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아침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늦은 시간에 일어나버렸다.
"……나, 유령이었지."
평소대로 이불속에서 나와 세면실의 거울을 보고 내뱉은 한마디였다.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지 눈 밑의 숫자는 그대로 30이었다.
잠에서 깨듯 유령으로서 눈을 떠버린 것은 어제 저녁쯤이었으니.
그건 그렇고 유령이 되어도 오래자는 안좋은 습관은 여전한가보다.
씻은 다음엔 맨션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향했다. 그곳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멋대로 가져다먹는 걸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평소대로라면 이 다음엔 곧장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유령이 된 이상 무조건 밖을 나와 뭔가를 해야한다.
그런 의무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게 유령이 되어서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조금 안타깝지 않을까.
모처럼의 기회에 여러 장소를 돌아다닐 생각이다. 일단은 외출의 정석인 시내로 향하기로 했다.
시내에 위치한 안경점 건물 유리에 기댄 채, 오늘은 뭘 하며 하루를 보낼 지에 대해 고민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는 그때.
고등학생으로 추정되는 여학생 두 명이 눈 앞을 지나간다.
몸매가 강조되게끔 수선한 교복과 나름대로 괜찮은 몸매.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하는 순간이 오지 않은가.
그것과 비슷하게 대수롭지 않은 무의식적인 시선속에서, 불현듯 떠오른 성욕이라는 단어가, 현재의 내가 유령이라는 사실에 섞여들었다.
그 두 개가 섞이더니 이내 그다지 떳떳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됐다.
만지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대놓고 감상하는 것 정돈 쉽겠지.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들은 물론 지나가는 행인 또한 모를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생각만으로 끝냈다. 순간 해볼까 싶은 마음이 없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간단하게 마음을 돌릴 수 있던 건, 아직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싶진 않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언젠가 그런 고지식한 관념이 깨져버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땐 여탕이나 여자 화장실이라도 들어갈 생각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웬만하면 방금같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합의하며 발을 뗐다.
어제처럼 장난을 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만,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서도 차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왕 외출한 김에 익숙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를 가보려한다.
모험심 비스무리한 감각은 꽤 오랜만이지 않을까.
목적지는 딱히 설정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슬쩍한 시원한 컵커피를 느긋하게 마시며,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코너를 돌고 괜찮아보이는 곳이 바로 목적지다.
그래도 다시 돌아갈 땐 곤란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염두했다.
그렇게 방랑유령이 된 지 이십 분 정도가 지나니 꽤 경사진 언덕의 주택가가 들어섰다.
겨울 날이 되면 이 곳에서 썰매를 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길었는데, 물론 실제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평범하게 인도를 계속 걷는것보다는, 저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는게 더 색다를 것 같아 방향을 틀었다.
언덕에는 밀짚모자를 쓴 노인 한 명이 폐지가 수북히 쌓인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조끼와 와이셔츠, 그리고 통이 큰 반바지는 모두 허름해보이는 복장이었다.
꽤 힘이 드는지 노인은 중간 부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별 생각이 다들었다.
저렇게 늙어서까지 폐지를 줍거나 경사를 오르며 고단하게 삶을 살아가고 싶은걸까?
페시미즘에 단단히 속박된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멋대로 내 주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허름한 복장을 한 노인의 뒷 모습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우러 다니셨던게 아닌 구멍가게를 운영하셨던 것.
아무튼. 나는 리어카 뒤에 바짝 붙어 서서히 힘을 실었다.
장담컨데, 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이런 선행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 이런 짓을 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 게 분명할테니까.
좋은 의미라도 그런건 반갑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이렇게 자처해서 도와주는 사람을 가끔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칭찬한 적도 있지만 반대로 '지 몫이나 잘 간수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타인을 도와주는거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했었던 바보 취급을 당할까봐. 그런 피해의식도 확실하게 있다.
살아 생전 이런 짓은 할 내가 아니고, 한 적도 없지만 아무래도 유령이 되다보니 선행 뒤에 찾아올 것들에 대한 우려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리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괜히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진다.
어쩌면 단순히 목적이 필요해 수단으로써 활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수단이든 선심이든간에 그건 중요치 않다. 뭔가가 이상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리어카를 밀어주는 동안 뿌듯함보다는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정체성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다. 분명,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있다.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위화감의 정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경악했다. 위화감을 파악한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 틀림없다.
무슨 소리냐면, 나는,
─리어카를 만질 수 있을리가 없다.
통과하지 않았다. 확실히 만지고 힘을 실었다.
"고마워요, 젊은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어요."
"아, 예……. 아닙니다."
날 통과한 사람은 이미 손발가락을 이용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줄곧 그래왔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건가? 할아버지는 유령인건가? 유령끼리는 닿을 수 있는건가?
수레를 밀면서 고민하던 그때. 저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아줌마가 노인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르시는구나. 힘드시겠어요."
"허허. 그래도 오늘은 뒤에 젊은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어요."
노인이 말하자 아줌마는 내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에,에이~ 영감님도 참 짓궂으셔~! 또 저번처럼 귀신이 보인다고 장난치시는거죠? 호호호. 그런 장난 그만 두시라니까 정말~"
곧이어 멈칫하던 아줌마는 어색하게 웃어넘기더니 자리를 빠져나오듯 걸음을 서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젊은이는 유령인가 보네요."
인자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군. 나는 그 한마디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유령이 아니다. 다만, 어째서인지 유령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벌써 저 멀리까지 내려간 아줌마는 아마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같은 반응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테니.
노인은 어째서인지 유령을 볼 수 있으며, 그렇기에 이 곳의 이웃 사이에선 괴짜 취급을 받는다.
언덕을 다오르고나니 평평한 두 갈래의 주택가가 들어섰다.
잠시 리어카를 내려놓은 노인은 그대로 바닥에 앉아 밀짚모자를 벗어두었다.
그를 따라 옆에 앉으니 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노인은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유령을 보는 건 젊은이가 처음이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가늘게 뜬 두 눈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내리막 길을 보고있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않은건지 헛 것이 보여요.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고장난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무서워 벌벌 떨었지요."
"지금은 괜찮으신것 같은데요?"
"그래요. 지금은 멀쩡하답니다.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거든요."
"제가 무섭진 않으세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고마운걸요."
고맙다라….
어제부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 심한 짓을 해왔던 나이기에, 노인의 말 한마디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며 거만해질 생각은 전혀 없다.
수레를 밀어준 건 확실히 선행이겠지만, 과연 그런 말이 어울리는 인간인지는 조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노인의 잠잠한 파도같은 주름이 한 순간에 가득 구겨지더니 거센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나이가 나이다보니 몸 이곳저곳이 쑤셔요. 요즘은 기침을 자주하게 돼요. 분명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거야."
확실히 그의 기침은 언제 죽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심각해보였다.
더군다나 노인 자신도 저렇게 말하니 분명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옷자락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닿는 순간, 조그맣게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처럼 직접적인 접촉은 불가능하지만 어느정도의 간섭은 할 수 있는가보다.
죽음에 가까운 인간들 중에선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새로 알게된 사실이다.
떠올려보면 돌아가시기 전 날의 친할아버지도 누군가가 보이신게 아닐까?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다니셔도 괜찮은 거에요?"
"내가 죽기전에 우리 할멈한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렇게 일을 하는거지요."
"……그렇군요."
그의 터무니없는 헌신은 칭찬받아야 마땅하겠지. 솔직히 말해 저정도까지면 존경스럽기도 하다.
노인은 허름한 조끼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A4용지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는 우둘투둘한 아스팔트 땅을 받침삼아 뭔가를 접기 시작했다.
"뭘 하고 계시는 건가요?"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어요."
"재밌어 보이네요."
"젊은이도 하나 접어볼래요?"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한 장 더 꺼내며 건내주는 노인.
나는 종이를 받고 마찬가지로 땅을 받침삼아 비행기를 접었다.
이어서 다 접은 그가 살포시 날렸다. 신기하게도 종이비행기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거의 직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게다가 오르막길의 맨 윗부분에서 날려서인지 비행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엄청 재밌어보인다. 저렇게 예술적이게 날아가는 비행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할아버지의 흐뭇한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나는, 어린애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헛기침을 했다.
노인이 한 번 날려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내 비행기도 잘 날아갈까? 그런 기대를 품으며 살포시 날렸다.
하지만 비행시간은 1초도 채 못넘기고 곧바로 수직낙하를 해버렸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해보아도 비슷하게 코 앞에서 떨어졌다.
실망한 기색이 잔뜩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떨어진 종이를 바라보자 노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잘 날아가는 비행기는 접는 요령이 따로 있어요. 잘 봐요."
내 앞에 떨어진 종이를 줍더니 원상태로 펼치고 천천히 접기 시작한다.
나는 눈에 새기듯 유심히 쳐다봤다. 접는 과정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는 비행기를 접고나서 다시 원상태로 종이를 펼쳤다.
여러번 접혀진 종이라 그런지 많이 구겨져 있었다.
"한 번 해봐요."
종이를 건내받고 그가 접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접었다.
"이렇게 접는게 맞죠?"
"아주 잘했어요. 이제 한 번 날려보세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기대를 안고서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날아가는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처럼 바로 추락하는것도, 노인이 날린 것처럼 느릿하게 떨어지는 것도 아닌, 앞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미세하게 흔들려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종이비행기.
한 편으론 세간의 소식따윈 잠시 내버려두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는 듯한 모습이 왠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