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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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494     추천 : 0     분량 : 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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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젓가락질은 한 손으로 충분하거든. 아무리 많은 음식도 젓가락 하나로 다 집어 먹느니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 광명존자는 늘 그랬다.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하니, 정신 차리고 듣지 않으면 핵심을 놓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백 가지 무공을 알고 있다고 해도 다 소용없다는 것이니라.”

 “왜요?”

 또 그 ‘왜요?’ 하고 묻는 말버릇이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었던 것이 자라면서 점차 사라졌는데, 다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광명존자가 인상을 쓰고 노려본다.

 “나무꾼이 나무를 찍는데 도끼 하나면 충분하지, 번거롭게 이것저것을 찔끔찔끔 써대는 것 보았느냐?”

 “나무꾼도 못 보았습니다.”

 운몽이 심통이 나서 대꾸했다. 광명존자가 할 수 없는 놈이라는 듯 한숨을 쉬고 말한다.

 “그와 같이 싸우는 데는 검이면 검, 장이면 장 하나면 충분한 거야. 적을 거꾸러뜨리는 데는 결국 익숙한 한 가지 수법이 필요할 뿐이니라. 다른 건 백 가지가 있어도 다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하나만 확실하게 잘 연마해 두면 그걸로 된다는 거로군요?”

 “그렇지.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먼.”

 “그럼 그동안 가르쳐 주신 이것저것들은 뭐죠? 왜 처음부터 한 가지 절기만 가르쳐 주시지 않고.”

 그랬더라면 훨씬 시간도 절약되었을 것이고, 제 수고도 덜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광명존자가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에휴, 이놈아. 그 한 가지 절기를 위해서 나머지가 필요한 거야. 나면서부터 젓가락질을 하고 도끼질을 할 줄 안다더냐? 익숙해지기까지 세월이 필요하듯이, 나의 그 세 가지 절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그 밖의 것들이 필요했던 거야. 이제 알아듣겠지?”

 운몽이 ‘아하,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연자십팔권이며 육보장권, 유운신법 등 그 밖의 여러 가지 수법들은 지금 자신이 익히고 있는 이 세 가지 절기를 위한 초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광명존자가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였다. 이왕 줄 것, 확실하게 주자는 마음인 것 같다.

 “눈치 챘겠지만, 분광십이검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쾌검법이니라. 원래 쾌검법이란 단순해서 초식이 그리 많지 않은 법이야. 하지만 나의 분광십이검은 무려 열두 초식이나 된다. 그게 무슨 뜻이겠느냐?”

 “저야 모르죠.”

 “쯧쯧, 어떤 상황, 어떤 방위에도 구애받지 않고 펼칠 수 있는 쾌검법이라는 거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쾌검법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고, 모든 쾌검법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검법인 게야.”

 “아하, 그렇군요.”

 반응이 심드렁하다. 운몽은 번쩍, 하는 순간에 승부를 내버리는 쾌검법보다 무언가 화려해서 보는 사람의 눈도 즐겁고, 절로 감탄하게 되는 그런 검법을 원했던 것이다.

 절연암에서 운지가 추었던 춤사위처럼 멋지고 우아하며 화려한 동작 속에 절묘한 수단이 감추어져 있다면, 패배하는 자도 탄복하고 즐거워할 것 아니겠는가.

 싸우는 것도 멋있을 것이다.

 그런 운몽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광명존자가 타이르듯 말했다.

 “이놈아, 이 겉멋만 잔뜩 든 바람둥이 같은 놈아. 내 말을 잘 들어라.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은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죽여야 할 자의 가슴을 찌르는 데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니라. 검을 곧게 뻗어 그냥 찌르는 거지. 아무리 그 동작이 화려하고 요란해도 결국 찌르는 순간에는 다 소용없는 거야. 괜히 힘만 낭비할 필요 없지. 열 놈, 스무 놈을 상대해서 싸운다고 생각해 봐라. 검무를 추듯이 했다가는 몇 놈 찌르지도 못하고 제풀에 지쳐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죽게 되는 거야. 너는 그걸 원하는 것이냐?”

 “아니요.”

 운몽은 비로소 존자의 검법에 깃든 의미와 원리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상대를 찌르고 이기기 위한 검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적, 무패의 검법이라고 해야 하리라.

 존자가 다시 말했다.

 “나는 과거에 분광십이검 하나로도 검정중원(劍征中原)을 이루었더니라. 나의 쾌검법 삼 초식을 제대로 받아내는 자가 드물었지. 내가 검을 뽑지 않아도 상대는 벌써 기가 질려 스스로 물러났더니라.”

 “아, 사부님은 무시무시한 쾌검수였군요?”

 “흐흐흐, 그 말은 너무 약하지. 천하제일의 검협이라고 해야 하느니라. 나의 검이 울면 천하가 두려움에 몸을 사렸으니까.”

 운몽은 그런 사부의 모습을 도대체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 저렇게 광명전의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꾀죄죄한 늙은이의 모습에서 위진천하(威振天下)하던 한 사람의 늠름한 검협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른 걸 더 가르쳐 주세요.”

 “왜?”

 “강호에 나가서 죽으나 사나 분광검법 하나만 쓰다 보면 질릴지도 모르잖아요. 사람들도 금방 알아챌 거고.”

 “하긴 그렇다.”

 머리를 끄덕여 동의했지만 광명존자는 운몽의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멋들어진 걸 원하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광명존자는 운몽이 원하는 걸 한 가지 더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날부터 운몽은 새로운 검법 하나를 더 배우게 되었는데, 구곡유수검(九谷流水劍)이라는 것이었다.

 운몽은 그 이름의 우스꽝스러움 때문에 심드렁했지만 막상 검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연신 싱글벙글하며 그것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아홉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처럼 막힘이 없고 자유로운 검법이었다.

 천만 가지의 초식과 변화가 오직 한 가지 원리에서 비롯되듯이, 한 가지 원리로 귀결되듯이, 구곡유수검은 변화와 흐름을 중시하는 화려한 검법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변화가 결국 일기만천(一氣滿天)이라는 한마디 말로 귀결되었다.

 그건 아홉 골짜기를 흘러내려 온 개울이 모여서 강이 되고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 검법에는 세상 모든 검법의 변화가 다 깃들어 있느니라.”

 광명존자가 그렇게 큰소리쳤을 때는 속으로 비웃기만 했는데, 점차 구곡유수검에 익숙해지면서 운몽은 제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그 검법은 흐름이 부드럽고 질겨서 어느 한 곳 끊기거나 막히는 곳이 없었고, 도도한 흐름 속에는 무한한 자유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무한한 변화가 되고 변식이 된다.

 원리는 하나인데 그것에서 갈라져 나오는 것이 이리저리 얽힌 나무뿌리처럼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구곡유수검은 초식이 없는 검법이면서 수없이 많은 초식을 가진 검법이기도 했다.

 광명존자가 자신의 삶과 도(道)를 통해 깨우친 인생의 원리를, 세상과 우주의 원리를 매우 잘 살려서 만들어낸 검법이었던 것이다.

 운몽은 그것이 꼭 제 마음에 들었다. 저의 타고난 자유분방한 성질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가 검법의 수련에 세월 가는 걸 잊고 살던 어느 날, 광명존자가 그를 불러 앉히고 말했다.

 “검이란 뽑으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불길한 물건이니라. 그러니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함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 대저 검 뽑기를 마치 젓가락 통에서 젓가락 뽑듯 하는 자치고 제대로 검을 아는 자는 없느니라. 겉으로는 잔뜩 위엄을 부려도 하수일 뿐이지. 진정으로 검을 아는 검객이라면 언제나 검 뽑기를 망설이고 주저하느니라. 그런 사람은 겁쟁이, 하수인 것처럼 보여도 가장 위험한 검객인 거야.”

 “잘 알겠습니다.”

 “검을 수련한 자는 언제나 검의(劍意)를 깊이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저야 아직 모르죠. 검을 쥐어본 적도 없는걸요?”

 운몽은 아직 검을 손에 들어보지 못했다. 사부가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검법을 연마하는 데도 적당한 무게의 나무토막을 들고 했을 뿐이다.

 운몽의 퉁명스런 대답에 광명존자가 빙긋 웃고 말해주었다.

 “검의란 검의 궁극에 이르기를 원하는 높고 장한 뜻인데, 그것은 바로 활검(活劍)이니라.”

 “조금 전에는 검이란 뽑으면 반드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불길한 물건이라고 하셨는데요?”

 “그건 검의를 얻지 못한 자들의 검이고 하수의 검이지. 살검인 게야. 하지만 진정한 고수의 검은 사람을 살리고 이롭게 하는 활검이니라. 그 뜻을 알아야 비로소 검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운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이 의원의 침도 아니고 주방에서 쓰는 칼도 아닌데 어찌 사람을 살리거나 이롭게 하는 물건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화두처럼 가슴에 남은 순간이었다.

 그런 운몽의 가슴에 사부의 마지막 말이 풍덩, 하고 떨어졌다.

 “죽여야 살리고, 죽어야 다시 사는 이치를 궁리해 보거라.”

 

 하루가 다르게 운몽이 멋진 청년으로 변모해 갈 때, 그의 사부는 더 많은 주름살에 뒤덮인 볼썽사나운 노인으로 변해갔다.

 젊었을 때는 남달랐을 호기도 어느덧 사라져 게으름으로 남았고, 정기가 번쩍였을 눈가는 짓물러 늘 눈곱이 낀다.

 탄력있던 피부도 나무껍질처럼 변해가 이제는 어디에서도 젊고 영준한 모습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노인이 된 것이다.

 그런 광명존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밤 짐승들만 눈을 뜨고 있을 한밤중이었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도경(道經)을 읽고 있던 광명존자가 숨을 삼켰다.

 어느덧 아미산에 틀어박혀 보낸 세월이 오십 년이었다. 이제는 도에 통해서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린다더니, 정말 그렇게 되기라도 한 건지 모른다.

 존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두워진 얼굴을 숙이고 있더니 길게 탄식했다.

 “참으로 지난 세월들이 덧없어지는 때로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방문 밖으로 나간다.

 운몽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존자는 그가 깨어날까 봐 두려운 듯 극히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달빛이 은은한 뜰에 내려서서 잠시 하늘을 보고 땅을 보더니 훌쩍 몸을 솟구친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아할 정도로 게으르고 굼뜨기만 하던 존자가 아니었다.

 번쩍, 하고 그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다.

 달빛을 뚫고 솟구친 존자가 광명전의 지붕을 한 번 찍더니 그대로 깎아지른 절벽을 차며 훌훌 솟구쳐 올라갔다.

 절벽을 딛고 달리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가 훌훌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존자는 변신의 도술을 써서 커다란 밤 부엉이로 변해 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높은 풍소애 꼭대기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존자는 그곳에서 한 사람을 보았다.

 밤바람에 표표히 승복 자락을 휘날리며 등지고 서 있는 비구니였다.

 “아미타불―”

 기척도 없이 그림자처럼 풍소에 꼭대기에 올라선 존자의 존재를 벌써 느낀 듯, 비구니가 떨리는 음성으로 낮게 불호를 외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서 있기만 했다.

 존자는 깎아지른 듯한 풍소애를 등지고 서서 한 그루 고목처럼 말이 없고, 존자를 등지고 서 있는 비구니 또한 그대로 돌부처가 된 것처럼 말이 없다.

 

 두 사람의 옷자락 날리는 소리만 적막한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구니가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음성으로 말했는데, 마음의 격동을 가까스로 참는 듯 목소리가 사뭇 떨려 나왔다.

 “나는 당신에게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군요.”

 “하―”

 존자가 길고 길게 탄식했다.

 “나는 그대가 지금쯤은 나무 같고 돌 같아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구려?”

 “당신은 나무 같고 돌 같아졌나요?”

 “나도 그렇지 못하다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말이 끊어졌다. 한동안의 적막이 흐른다. 귓전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 소리를 듣기 얼마 동안이었을까. 비구니가 다시 말했다.

 “벌써 오십 년이 지났어요.”

 “그렇군.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

 “나는 이제 당신이 그만 아미산을 떠났으면 좋겠어요.”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천하는 넓으니 아미산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몸 하나 숨길 곳은 많을 거예요.”

 “그렇겠지. 하지만 아미산에서조차 내가 앉을 손바닥만 한 땅을 가질 수 없다면 아무리 넓은 천하라고 해도 역시 그럴 것이오.”

 “당신은 정말 뻔뻔하군요.”

 비구니가 잔뜩 화난 듯 말하고 비로소 몸을 돌이켜 광명존자를 마주 보고 섰다.

 은은한 달빛 아래 주름진 얼굴이 드러난다. 복호사의 소정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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