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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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478     추천 : 0     분량 : 5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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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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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스럽게 바위를 타고 내려온 운몽은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였다.

 똑바로 가면 호욕교가 나오고, 그것을 건너 조금만 더 가면 복호사에 이르는 것이다.

 오른쪽 길을 택해 복호사 좌측의 골짜기를 타고 순양봉을 향해 반 시진쯤 가면 뇌음사가 있다.

 운지는 그 뇌음사 뒤편의 절곡(絶谷)에 있는 절연암에 갇혀 있다고 했다.

 운몽은 우선 그곳부터 찾아가 보기로 결정하고 밤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오른쪽 소로(小路) 위로 뛰어들었다.

 콸콸거리며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급하게 들린다. 달빛도 받아들이지 않는 음침하고 깊은 골짜기는 굽이굽이 위로 뻗어 있었다.

 혹시라도 아미파 비구니의 눈에 뜨일까 봐 길을 버린 운몽은 그 골짜기를 따라 정신없이 치달려 올라갔다.

 매일같이 사부를 쫓다 보니 그의 신법이 이제는 완숙한 경지에 이르러서 마치 한줄기 바람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무사히 뇌음사의 낡은 돌담을 돌아 절연곡(絶緣谷)에 이를 수 있었다.

 음침한 골짜기 깊은 곳에 우거진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속에 절연암이 있다.

 운몽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앞뒤 가리지 않고 대나무 숲으로 냉큼 뛰어든 그가 바람처럼 이리저리 맴돌아 달려나갔다.

 드디어 저 앞에 절연암이 보였다. 뒤에 깎아지른 절벽을 두고 호젓하게 서 있는 낡은 암자였다.

 대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은은한 달빛을 받아 더욱 음침해 보인다.

 괴괴한 적막만 가득할 뿐,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아 귀신들의 놀이터 같기만 했다.

 운몽은 절연암이 보이는 곳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저렇게 낡고 외진 쓸쓸한 암자에 운지가 홀로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불빛도 없는 걸 보니 울다가 잠이 든 건지도 모른다.

 운몽이 무거운 돌을 잔뜩 넣어둔 것 같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천천히 절연암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제 뼈를 밟고 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만 하다.

 허리쯤 오는 돌 울타리가 둘려 있는데,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검푸른 이끼가 가득 덮여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서 군데군데 무너진 곳도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절연암의 낡은 문은 꼭꼭 닫혀 있었다. 창문도 대나무 덧창을 입혀놓아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반쯤 무너진 돌담 너머에는 작은 뜰이 있는데, 어찌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는지 드문드문 박아놓은 디딤돌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외진 암자였다. 저 낡은 문은 한번 걷어차 버리면 와사삭 부서져 내릴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운몽은 성큼 돌담을 넘어 들어갔다.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잡초 우거진 뜰을 건넌다.

 창가에 바싹 붙어 서서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의 창문으로 이동하자 그곳은 쪼갠 대나무를 이어서 만든 덧창이 낡아 벌어져 있었다.

 그 틈에 눈을 갖다 대니 원래 창문의 찢어진 창호 사이로 비로소 암자 안이 들여다보였다.

 검은 마루가 깔려 있고, 북쪽 벽에 소나무를 깎아 만든 부처님의 좌상(坐像)이 있었다.

 어찌나 낡았는지 칠이 거의 다 벗겨지고, 검은 때가 가득 앉아서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불당인 모양인데, 텅 비어 있어서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 좌상 아래 향로가 있고, 아직 한줄기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며, 그 앞에 귀퉁이가 너덜거리는 붉은 보료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누군가 예불을 드리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다.

 운몽은 그것이 운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녀가 아니고 누가 이 귀기스러운 곳에서 살며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겠는가.

 그 고운 비구니가 이런 곳에 이 년씩이나 홀로 갇혀 있다고 생각하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장 뛰어들어 운지를 끌어내고 싶다.

 그래서 손을 꼭 잡고 이 음침한 대나무 숲을 벗어나 세상 끝까지 달아나 버리면 누가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잠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운몽은 숨을 멈추고 눈에 더욱 공력을 실어 훔쳐보았다.

 여기저기 백 군데는 기운 것 같은 잿빛 헐렁한 승복을 입은 한 사람이 내당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가 어깨를 덮도록 치렁하게 늘어져 있는데, 조금도 손질을 하지 않아서 얼굴을 온통 가리다시피 했다.

 그런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어나와 적막한 불당 안을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귀신같다.

 은은한 달빛이 여기저기 갈라진 벽과 지붕의 서까래 사이로 스며들어 희뿌옇게 비치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그 사람을 본 운몽은 절로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비구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옷차림이 포대자루 같은 승복이라 몸매를 알아볼 수 없고, 머리가 길어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그 괴인이 한숨을 호― 내쉬는 것 아닌가. 그리고 거의 타버린 향에 새 향을 대고 입김을 불어 불을 옮겨 붙였다.

 그러느라고 앞으로 쏠리는 치렁한 머리를 쓸어 넘겼는데, 그것을 본 운몽이 속으로 ‘억!’ 하고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비록 옆모습을 얼핏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이 운지의 얼굴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운지였다.

 그 곱던 비구니가 귀신같은 몰골이 되어서 향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 년의 세월이 그녀의 피부를 눈처럼 창백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반짝이던 머리를 저렇게 치렁한 흑발로 뒤덮었다.

 운몽은 그녀가 운지라는 걸 알고 나서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린다.

 운지는 잠시 멍하니 불당 한복판에 서 있다가 부드럽게 손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운몽은 그녀가 오랫동안 홀로 이런 적막한 곳에 있다 보니 혹시 미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운지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갈수록 빨라지고 맹렬해지더니 드디어 불당 안에 싸늘한 냉기가 가득 찼다.

 그것들이 먼지를 어지럽게 말아 올리고, 수십 개의 회오리바람이 되어 불당 구석구석을 제멋대로 옮겨 다닌다.

 그녀는 소령 사숙으로부터 전해 받은 구음신장을 수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음한지기를 이끌어내는 것인데, 순결한 처녀의 음기로 그것을 펼치니 그 위력이 더욱 정순해서 순식간에 칙칙한 불당이 얼음굴로 변한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녀의 구음신장은 이미 칠팔 성의 성취를 이루고 있어서 능히 나무를 얼리고 바위를 부술 만했다.

 이처럼 보름달이 뜬 한밤중에 수련을 하면 그 효과가 보통 때보다 배는 크다.

 운지는 저의 신공 수련에 온 정신을 팔고 있어서 운몽이 덧창 사이로 훔쳐보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찾아왔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운몽은 운지의 춤사위에 넋을 잃었다. 그것이 아미파의 비전 절기 중 하나인 구음신장이라는 건 조금도 모르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오직 운지를 드디어 이렇게 제 눈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 걸 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나무 숲에 한 사람이 귀신처럼 우뚝 서서 저를 쏘아보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제9장 아미냉염(峨眉冷艶) 소령 사태(素翎師太)

 

 

 

 “흥.”

 낮은 코웃음소리가 운몽의 귀에 천둥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억!’

 운몽이 운지를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 즉시 몸을 웅크리고 휙, 돌아섰다.

 무너진 돌담 사이로 저 건너 대나무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하얀 옷의 괴인이 보였다.

 ‘들켰구나!’

 이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하얀 옷의 괴인이 천천히 다가왔는데, 이십여 장 밖에 이르러서야 운몽은 그 사람이 늙은 비구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겁도 없는 자로구나. 감히 이곳에 숨어들다니?”

 늙은 비구니가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하며 성큼 돌담을 넘어 들어왔다.

 운몽은 제가 온 것을 운지가 알게 될까 봐 좌불안석이었다. 달아날 곳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는데, 늙은 비구니가 다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내 앞에서 감히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운몽은 그 늙은 비구니가 아미파에서도 까다롭기로 이름난 소령 사태라는 걸 전혀 모른다.

 사태는 매월 보름 운지에게 찾아와 한 달 동안 이룬 그녀의 성취를 확인하고,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자세한 가르침을 내려주었는데, 오늘이 마침 보름이었던 것이다.

 멀리서 절연암을 엿보고 있는 자를 발견하고 단단히 화가 났다.

 “너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거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이냐?”

 “소생은, 소생은…….”

 운몽은 저를 밝힐 수 없으니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 이름을 대면 운지가 놀랄 것이고, 제가 학정봉에 사는 낙 아무개라고 하기에는 떳떳하지 못한 면이 있지 않은가.

 그가 우물쭈물하자 소령 사태는 더욱 화가 났다.

 “정체를 밝힐 용기도 없는 녀석이 아미파의 중지에는 잘도 들어왔구나?”

 절연암 안에서 사숙을 기다리고 있던 운지도 바깥의 소란을 알았다. 그녀가 감히 얼굴을 내밀지는 못하고 소리쳐 물었다.

 “소령 사숙, 밖에 누가 있나요?”

 “별것 아니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서 다그치고 있는 중이니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운몽은 운지의 말을 듣고 눈앞의 노비구니가 바로 아미산에서 가장 까다롭고 고약하다는 소령 사태라는 걸 알았다.

 ‘이거 큰일 났구나. 하필이면 걸려도 더럽게 걸렸다는 말이 있더니, 내가 딱 그 꼴이구나.’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던 이 아미산의 매정한 노사태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저는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이곳에 오게 된 것뿐, 다른 아무 사심도 없습니다. 비켜주시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포권하며 변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소령 사태를 더욱 화나게 했다.

 “흐흐, 우연히 찾아오게 된 놈이 도둑처럼 안을 엿보다니? 사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천천히 밝혀내면 될 일이고…….”

 소령 사태의 눈이 가늘어진다. 매서운 빛이 이글거렸다.

 “내가 순순히 비켜주지 않으면 아미산을 한바탕 시끄럽게 하겠다는 거냐? 고얀 놈, 감히 나를 협박하다니…….”

 ‘다들 말하기를 아미산의 소령 사태가 독 오른 암고양이 같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기어이 말꼬리를 잡고 몰아세울 모양이니 이걸 어쩐다…….’

 운몽은 난감하기만 했다. 아미삼소로 불리는 아미산의 세 늙은 비구니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이제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소령 사태와 이렇게 딱 맞닥뜨렸으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하지만 이대로 붙잡혀서 수모를 당할 수는 없었다. 운지 앞에서 개처럼 벌벌 기는 모습을 보여서야 될 말인가. 아니, 운지가 제 존재를 눈치 채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

 그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운몽을 급하게 했다.

 그가 억지로 목소리를 어눌하게 하고 잠기게 해서 말했다.

 “사태께서 그러시니 소생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꾸벅 머리를 숙여 보이기 무섭게 훌쩍 몸을 날렸다.

 이제는 능숙해졌다고 자부하는 사문의 유운신법을 한껏 펼친 것이다.

 그 즉시 운몽은 쏘아진 살처럼 옆으로 길게 날았다. 단숨에 돌담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건데, 그의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흥!”

 귓전에 소령 사태의 싸늘한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싶은 순간 어느새 머리 위를 잿빛 그림자가 덮어온다.

 깜짝 놀란 운몽이 급히 추풍동선(秋風東旋)의 수법으로 몸을 기울이며 맴돌았다.

 쉿,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장영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는데, 늘어진 소맷자락이 이마를 쓸고 간 것이어서 운몽은 대경했다.

 소맷자락에 실려 있던 한줄기 암경이 밀려들어 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어느새 소령 사태는 운몽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귀신이 바람을 따라 움직인 것 같다.

 어금니를 악문 운몽이 다시 쾌속절륜한 일보추월(一步追月)의 신법을 발휘하여 이번에는 사태의 왼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뒤편에서 언뜻 사태의 호리호리한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앞을 가로막혔다.

 머리 위에 서늘한 바람이 있는 것이, 노사태가 훌쩍 저를 뛰어넘은 게 틀림없다.

 ‘도대체 이 늙은 비구니는 귀신이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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