밀었다.
은은한 뇌성과 함께 강맹한 암경이 뻗어나갔다. 주위의 공기가 운몽의 장력에 의해 무섭도록 팽창하며 증발한다.
순수한 열양장이었다.
운몽은 저도 모르게 사부로부터 배운 삼양신공(三陽神功)을 운기했던 것이다.
그것의 열기가 고스란히 장력에 실려 뻗어나가니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를 쏟아놓은 것 같았다.
맹렬한 열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후끈 달군다.
운수 비구니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눈앞의 운몽이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적(大敵)을 맞이한 것처럼 그녀가 신중한 모습으로 천천히 쌍장을 뻗어냈다.
아미파에는 몇 개의 놀랄 만한 신공절학이 있는데, 운수 비구니는 그중 특히 금강선공(金剛禪功)에 조예가 깊었다.
마음속으로 금강부동심법(金剛不動心法)을 떠올리고 금황예편기(金黃霓片氣)를 운기하자 그녀의 몸에 은은한 금빛 서광이 어렸다.
그것이 장력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나가는데, 노을빛을 받아 번쩍이는 금빛 비단 띠 두 줄기를 뻗어내는 것 같았다.
“조심해!”
넋을 잃고 그들의 숨 막히는 박투를 지켜보던 운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섯 자 간격의 허공을 격하고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쳤다.
꽈르릉―!
처음의 그것보다 더 크고 웅장한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으음―”
운수 비구니가 침음성을 흘리며 두 걸음 물러섰고, 운몽은 세게 내던져진 것처럼 뒤로 훌훌 날려갔다.
무려 이 장여나 그렇게 날아가 풀숲에 처박힌다.
죽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운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굴렀다.
두 번째의 충돌은 운수 비구니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멈추어 선 채 두어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서 탁한 기운을 몰아내야 했다.
운지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일 때, 숲 속에 처박혀 꼼짝하지 못하던 운몽이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고 꿈틀거렸다.
운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 운몽이 자신의 오성 공력이 실린 일장을 맞고도 견뎌낸다는 게 믿을 수 없기까지 하다.
가까스로 일어나 앉은 운몽이 울컥, 울컥, 몇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그러고 나자 한결 정신이 맑아진 듯 운지를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나는 네 사형을 당할 수가 없어.”
“이 바보야, 누가 싸우라고 했어?”
운지가 안타까움으로 어쩔 줄 모르며 소리쳤다.
운몽은 억지로 웃어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이 더욱 운지를 안타깝게 한다.
“미안해.”
그 한마디 말에 들어 있는 수많은 의미를 운지는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운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운몽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운수 비구니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런 운몽을 바라보았다. 번쩍이는 신광이 쭉, 뻗어나간다.
“너는 반드시 나를 따라 복호사로 가야겠다.”
비구니가 싸늘하게 말하고 운몽을 노려보는데, 추호의 연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운몽이 나무에 의지해 서서 씁쓸하게 웃었다.
“소생은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군요. 하지만 당신을 따라서 복호사로 가지는 않겠습니다.”
“기어이 화를 자초할 셈이냐?”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운지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순하지 않습니다. 그건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요. 당신은 나를 죽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결코 나를 핍박해서 복호사로 데려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운몽이 워낙 단호하게 말했으므로 운수 비구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떼를 쓰니 달래서 될 일이 아니고, 마혈을 점해 제압한다고 해도 끌고 갈 일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비구니의 신분에 총각 같은 소년을 업고 갈 수도 없지 않은가.
죽여 버리는 게 가장 쉬운 일인데, 운수는 차마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정이 비록 차갑고 모질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아미파에서 불도를 닦은 비구니인 것이다.
불살생계를 범하고 싶지도 않으려니와, 그가 죽여 마땅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운수가 망설이는데 운몽이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나는 가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잡아두려 한다면 나는 치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고, 나를 보내준다면 조만간 내 발로 다시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시는 운지를 돌아보지 않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비틀비틀 숲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때까지도 망설이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 철딱서니 없는 사매를 복호사로 데려가 물어보면 저 녀석에 대해서 알 수 있겠지. 그런 다음에 사부님께 고하고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지가 저 알 수 없는 녀석과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게 틀림없으니 언제든 저 녀석을 붙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비틀비틀 멀어지는 운몽을 바라보는 운수 비구니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저 녀석을 이렇게 살려 보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아니면 커다란 화근을 남겨둔 것인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