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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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475     추천 : 0     분량 : 6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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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좋습니다. 소정 사태를 잠시만 만나고 돌아가겠습니다.”

 “사태께서는 아미파의 가장 높은 어른이시고, 게다가 폐관정진 중이신데 너 같은 녀석이 무슨 배짱으로 감히 그분을 만나려 한단 말이냐?”

 “노사태와 저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니 사태께서는 허락하실 겁니다. 말씀만 전해주십시오.”

 “흐흥, 그렇게는 못하겠다. 네가 소정 사백을 만나뵐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몰라서 묻는 게야?”

 운수 비구니가 뾰족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 손에 잡혀서 복호사로 끌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싫어도 소정 사백을 만나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리치기 무섭게 달려들어 매섭게 손을 휘저었는데, 옷소매 펄럭이는 소리가 깃발을 휘두르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났다.

 운몽은 며칠 전의 일도 있고 해서 운수 비구니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미파에서도 고수로 꼽히는 비구니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겁을 먹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이곳까지 온 이상 어떻게 하든 운지를 만나거나 소정 사태를 만나 이번 일에 대하여 사죄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 길만이 운지를 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까짓, 죽으면 죽는 거지 뭐.’

 운지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운몽은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운수 비구니의 장영(掌影) 속으로 뛰어들었다.

 귓전에 우르릉거리는 뇌성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쉭쉭거리며 지나가는 손 그림자에 오금이 저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운몽은 제가 며칠 전보다 부쩍 내공이 높아진 걸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막상 운수와 다시 겨루자 여전히 저는 계란이고 운수는 단단한 바윗돌 같이 여겨졌다.

 육보장권과 연자십팔권을 줄줄이 풀어놓으며 대적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마음이 급하니 손이 따라주지 못하고, 시야가 좁아지니 마음은 더 급해진다.

 당연히 허둥댈 수밖에 없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운수의 장력 속에 깃들어 있는 암경의 여파로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멍해져서 그토록 세세히 기억하고 있던 사부의 구결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며칠 전 겁없이 그녀의 일장을 받았다가 낭패를 보고 죽을 뻔한 기억만 크게 떠올랐다.

 대단한 용기를 냈지만 아직 열여섯 살의 철부지 소년인 것이다.

 운몽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운수는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어찌된 게 이 꼬마 녀석의 내공이 사흘 전보다 부쩍 높아진 것 같은데?’

 그때는 제 힘에 못 이기고 쩔쩔매던 꼬마였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은 궁한 중에도 제법 꿋꿋하게 버티고 있으니 더 놀라웠다. 그러나 운수에게 운몽은 여전히 좋은 놀림감에 지나지 않았다.

 붙잡고 후려치며 할퀴고 걷어차는 등 몇 가지 저의 재간을 시험해 보는 중에 어느덧 다섯 초식이 지나갔다. 하지만 운몽을 때리지는 못했다.

 운수는 발끈 화가 났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매도 의식된다.

 “에잇!”

 독하게 마음먹은 운수가 아미풍염각(峨眉風簾脚)의 수법으로 발을 번쩍 들어 걷어찼다.

 무릎이 올라오는가 싶었는데, 씽― 하는 매서운 바람소리가 귓전에 와 닿는다.

 운몽이 급히 몸을 굽히며 회풍전류(廻風轉流)의 신법으로 맴돌았다.

 그러나 운수의 첫 발길질은 운몽의 운신 폭을 제한하려는 허초였다. 빗나갔나 싶었던 발이 먹이를 쫓는 영악한 살쾡이처럼 휙, 굽어지더니 그대로 운몽의 뒷덜미를 찍어버린다.

 꽝!

 운몽은 뒷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귓속에 윙윙거리는 이명이 가득할 뿐, 제가 서 있는 건지 주저앉은 건지 구분할 수가 없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 운몽의 복부에 다시 운수의 무릎이 틀어박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운몽의 몸이 들어 올려진 것처럼 불쑥 솟구쳤다. 그리고 저만큼 떨어진 곳에 꼴사납게 처박혔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중에 장이 파열되고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진 것 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운몽은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질기고 악착같은 근성이 끝까지 의식의 한 가닥 끈을 붙들고 놓치지 않은 것이다.

 끄응, 하는 신음을 흘리며 그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제 그동안 익혔던 모든 초식과 신법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조금도 소용이 없다.

 운몽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들 뿐이었다. 제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수법을 쓰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마구 덤벼드는 건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제법 손발에 실려 있는 경력이 굳세서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났다.

 그래서 며칠 전처럼 지금도 운수는 운몽의 그와 같은 투지에 놀라고 의아했다.

 ‘이 멍청한 녀석은 설마 목숨을 서너 개는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그런 생각마저 드는 건, 운몽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미련하고 고집스럽게 파고드니 그렇다.

 어느덧 운수 비구니의 야무지게 닫혀 있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꼬마야.’

 운몽이 화가 잔뜩 나서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걸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철없는 꼬마가 제 머리통을 들이밀며, 때려봐! 때려봐! 하고 떼쓰는 것만 같다.

 운수에게는 그런 운몽의 악착같은 꼴 또한 미우면서 한편으로는 기특한 놈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저런 근성과 악착은 아미파의 어린 비구니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차갑고 손속이 지독하기로 강호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운수였다. 제 사부의 영향을 받아 변덕스럽고 앙칼지기도 하다. 그리고 선과 악의 구분을 뚜렷이 할 줄도 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아미산에서 지극한 불법을 배운 비구니답게 마음속에는 따뜻한 자비의 마음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운수가 보기에 운몽은 아직 철부지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덩치는 여느 장정 못지않게 커졌고, 턱 밑이 거뭇거뭇해졌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그런 녀석이 며칠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놀라운 발전을 했고, 또 이렇게 근성까지 타고났으니 괘씸한 중에도 기특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운수는 운몽의 사문이 아미파와 어떤 원한을 맺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짐작할 뿐인데, 따지고 보면 그것과 이 철없는 꼬마 녀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 아닌가.

 오직 운지와의 관계 때문에 운몽을 배척할 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혼날 줄 알면서도 운지가 궁금해서 그 먼 길을 이렇게 달려와 준 녀석이 갸륵하기도 했다.

 그런 저런 생각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반씩 범벅이 된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운수는 처음 운몽을 만났을 때처럼 모질게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투정을 받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죽어라고 달려드는 운몽의 머리통을 슬쩍 밀어 방향을 틀어놓은 운수가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가볍게 허리를 비틀었다.

 빠악!

 그 즉시 운몽의 몸뚱이에서 마른 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운수의 팔꿈치가 정통으로 그의 턱을 가격한 것이다.

 운몽이 던져진 것처럼 한쪽으로 훌훌 날려가 삼나무 둥치에 세게 부딪치고 뚝, 떨어졌다.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가 애처롭게 들릴 뿐, 좀체 일어나지 못하는 게 심각한 타격을 입은 듯했다.

 운수 비구니는 운몽을 때릴 때에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모질고 독하게 때렸던 것이다.

 아니, 그녀가 단지 팔과 다리의 힘만으로 때리고 걷어찼을 뿐, 며칠 전처럼 내력을 실어 후려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큰 아량을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녀석이 아주 나쁜 놈은 아니야.’

 운수는 아직도 끙끙대고 있는 운몽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그런 녀석이 어째서 못된 사부를 만났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제 사부인 소령 사태의 말대로라면 남쪽 학정봉에 살고 있다는 운몽의 사부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대마두였기 때문이다.

 

 

 

 제7장 학정봉(鶴情峰)의 어린 폐인(廢人)이 되다

 

 

 

 갈 때는 날듯이 달려갔는데, 돌아올 때는 엉엉 울면서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걸어온다.

 운몽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보다도, 가슴에 남아 있는 억울함보다도, 제가 운지를 위해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는 게 분하고 부끄러워서 엉엉 울었다.

 울면서 낙일봉을 넘고 운대봉을 넘었다.

 생각할수록 운수 비구니가 밉다.

 언제든 그 인정머리없는 비구니를 호되게 때리고 내팽개쳐 주겠다고 결심하지만, 당장 그녀가 제 몸에 남겨준 고통을 생각하면 넌덜머리가 나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더 수련을 하고, 절기를 배워야 이길 수 있을지 암담하다.

 몇 년이나 지나야 한단 말인가. 나는 영영 그 비구니를 이길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분하고 절망적이 된다.

 운지를 구하기에는 제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없고, 제 힘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게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운몽은 깨지고 찢어지고 터진 상처에서 피를 흘리듯, 가슴속 깊은 곳에 피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밤새 비틀비틀 걸어 학정봉으로 돌아왔다.

 

 운몽이 엉망으로 깨진 몰골을 한 채 엉엉 울면서 돌아왔지만 광명존자는 제자가 겪은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부터 아무 말도 없었다.

 그가 또 한차례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도 그저 그러려니 했고, 애꿎은 사부에게 신경질을 내는 어린 제자를 보면서 속없는 사람처럼 허허, 웃기만 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사흘 뒤에 운몽은 부상에서 거뜬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운수 비구니와의 두 번째 싸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소년의 마음에는 운지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운수 비구니에 대한 원한도 씻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사건건 자신과 운지 사이에 끼어들어 일을 훼방하고, 저를 이렇게 개 패듯 두들겨 패니 좋은 감정이 싹틀 수가 없다.

 ‘좋아, 제가 힘이 세면 얼마나 세고, 무공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어? 반드시 앙갚음해 주고 말 테다. 아미파라고? 흥! 나는 반정도관파다! 아니, 그건 왠지 구질구질하게 들리는걸? 그래, 나는 광명전파다! 훨씬 낫군, 흐흐흐.’

 그런 생각으로 운몽은 먹고 자는 것을 잊은 채 초식을 단련하고 신법을 연마했다.

 툭하면 꾀병을 앓고, 게으름을 피우던 제자가 이를 악물고 무공을 수련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광명존자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하듯 돌아보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운몽은 그 보름을 열다섯 달처럼 썼다.

 조금의 게으름도 부리지 않고, 모든 심력을 쏟아 무공 수련에 매달리니 그 짧은 기간 동안 무섭게 빠른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반드시 운지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또한, 운수 비구니에게 앙갚음하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마음에서 생기는 오기와 독기를 수련에 다 쏟아 부었다.

 그래서 보름 동안 스스로를 달구어진 쇠처럼 만들어, 두드리고 또 두드리기를 쉬지 않고 했으니 그 성취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무관심한 듯 지켜보던 광명존자가 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던 것이다.

 

 보름 후, 운몽은 자신감에 부풀어 반정도관을 나섰다. 사부는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운몽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몽은 그 길로 날듯이 두 개의 높은 봉우리와 세 개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다섯 개의 험한 개울을 건넜다.

 저 아래, 짙은 삼나무 그늘 속에 복호사가 있다. 운지에 대한 애끓는 마음으로 운몽은 더욱 초조해졌다.

 지그시 삼나무 숲을 노려보던 운몽이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걸어 다가갔다.

 세월의 이끼가 잔뜩 덮여 있는 오래된 돌다리, 호욕교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이미 날은 저물어 반달이 머리 위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을 무렵이었는데, 호욕교 건너편, 어두컴컴한 나무 그늘 속에서 불쑥 한 사람이 나타나 잰걸음으로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운몽으로서는 절로 앞이 가로막힌 셈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다리 복판에서 딱 마주쳤다.

 운몽은 한눈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두 번씩이나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중년의 비구니 운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운몽과 운수가 바로 그랬다. 호욕교 한복판에서 서로 딱 마주쳤으니 피할 데도 없다.

 운몽을 가로막아 선 운수가 조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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