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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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680     추천 : 0     분량 : 6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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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는 날이 저물어서야 도관으로 돌아와 다 식어버린 밥을 말없이 퍽퍽 퍼먹고, 말없이 쓰러져 잠을 잔다.

 씻는 것도 귀찮아하고, 일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건 물론, 무공을 익히고 연마하는 것도 귀찮은지 아예 손에서 놓아버렸다.

 사는 게 귀찮아진 건 운몽 말고도 또 있었다. 학정봉과 운대봉, 낙일봉을 사냥터로 삼고 설쳐 대는 호랑이며 곰, 늑대들이 그렇다.

 운몽의 기척만 느껴도 꼬리를 말고 달아나기 바쁜 것들인데, 벌써 오래전에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길들여지지 않았던가.

 그동안은 운몽이 한 달에 한 번만 얼굴을 내밀더니 이제는 매일 그 길을 오고 가니 삶의 의욕마저 상실할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갈수록 운몽의 꼴은 꾀죄죄해져 갔다. 그렇게 밥을 퍼먹어대는 데도 살이 찌기는커녕 자꾸 말라서 마른 장작처럼 되어간다.

 그렇게 봄날이 덧없이 지나갔다.

 개울가에 나와 앉아 있는 운몽은 웬일인지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운지와 함께 앉아 바라보던 두견화 꽃나무였다.

 무성하던 연분홍 꽃들이 이제는 시들어 보기 흉하게 변했는데, 그마저 작은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분홍 우산을 쓰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던 꽃나무가 쓸쓸하게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운몽은 세월과 인생의 무상함이라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꽃이 떨어질 때까지 소년은 매일 개울가에 나와 앉아 그것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꽃이 뚝, 떨어지던 날 한숨을 쉬고 일어나더니 털레털레 반정도관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열여섯 살 소년의 여름이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귀찮은 매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어느덧 가을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돌아서서 밥 한 그릇 먹고 와보니 어느새 겨울이 섬돌 위에 올라서 있지 않은가.

 세월의 무상함이 그와 같았다.

 그동안 운몽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대봉을 오갔는데, 이 며칠 동안은 심하게 앓느라고 그러지 못했다. 성장통이라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지독한 성장통이었다.

 그리고 미칠 듯이 눈이 퍼붓고 난 아침, 잔뜩 흐려진 날이 또 한차례 눈을 쏟아 부을 것 같은 그 아침에 운몽은 삐쩍 말라 두견화 꽃나무 가지처럼 앙상해진 몸을 일으켰다.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거지 같은 몰골을 하고 비틀비틀 밖으로 나간다. 그가 작은 폐인이 되어버린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흰 눈으로 칠해진 광명전 앞 작은 뜰에서 서성이고 있던 광명존자가 운몽을 막아섰다.

 “이제는 네 마음대로 오고 가지 못한다.”

 “왜요?”

 “제자라고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 제자가 망가져 가는 걸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어서이니라.”

 “…….”

 그 말에 운몽은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보기에도 제 꼴이 폐인의 그것 아닌가.

 묵묵히 고개 숙이고 허연 콧김만 내뿜고 있던 운몽이 잔뜩 볼을 부풀리고 말했다.

 “운대봉에 가봐야 해요.”

 “왜?”

 “다 알고 계셨잖아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왜라니요?”

 “네 속마음을 내가 어찌 알랴.”

 “쳇, 원래 도통하신 분 아니었어요?”

 “흘흘, 이 쥐방울만 한 녀석아. 머리통이 아직 여물지도 않은 놈이 벌써부터 여자 때문에 스스로를 망쳐서야 쓰겠느냐? 장차 무엇이 되려고 이럴꼬? 그것도 여자 중이라니? 허,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운몽이 제 사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광명존자는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한다.

 “대체 사부님 맞아요?”

 기어이 운몽이 빽, 소리치자 광명존자가 능청을 떨었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느냐?”

 “못된 의붓아버지요.”

 “흘흘, 그럼 또 어때? 어쨌든 나는 가르쳐 주었고 너는 배웠으니 그러면 됐지, 웬 불만이 그리 많을꼬? 너는 못된 망나니 제자 녀석이다.”

 도대체 말이 먹히지 않는다. 운몽이 씩씩거리며 이리저리 흘겨보지만 광명존자는 의뭉스런 얼굴을 하고 딴청만 부렸다.

 “왜 가지 못하게 하느냐고요! 여태까지는 한 번도 상관하지 않았잖아요!”

 “그 여태까지와 지금과는 다르거든.”

 “뭐가 어떻게 다르죠?”

 “네가 말한 여태까지는 네가 두르고 있던 유년의 껍질을 깨뜨리기 위한 여태까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깨뜨리고 세상으로 불쑥 나와 날개를 펴고 어엿한 대장부가 되어야 하는 때이니라. 그런데도 그게 다르지 않단 말이냐?”

 “…….”

 그 말에 운몽은 풀이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어느덧 열일곱 살의 총각이 되어 있지 않은가. 참 세월 한번 빠르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갑자기 초조해진다.

 ‘지금쯤 운지는 어떤 곤란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데 나는 편하게 숨 쉬고 있으니 이건 그녀에 대한 도리가 아니고 의리가 아니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

 비좁고 음침할 게 뻔한 절연암에서 혼자 묵묵히 제 고난을 감내하고 있을 운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써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 멀리 복호사가 있는 곳이 잘 바라보이는 운대봉 꼭대기에 올라서서 그녀를 위해 빌고 또 빌어주어야만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는 제 정성이 반드시 그녀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단단히 믿어온 운몽이었다. 운대봉 정상의 바위 위에 그의 발자국이 새겨졌을 정도다.

 불쑥 든 그런 생각에 숯불 위에 올라선 것처럼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광명존자는 좀체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운몽이 반정도관을 나가던, 들어오던 자유롭게 놔두었던 존자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경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운몽으로서는 더욱 화가 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부의 말도 이해가 가지만, 대체 여태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고집이라면 제 사부를 능가하는 운몽 아닌가.

 한나절 동안이나 지칠 줄 모르고 광명존자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런데 어지간한 일에는 허허, 웃으며 슬쩍 넘어가 주었던 사부가 이번만큼은 한발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오 년은 긴 세월이잖아요. 제가 멀리서나마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어주지 않으면 그녀는 오 년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해라. 왜 꼭 운대봉이어야만 하는 거지?”

 “그녀와 저의 만남이 칠 년 동안이나 이루어졌던 곳이니까요. 운대봉의 산신령도 이제는 저를 알고 운지를 알 거예요. 그러니 제 정성도 더 잘 알아주시겠지요.”

 “흘흘, 운대봉의 산신령보다 학정봉의 살아 있는 신령님이 더 영험하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구나?”

 “쳇.”

 뻔뻔하게도 제 코를 가리키며 하는 사부의 말에 운몽이 흰 창이 드러나도록 눈을 흘겼다.

 그는 자신의 사부가 영험한 신선이라고는 한 번도 여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학정봉을 내려갔다가 얼큰하게 취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올 뿐, 그 외의 날들은 좁아터진 반정도관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 사부 아니던가.

 폐인도 그런 폐인이 없을 터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학정봉의 살아 있는 신령이라고 하니 한심하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 영험한 살아 있는 신령이 말했다.

 “작은 여자 중의 처지가 안되었다만 네 일이 아니고 내 일도 아니니 상관없다. 그냥 그대로 두어라. 그게 순리라는 것이니라. 커흠.”

 “어찌, 어찌 그런 몰인정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신령님.”

 사부의 말에 운몽은 잔뜩 비위가 상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극히 존경하는 어투로 이야기하지만 그게 잔뜩 비꼬는 것임을 모를 광명존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존자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센 비바람이 닥쳐도 꿈쩍하지 않는 커다란 바위 같다.

 “출가한 중들이야 화도 부처님의 뜻이고 복도 부처님의 뜻이니 너 같은 속인이 상관할 일이 아닌 게야.”

 “너무하시옵니다, 신령님. 운지가 불쌍하지도 않으시옵니까?”

 “나는 네가 더 불쌍하다.”

 “신령님께옵서 이 못난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제자는 학정봉에 사는 불쌍한 운 아무개의 고약한 사부처럼…….”

 거기서 광명존자가 매섭게 바라보았지만 운몽은 개의치 않고 마저 말했다.

 “……복호사의 부처님께옵서 그 작은 여자 중에게 못된 심술을 부릴까 봐 걱정이 되옵니다. 그러니 허락하소서, 신령님.”

 말끝에 꼬박꼬박 신령님을 찾으며 약을 올린다. 그러면 광명존자가 화가 나서 ‘당장 꺼져 버려! 이 못된 놈!’이라거나, ‘입 닥치고 저리 가지 못해!’ 하고 소리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 말이 떨어지는 즉시 운대봉으로 달려가려는 속셈이다. 사부가 꺼지라고 해서 꺼졌고, 저리 가라고 해서 갔으니 죄 될 게 없다고 빡빡 우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제멋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광명존자는 속이 없는 사람 같았다. 운몽이 뭐라고 하든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제 할 말은 다 하고 제 고집은 다 부렸다. 조금도 타협하거나 양보할 마음이 없다. 그러니 약을 올리던 운몽이 되레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부모가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이 미워서가 아니니라. 부처님이 그 작은 비구니에게 고난을 주신다면 그 비구니가 미워서가 아닌 게야. 그러니 너는 괜한 걱정 할 필요 없느니라.”

 “정말 야속하시옵니다, 신령님. 그러면 이 부족한 제자는 도관에서 도망쳐서라도 그 작은 여자 중을 위해 기도하러 갈까 하옵니다, 신령님.”

 “너에게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여태까지 나와 이렇게 입씨름하고 있지 않았겠지.”

 존자의 그 말에 운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제가 여태까지 아무리 입 아프게 빈정거렸어도 상대에게 준 충격의 강도에 있어서는 사부가 던진 그 한마디의 십분지 일, 백분지 일도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가 ‘에잇!’ 하고 소리치더니 사부를 밀치고 광명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즉시 몸을 날려 도관을 떠난다.

 제 사부의 결정적인 빈정거림에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무모한 용기를 낸 것이다.

 사부가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기어이 제 고집대로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하지만 운몽은 반정도관 밖으로 딱 열 걸음을 나갔을 뿐이다.

 “네가 감히 사부의 명을 어겼으니, 다시는 도관으로 돌아오지 마라. 나는 너를 더 이상 제자로 여기지 않겠다.”

 뒤통수를 때리는 사부의 그 말에 운몽이 멈칫하더니 멈추어 섰다. 현기증이 난 듯 비틀거린다.

 광명존자의 선언은 운몽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제가 아무리 속상하게 했어도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사부 아니던가.

 운몽에게 광명존자는 저를 키워준 은인이면서, 이 넓은 천하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부가 사제의 연을 끊겠다는 선언을 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부모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이제는 사부로부터도 버림받는 신세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운몽이 망연자실해 있는데, 사부의 말이 뒤이어 들려왔다.

 “거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니라. 커흠.”

 

 ***

 

 석 달이 또 지났다.

 산도 하얗고 땅도 하얗기만 하던 겨울이 어느덧 초록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학정봉 아래, 운지를 처음 만났던 이름없는 골짜기의 그 두견화 나뭇가지에도 꽃망울들이 잔뜩 영글어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애가 탄다.

 하지만 운몽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이야 알 바 없다는 듯, 광명존자는 여전히 시간만 나면 난간에 기대서서 발아래 아득히 펼쳐져 있는 아미산의 푸르러가는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먼 하늘에 있는 뜬구름을 바라보기만 했다.

 운몽은 죽을 맛이었다.

 운지를 생각하면 그녀와 떨어지던 그때의 일이 선연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 전의 일인 것처럼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파니 더욱 괴롭다.

 매달 만나서 즐겁게 지내던 일이 기억에 생생한데 쉽게 잊을 수 있으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으로 한 달을 늘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세월이 무려 칠 년이었다. 그런데 일 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홀로 절연암에 갇혀 있을 것이다. 매일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잊어야 한다. 그녀를 찾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결심을 지킬 수 있을까? 일 년 동안이나 꿋꿋하게 지켜왔으면 된 것 아닌가? 이만했으면 사내대장부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로 바작바작 속이 타 들어가지만 운몽은 사부의 충격적인 말을 들은 이후 한 걸음도 도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사부의 말이 반농담이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싫은 말이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서 자다가도 깜짝 놀라 일어나곤 한다.

 그러니 더 죽을 맛이었다. 운지와 사부의 엄명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사부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은 후부터 운몽은 사부로부터 배운 절기를 수도 없이 반복해 수련했으며, 새로운 절기를 배우는 데에 더욱 몰입하기도 했다.

 제 마음의 번민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운몽을 날이 갈수록 달라지게 했다.

 불과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의 성취는 삼 년을 고된 수련한 것과 다름없었으니, 광명존자의 치밀한 지도와 운몽의 타고난 자질에 근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사부가 금족령을 내린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운몽은 사부의 눈치를 보았다. 사부로부터 모처럼 잘한다는 칭찬을 받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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