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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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558     추천 : 0     분량 : 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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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절연암(絶緣庵)의 괴인

 

 

 

 운몽의 눈부신 성취에 광명존자는 무덤덤하게, ‘잘했다. 그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겨우 이 한마디를, 그것도 마지못해 하는 듯이 해주었다.

 하지만 존자는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운몽을 얻은 것이 말년에 만난 자신의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헛기침만 해대는 사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던 운몽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넌지시 운을 떼었다.

 “겨울을 보내고 나니 제 걸음도 많이 빨라졌지요?”

 “비로소 신법의 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겠지.”

 “손발도 제법 익숙해졌지요?”

 “비로소 권법의 흉내를 낼 줄 안다고 할 수 있겠지.”

 “내공도 부쩍 높아진 것 같은데…….”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운몽이 찢어질 듯이 눈을 흘기고 나서 가슴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이만하면 저도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놈아, 굼벵이의 탈을 벗고 이제 겨우 흉내 내는 원숭이 꼴이 되었는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느냐?”

 “쳇, 그럼 대체 얼마나 더 높아져야 한단 말이에요?”

 “네가 나와 열 초식을 주고받을 수 있고, 나의 내력을 반의반만큼만 따라와도 만족할 수 있겠다.”

 운몽은 사부의 말이 지독한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성취는 그 자신이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니 절로 자부심과 자만심이 싹텄던 것이다.

 이때라는 듯 운몽이 본심을 꺼내놓았다.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사부님과 열 초식을 겨루고, 사부님의 내공을 사분지 일만 따라갈 수 있으면 반정도관 밖으로 나가도 되는 거지요?”

 “흘흘, 네 녀석의 음흉한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자, 그럼 시작합니다.”

 사부가 허락한 걸 안 운몽이 방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즉각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꿈에도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강호에서 광명존자와 십 초를 나눌 만한 자가 드물다는 것을.

 운몽의 손발이 매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들이치는데, 과연 석 달 전까지만 해도 폐인에 다름없었던 그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어느덧 그의 육보권과 연자십팔권은 본능적으로 공수가 이루어질 만큼 능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광명존자만의 독특한 권법인 귀왕권 또한 가히 칠팔 성의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다.

 ‘이놈이 정말 물건은 물건이란 말이거든.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강호에 내놔도 충분하겠어. 적어도 내 망신은 시키지 않을 거야.’

 광명존자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비웃고 얕잡아본다.

 “어이쿠, 아깝구나. 거기서 조금만 재빨리 내뻗었더라면 내 볼을 쥐어박을 뻔했어.”

 “이런, 이런. 왼쪽으로 두 푼만 더 꺾었으면 나를 잡았을 텐데 말이다.”

 “이크, 그 일장은 꽤 매서운걸? 하지만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아쉽다. 조금 부드럽게 했으면 내가 꼼짝 못했을 거야.”

 “어이구, 이놈아. 그건 개발이야. 쇠말뚝도 걷어찰 수 없겠다.”

 매 초식마다 한마디씩 놀려대며 슬쩍슬쩍 피하거나 가볍게 손발을 뻗어 이를 악문 운몽의 주먹과 발길질을 걷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운몽에게 지독한 오기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빌어먹을! 잘도 놀려대는구나. 좋다, 사부고 뭐고 힘껏 때려주고 말 테다. 흥, 그때 가서는 또 뭐라고 이죽거리는지 봐야지.’

 그런 마음을 먹자 오히려 손발이 더 뻣뻣해졌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의욕이 생각보다 앞서는 까닭이다.

 운몽은 아직 마음이 몸을 통제하고, 눈이 마음에 앞서며, 손발이 눈보다 먼저라는 정교한 이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마음이 지나치게 앞서고, 의욕이 지나치게 강하니 손발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해 절로 허둥거리게 된다.

 “이놈아, 대체 그게 무슨 수법이냐? 나는 너에게 그런 엉터리 초식을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 너는 어디서 도둑질해 배워온 거지?”

 광명존자가 운몽의 머리통을 두드리며 조롱했다. 그럴수록 운몽은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든다.

 안 되겠다 싶었던지 존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말아 쥐고 있던 손가락 한 개를 튕기자 운몽의 이마 복판에서 딱! 하고 호두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이쿠!”

 눈앞에 별이 번쩍이고, 머릿속에 윙― 하는 공명음이 가득 차서 운몽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마에 달걀만 한 혹이 불쑥 솟아 나온다.

 장난기를 버리고 운몽 앞에 우뚝 선 존자가 근엄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꾸짖듯 말했다.

 “도대체 내 가르침은 몽땅 잊어버렸단 말이더냐? 내가 첫날 무학에 대해 강론할 때 해주었던 말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게냐?”

 “다 외우고 있어요.”

 운몽이 이마를 슬슬 문지르며 잔뜩 볼을 부풀리고 말했다.

 “어디, 그럼 척발(擲發)의 묘법 중 동경(憧勁)에 관한 부분을 말해보아라.”

 운몽이 즉시 구결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마음속에 생각하고 한시도 떠나지 않아야 무공을 연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오면 정신이 따라야만 바른 동작을 할 수 있고, 그 가운데에서 척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비로소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드시 마음과 손이 맞아야 하되 순수하고 자연적이어야 하며, 반응을 거짓으로 하지 않아야 경력이 끊이지 않고 수발하니, 이를 동경(憧勁)이라 한다.”

 어디 한 구절 막히는 곳도 없고 머뭇거리는 곳도 없이 줄줄 흘러나온다.

 광명존자는 자신의 구결이 이미 운몽의 뼛속에 깊이 각인되었다는 걸 알고 흐뭇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존자가 한층 엄한 얼굴로 꾸짖었다.

 “미련한 놈! 그러면서 손발을 내뻗고 거두는 일은 그렇게 엉성하고, 강약과 완급의 조절에는 그렇게 아둔하더란 말이냐? 흥, 너는 삼 년을 더 머물러 있어야겠다.”

 “아―”

 운몽이 절망하여 비명을 터뜨렸다.

 광명존자가 찬바람이 돌도록 옷자락을 펄럭이며 광명전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운몽은 머리에 돌을 맞은 사람처럼 주저앉아 멍하니 마른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봄과 여름이 지났고, 운몽은 여전히 오기와 고집으로 달려들지만 여전히 사부의 옷자락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동안은 광명존자가 빙글빙글 웃으며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가끔씩 손을 내밀어 매서운 공격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존자가 속으로 깜짝 놀라서 심각해지기도 한다는 걸 운몽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저 열 초식이 다 지나도록 여전히 사부를 때릴 수 없다는 게 화가 날 뿐이다.

 쓸쓸한 가을날, 운몽은 낙심하여 광명전의 계단에 걸터앉아 마당에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붉고 노란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정말 한심한 놈이다. 십 초가 지나도록 사부님의 옷자락 하나 건들이지 못하다니. 이러다가는 삼 년이 걸리기는커녕, 삼십 년이 지나도 사부님을 때리는 건 고사하고 잡지도 못할 거다. 삼백 년쯤 지나면 비로소 가능할까? 쳇, 그러면 뭐 해? 그래 봐야 사부님이 공격하기 시작하면 다시 십 초를 버티지 못할걸 뭐. 되지도 않는 일에 미련하게 매달리지 말고 그만둬 버릴까? 무공이라는 것이 애초에 나와는 맞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 아니, 나라는 놈은 무공에 영 자질이 없는 멍청이인지도 몰라. 그러니 몸 버리고 세월 버리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두고 다른 할 일을 찾아볼까?’

 그의 마음에는 어느덧 그런 생각이 깃들었다. 지독한 자기 비하이고 패배 의식이었다.

 그런 생각이 쌓이면 저절로 그렇게 되고 마니, 어느덧 열아홉 살 총각이 된 운몽에게는 그의 내면으로부터 가장 위험한 시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작은 노란 새가 찾아왔다.

 뜰 구석에 유일하게 우뚝 서 있는 한 그루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준다.

 “아!”

 운몽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작은 노란 새는 고운 부리를 재빨리 움직여 제 깃털을 가다듬으며 한껏 치장을 하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맑고 높은 목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깃털을 고른다.

 운몽은 넋을 잃고 그 작은 노란 새를 바라보았다.

 그 새를 보면 절로 운지가 떠오르고, 그 노랫소리를 들으면 운지의 낭랑하고 높던 음성이 절로 귓전에 울리는 것이다.

 

 “아니, 넌 누군데 이런 데에서 울고 있니?”

 

 개울가에서 처음 들었던 음성.

 그것이 운몽의 마음을, 정신을 사정없이 흔들고, 영혼에 깊은 떨림으로 울렸다.

 깃털을 고르던 작은 노란 새가 다시 노래했다. 운몽은 운지의 음성을 다시 듣는다.

 

 “쯧쯧, 눈이 퉁퉁 부었잖아. 그리고 이게 뭐니? 이리 와봐.”

 

 제 볼을 꼬집으며 개울가로 데려가던 운지의 작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운몽은 저도 모르게 제 볼을 어루만졌다.

 벌써 언제던가, 십 년도 훌쩍 더 지나가 버린 세월의 저쪽에 남아 있는 기억이지만, 작은 노란 새의 노래를 듣고 그때를 떠올린 운몽에게 그것은 바로 지금의 일 같기만 했다.

 차가운 개울물을 움켜 제 얼굴을 닦아주던 운지.

 그 작은 여자 중의 풋풋한 냄새.

 짜랑짜랑 귀에 울리던 맑은 음성.

 그리고 눈이 부셔서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그 투명한 얼굴.

 그때 찾아와 노래했던 작은 노란 새가 바로 지금 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고 있는 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운지는 영원히 그때의 운지일 뿐이다.

 백 년이 지나고, 몸이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지더라도 그 음성은 허공에 남아 영영 머물러 있을 것이다.

 

 “어머, 귀여운 아이네?”

 

 그 음성. 그것이 운몽을 미치게 했다.

 그녀를 보지 못한 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 이 년이 되어오고 있다.

 적막하고 쓸쓸해진 감정 위에 슬픔이 더해져 운몽은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흘러내려 가슴 앞 옷자락을 적신다.

 마지막 노래를 들려준 작은 노란 새가 포로롱, 하고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졌다.

 “에잇!”

 운몽이 고함치듯 외치고 벌떡 일어섰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잊은 채, 우르르 뜰로 내려가 미친 듯 주먹을 휘두르고 허공을 걷어찼다.

 미친 듯이 몸을 움직여 이리저리 내닫는다.

 언제부턴가 그는 알고 있었다. 운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뻑뻑해질 때는 이렇게 미친 듯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만이 그 아픔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제 몸을 학대하듯이 괴롭히는 일만이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준다는 걸…….

 

 산은 언제나 무심하다. 조바심 내는 일이 없다.

 계절의 오고 감에도 무심하고, 유수와 같은 세월 앞에서도 무심하다.

 애증도 없이, 노하고 기뻐하는 일도 없이, 싫어하고 좋아하는 일도 없이 묵묵히 수만 년, 수억 년을 침묵하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도인은 그 산에 들어가 산을 닮으려 하고, 바람과 눈과 비도 그 산에 들어가 산을 닮으려 하지만 도인은 제 한숨을 주고 산수유 한 가지를 얻을 뿐이고, 바람과 눈과 비는 제 눈물을 주고 종달새의 노래 한 자락을 얻어 내려올 뿐이다.

 그 산 중에서도 크고 높고 넓은 아미산에도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수많은 도관이 암봉마다 박혀 있고, 수많은 사찰이 골짜기마다 들어서 있지만 누가 과연 그 산을 닮아가는 건지 알아낼 수는 없다.

 운몽이 운지를 위해 그녀를 떠나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은 지 이 년이 훌쩍 지나갔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얼음이 두 번 얼고 녹았으니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세월일 테지만 산에게는 그렇지 않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눈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산은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놓아버리지 않는다.

 사람도, 짐승도, 그리고 눈비와 바람도 제멋대로 오고 갈 뿐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산을 말하지만 누구도 산의 마음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오고 가는 새들이 그 산을 지저귀지만 어떤 새도 그 산의 말을 들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덧 열여덟 살을 맞고 있는 운몽도 그 산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귓가에 아직도 쟁쟁한 운지의 음성만 들려오고 들을 뿐이다.

 무정한 세월은 그보다 더 무정한 산을 빠르게 스쳐 갔다.

 산도 세월도 제 본색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명존자는 변했다.

 더욱 나이가 들었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약해진 건지도 모른다.

 아니, 바윗덩이 같기만 하던 그것이 이 몇 년 사이에 부드럽게 변하여 구름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바깥나들이를 해도 좋다. 하지만 학정봉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져 겨울을 바라보는 어느 날 아침, 반정도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했던 존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네가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무공을 연마한 대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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