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슬슬 가보도록 할게요. 좋은 걸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잘가요. 젊은이."
나는 노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두갈래 길에서 한 쪽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를 지나다보니 주택은 점점 사라지고, 끝내는 허름한 모래밭 놀이터 하나가 들어섰다.
시소와 그네, 회전기구의 페인트는 조각조각 벗겨져있으며 곳곳엔 오래된 껌 스티커가 해진 상태로 붙어있다.
모래밭엔 밟을 때마다 바스스 부서지는 말라 굳은 모래가 적잖아 있었고, 구석지에 색이 빠진 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작은 나무가 있다.
버려진 놀이터. 그것이 놀이터의 모습을 바라본 순간 떠오른 첫 인상이었다.
그네로 걸어가 그곳에 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음악을 들을 생각이었으나 꺼내는 순간 조작이 가능한 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화면은 켜진다. 옆 화면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플을 누르면 실행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수도 있는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도 그럴게, 만약에 된다고 한다면 그건 죽은 사람이 보낸 문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다.
1학년 때 조별과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녀석들을 발견했다.
저장된 이름도 실명이 아니라 '자료조사'라든가, '발표담당'같은 걸로 되어있다.
그야말로 나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표면적이고 고독했는지 알 수 있는 이름들이다.
우선은 '자료조사'에게 보낼 생각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녀석인지 생각도 안난다.
이제와서 안부 인사따윈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발신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뿐이니.
무작위로 타이핑을 한 뒤에 전송 버튼을 누르자, 터치가 작동되질 않았다.
다시 확인해봐도 문자는 확실하게 입력이 된다. 홈 화면 버튼이나 다른 버튼도 마찬가지로 입력은 정상적이다.
허나,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전송 버튼만은 눌러지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접촉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의미 뿐 만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서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조금 안심했다. 문자가 보내졌다면 나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음악을 듣기로 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이어폰을 꺼냈다.
The Song We Were Singing.
파울 맥카트니의 'Flaming Pie'의 첫번 째에 수록된 곡인 그것을 재생했다.
수아와 함께 놀이터에서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나서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같이 하교를 하던 도중, 지금처럼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발견했다.
나와 수아는 정글짐의 꼭대기 걸터앉아 서로에게 등을 기댔었다.
"한 문제만 더 맞추면 나도 100점이었는데. 아아 아쉬워라~"
그때 능청스럽게 탄식하는 수아는 꽤 귀여웠다.
"아직 기말고사가 남아있으니까 너무 상실하진 마."
"또 내가 2등이잖아."
"승부욕이 대단하구나."
"그게 아니야."
"그러면?"
"네가 1등이니까. 그래서 나도 1등이고 싶을 뿐이야."
수아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데엔 몇 초간의 정적이 필요했다.
"…응. 기말고사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그날 따라 유난히도 푸르렀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여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우리들의 머리카락이 살포시 휘날렸다.
"가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만약에 말이야.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아?"
"정말로 그런게 있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네. 아마 알고싶어하지 않을까?"
"…그래? 그럼……. 언젠가 때가 되면 알려줄게."
"지금은 안되는거야?"
"응. 지금은 안돼."
어째서 지금은 안되는 건지 궁금했지만,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꺼낼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때가 되면 꼭 들려줘."
"알겠어. 약속할게."
그 뒤로 우리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가는 그때.
"……미안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한 수아의 작은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확실하게 들었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은 채, 그저 높이 솟아오른 적란운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수아는 쓸쓸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던 걸까?
그림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동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늘은 황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 올려다 본 푸름엔 연노란색이 살짝 뒤섞여있었다.
왔던 방향을 되돌아가 집으로 향하는 길, 도로에 늘어선 상가에서 '사주팔자'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발견했다.
꽤 많이 낡아 모서리 부분에 때까지 껴있는 간판이었다.
아스팔트 계단을 오르자 컨테이너의 출입문 같은 현관의 철 문이 들어섰다.
대문 앞엔 시뻘건 글씨로 사주팔자 보는 곳이라고 쓰여있다.
사주보겠다고 들어갔다가 자신의 장기를 보게되는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대문에서부터 피어오른다.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금으로 된 불상 앞엔 중국식의 화려한 옷을 입은 밀랍인형들과 촛불이 있다.
벽의 사방팔방엔 사주와 연관있어 보이는 한자들과 함께 중국식의 전통 복장을 입고있는 무서운 인상의 대머리들 사진이 몇몇 걸려있다.
정면을 바라보기에 마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느낌은 섬뜩할 정도다.
그런 칙칙한 내부에,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작은 테이블 앞에 양반다리로 나란히 앉아있다.
"정말로 이런 곳을 찾아오는 녀석들도 있긴 있구나."
물론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도 호기심이라는 것이 공통점이겠지만, 다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겠지.
남녀의 앞엔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앉아있다.
뒤로 묶은 머리와 짙은 화장을 한 여자는 꽤 주름이 있어 적어도 40대 중후반은 되어보인다.
늙은 여자가 눈을 치켜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그들은 기선제압이라도 당하는건지 움츠러드는 기색이 전무하다.
"여자친구분. 요즘 어깨가 많이 뭉치는 느낌이 있지요?"
"아…네!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그야 뻔하지."
여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킨다.
무속인은 아주 태연하면서도 날카로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악령이 앉아있거든."
참고로 나는 테이블 옆에 앉아있지, 여자의 뒤에 있지 않는다.
하물며 여자 뒤쪽에 유령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저 사주본다는 짙은 화장의 무속인은 전혀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 완전히 구라다. 저 무속인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이고, 사주보러 온 녀석들은 그 말에 속아넘어가 벌벌 떨고있는 것이다.
"하아……."
너무나 한심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역시 이런건 죄다 사기였군.
저렇게 속아넘어가는 녀석들이 있기에 엑소시스트니 뭐니 하는 사기집단이 있는 것이겠지.
나는 그곳을 나와 다시 맨션을 향해 걸었다. 10분정도 지나자 필연적으로 지나쳐야하는 시내에 도착했다.
곧바로 집에 들어가봤자 할 것도 없기에, 이번에도 어제처럼 조금 말썽을 피울 생각이다.
이 곳에서 조금 더 걷다보면 들어서는 대형마트. 그 곳에 도착한 나는 자동문 버튼을 눌러 입구로 들어갔다.
그렇게 입구로 들어가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보통 유령은 벽을 통과하지 않나? 지금껏 나는 출입문을 드나들 때마다 손잡이를 돌린다든가 버튼을 누른다든가 하는 식으로 평범하게 행동했다.
시도해보지 않았을 뿐이지, 어쩌면 통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유리문을 향해 뒤돌아섰다. 그 다음, 멈추지 않겠다는 기세로 터벅터벅 힘을 주며 걸어갔다.
그 결과,
"아얏!!"
통과하기는 커녕 유리문에 몸과 얼굴을 세게 부딪쳐 눈물이 찔끔 샜다.
쭈그려 앉아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보니 출입문이 열린다.
쇼핑카트를 미는 어린 남자아이와 뒤의 부모가 내 몸을 수욱 통과한다.
"정말 기묘한 일이네……."
사람이 만지고 있는 물건은 만질 수 없다. 반대로 만지지 않고 있다면 만질 수 있다.
방금 버튼식 자동문에 사람의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문에 부딪쳐버렸다.
벽을 통과할 수 없는 유령이라니. 내가 알고있는 유령이랑 실제 유령은 조금 다른가보다.
그러나 이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고 있다면 나는 만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모순을 하나 발견한 것이다.
바로, 지면이다. 나는 지면을 밟고있다. 그러나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지면을 통과하고 땅으로 꺼져야하는게 정상일텐데……."
그렇지 않은 걸 고려해보면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리법칙이 작용하듯 유령에게도 유령만의 어떠한 법칙이 작용하고,
그건 나름대로의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는건가?
우선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더이상 고민해봤자 이보다 더 명확한 답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본격적으로 1층을 둘러보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중간에 스낵코너에서 멋대로 집어온 감자칩을 먹거나, 음료수 캔을 멋대로 개봉해 마시며.
식품에서부터 생필품. 더 나아가 전자제품과 운동기구들, 시계나 보석점까지.
역시 대형마트라 그런지 없는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코너가 있어, 나는 어느새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쇼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나친 속옷 코너를 바라본 그 순간이었다. 본래의 목적을 상기함과 동시에 엄청나게 재밌을 것 같은 아이디어가 퍼뜩 떠올랐다.
그건 너무나 민폐짓이겠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유쾌하기도 했다.
바로, 여자 속옷을 가져와 카트에 집어넣는 것이다.
우선 장난칠 대상이 중요하다. 아무리 그래도 애까지 대려온 가족들을 대상으로 이런 장난을 칠 생각은 전혀 없다.
가족외의 혼자 있는 사람들이나 커플 혹은 친구를 중점으로 두고서 층을 돌아다니며 탐색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식품코너. 그 곳에서 적당한 인물을 발견했다.
흰색 민소매와 밀리터리 디자인의 통큰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삭발까지 한 그 남자는 꽤 운동을 했는지 근육질이었고, 얼굴엔 커다란 흉터가 대각선으로 그어져있었다.
보기만해도 곁에 있기 싫을 정도로 혐오감이 샘솟는 인상이지만, 목에 걸려있는 때지난 금목걸이가 혐오감을 더해준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정말 섣부른 판단이고, 하면 안될 행위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의 판단에 자신감이 있다.
확실히 그의 겉모습에서 혐오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질이 안좋은 인간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따로 있다.
깡패같은 남자는 뭐가 그리 화가 나는건지 혼잣말로 "씨발"을 중얼거리거나, 신경질적이게 혀를 차기 바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면 오히려 쏘아보며 눈을 내리깔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 그에겐 벌이 필요하다. …라고 해봤자 내가 누군가를 심판할 만큼 잘난 녀석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게 못된 장난을 치고싶다. 저 사람이 아니면 안될 정도로 말이다.
곧바로 속옷코너로 돌아와 여성 속옷 몇 개인가를 집었다. 음란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여자 속옷은 처음 만져봐서 조금 낯선 기분이 든다.
브래지어와 팬티. 그것들을 손에 쥔 상태로 걷는다.
물론 아무도 날 보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쑥스럽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카트에 넣을 생각이었으나,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게 더 재밌을 것 같아 계획을 바꾸었다.
마침내 그가 계산대에서 물건들을 올려놓으며 물건에서 손을 떼는 그 순간.
잽싸게 그것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대신 들고있던 여성 속옷을 올려놓았다.
그것도 평범한 속옷이 아닌 호피무늬라든가 승부 속옷같은 야한 것들을 엄선해서 골라온 것이다.
벌써부터 웃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곧이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쁘장한 여점원이 계산대를 쳐다보고 흠칫한다.
남자 또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다가 속옷을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점원이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남자를 쏘아보고, 남자 뒤에 계산을 기다리는 여대생같은 손님들도 기겁하더니 몸을 움츠린다.
"손님! 지금 뭐하시는건가요?"
"아 저 그게 아니라…. 에이 씨발…. 씨발…."
남자는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가더니 매장 출입구로 걸어갔다.
나는 배를잡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깔깔 웃어댔다. 아, 너무나 통쾌하다.
성공적인 악질적인 장난과 안전한 신변.
거기에 더해 상대방이 질나쁜 인간일수록 즐거움은 배가 된다.
윤리의식에 꽉꽉 묶여있는 고지식한 인간이라면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겠지.
샤덴프로이데를 한없이 느끼는 나를 근거한다면, 인간의 성악설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나의 악질적인 장난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 고통받는건 너무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