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저희 시내에 나갔다올게요."
소녀가 누나의 방 문을 똑똑 두들기며 말하자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잠시 후, 방 문을 열렸다.
틈새로 얼떨결에 보게 된 그녀의 방은 책이 가득 찬 책장과 더불어 책상에도 읽던 책이 뒤집혀있었다.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듯 하다.
방에서 누나가 나에게 작은 종이를 건내주었다.
펼쳐보니 대파와 양파같은 기본적인 식재료들 몇 개와 특정 브랜드의 음료수라든가 아이스크림, 스낵같은 디저트들이 적혀있었다.
종이에서 누나에게 시선을 옮기자 눈을 마주친 그녀가 생긋 웃었다.
"심부름인가요?"
"부탁할게."
오히려 이 집에 묵게 된 이상 이런 것들은 솔선수범해서 해야한다.
다시 훑어보니 식재료들보단 디저트쪽이 종이를 더 차지하고 있었다.
"많이 가져와야한다?"
"알겠어요."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 손잡이를 잡던 소녀가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
아직은 인사를 주고받는게 어색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잠깐."
현관을 나와 내리막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하자 집 앞에서 소녀가 멈춰세웠다.
"10분 만 있다 가자."
그렇게 말하며 향한 곳은 바로 근처인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마당이었다.
마루에 앉은 소녀는 걸치고있던 져지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구겨진 흔적이 많이 보이는게 꽤 눈에 익은 종이비행기였다.
곳곳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게 힘을 주어 빳빳하게 편 다음, 다쳐버린 작은 새를 어루만지듯 양 손으로 살포시 종이비행기를 들어올린다.
그 다음, 소녀는 종이비행기를 가까이 가져가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살포시 휘날리자 꽤 안정적인 느낌으로 깔끔하게 날아가는 종이비행기.
"잘 봐."
소녀가 검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를 가리켰다.
검지를 따라 시선을 향하는 그때, 말도 안되는 일이 눈 앞에 벌어졌다.
하늘을 날던 종이비행기가 소녀의 손짓대로 방향을 틀며 움직이는 것이다.
"와아……."
굉장히 신기한 광경에 짧은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반응에 소녀도 기분이 좋은지 곡예를 부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오른쪽 왼쪽으로 틀던 비행기가 이번엔 올라갔다가 내려간다든가 롤러코스터처럼 원을 그린다든가.
끝에는 스마트폰으로 보던 에어쇼와 같이 한바퀴 회전을 하기도 했다.
유령이 되면 이런 재주도 부릴 수 있는걸까? 문은 통과하지 못하는 주제에.
아이러니하다.
"되게 신기하다. 그런데 저거 혹시 어제 주운거 아니야?"
"어? 그걸 네가 어떻게……."
지휘자 마냥 부드럽게 검지를 움직이던 소녀가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날 돌아본다.
순간의 지휘 미스로 혼란에 빠진 종이비행기는 방향을 잃더니 빙글빙글 돌며 바로 내 발 밑으로 떨어졌다.
"이거 내가 날린 비행기거든."
날 멀뚱히 쳐다보는 소녀에게 나는 비행기를 주우며 대답했다.
"어제 이른 오후쯤. 맞지?"
"맞아……. 언니랑 마트에 가던 길에 하늘에 날아다니는 걸 발견했거든. 내 발밑에 떨어졌어."
그 말에 나 또한 반사적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말도 안돼. 서로의 의견이 일치한 듯 우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마주보았다.
아직 소녀와 만나기 전, 나는 하늘을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렸고 그리고 그건 소녀에게 떨어졌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그야 뒤늦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 '그건 운명이었다'라는 한마디만 덧붙이면 모든 것이 성사될테니까.
그래서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든가 더 나아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책임함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겠지.
나 또한 비슷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저 허울좋은 소리라고 치부해왔다.
하지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일어난다면 아무래도 운명이라는 그 무책임한 두 글자가 불현듯 스칠 법하다.
그때 미미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 둘 사이를 스치며 머리카락을 휘날린다.
그저 말없이 서로를 향한 따스한 웃음에 서로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집어든 종이비행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어떤 노인을 만났어. 수레를 끌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지."
그 뒤로 어제 언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새삼스럽게 수레를 밀어드렸던 것과 그 노인은 우리처럼 유령은 아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런 사람들에겐 어느정도 간섭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덕분에 그 노인은 동네에서 괴짜로 취급받는다는 것등.
"이 종이비행기를 접는 방법은 그 할아버지에게 배웠어."
"그렇구나."
언덕 위에서 종이 비행기를 날리지 않았더라면 소녀와 만날 수 없었겠지.
라는 소리는 어쩌면 억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딱히 종이비행기를 날린 행동만이 미래를 바꾸는 건 아니니까.
다만, 그럼에도 나는 종이비행기를 날렸던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여기고 싶다.
"이 종이비행기가 아니었다면 우린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네."
예상치 못한 소녀의 한마디가 들려온 건, 제멋대로 착각에 빠지려 하던 그때였다.
그렇지?라고, 작은 미소와 함께 소리없이 물어오는 소녀.
소녀 또한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기뻤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 내심 기뻤다.
"그렇네."
그래서 내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있던 건 어쩔 수 없었나보다.
나는 종이비행기의 꼬리를 잡고서 살포시 휘날렸다.
내 손을 떠난 종이비행기는 어제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며 잘 날아간다.
확실히 잘 날아가지만……. 그저 평범한 수준에서 잘 날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소녀가 했던 것처럼 검지로 가리켜보아도 비행기는 말을 듣지 않았다.
부메랑처럼 한바퀴 돌아오며 느긋하게 내려가는 종이비행기가 잔디에 살포시 착륙했다.
"이상하네. 어제 날릴 땐 그래도 쭈욱 날아갔었는데."
우리 발 밑 사이에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주운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날리면 안돼. 주문이 필요하거든."
"주문?"
"응. 정확히는 바램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거든."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제 날릴 땐 딱히 주문이 없어도 잘 날아갔지만, 방금은 그저 평범하게 잘 날아가는 비행기였다.
차이가 있다면 어제는 노인이 날린 것처럼 잘 날아갔으면 좋겠다고 바랬던 것이고, 방금같은 경우엔 되겠지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느긋하게 날렸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납득했다는 듯 중얼거리자 소녀는 보란듯이 종이비행기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 다음,
〃날아라,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에 대고 포근한 속삭임으로 주문을 말했다.
옆에서 바라본 그 모습은 한 없이 아름다워 흡사 숲 속의 요정이 꽃 한 송이에게 인사를 건내는 것만 같았다.
살포시 날려 소녀의 손끝을 벗어나 낮게 날아오르는 종이비행기.
검지가 움직이는대로 저공비행을 하며 완만하게 돌더니 곧이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종이비행기를 따라 올려다본 파아란 하늘은 거대한 적란운이 선명하게 장식되어 아득해보인다.
여름이라는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하늘의 모습이다.
딱히 여름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풍경을 볼 순 있겠지. 다만, 그런 것들은 겉보기엔 비슷해보여도 계절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질 않는다.
선명한 구름의 모습에 원근감이 느껴져 다가오는 아득함과 파란 색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은 분명 여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사계절 중에서 특히나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름이 선물하는 최고의 걸작임이라는 것은 앞으로도 내 안에선 변하지 않겠지.
그렇게 빙글빙글 도는 종이비행기를 느긋하게 감상하던 그때였다.
초등학교 졸업식 전 날, 어떤 여자애와 함께 창가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편린이었다.
'종이비행기를 접자.'
'종이비행기?'
'응. 게다가 그냥 접는게 아니야. 소원을 적어서 접는거야.'
'그럼 소원이 이루어지는거야?'
'이루어질거야.'
그 여자애는 환한 미소로 그렇게 말했었다.
A4용지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서로의 소원을 적었다.
어떤 소원을 적었는지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분명 우리의 소원은 비슷한 것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소원이 적힌 종이를 비행기로 접고나서 우리는 창가로 향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날리는거야. 알겠지?'
'응. 알겠어.'
'그럼 간다. 하나. 둘. 셋!'
그 아이의 신호에 맞춰 동시에 날렸지만 비행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교실 안으로 떨어졌다.
'잘못 접은건가….'
'그럴 리가. 저번에 이렇게 접었는데 엄청 잘 날아갔거든.'
'그럼 주문이 필요했나?'
'주문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의 우스갯소리에 그 여자애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이때부터 기억이 점점 끊기거나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눈으로 종이비행기를 쫓으며 필사적으로 그 다음 장면을 떠올리려했다.
다시 창가로 다가간 여자애는 다시 신호를 세었다.
그 다음, 여자애는 '셋'이라는 신호가 끝난 뒤 비행기를 날리며 작게 주문을 외쳤다.
"……."
그게 어떤 주문이었는지 가까스로 떠올린 나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상대방 또한 날 바라보고 있어 눈을 마주쳤다.
"너도 해볼래?"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속에서 잔디의 싱긋한 풀내음과 함께 실려온 건 소녀의 온화한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미소를 지은 그 모습에 잠깐동안 넋이 나간 나는, 한 번의 쉼표를 새기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해볼래."
소녀가 왼손을 뻗어와 나의 오른손을 잡았다.
검지만은 맞붙인 채, 부드러움 속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꼈다.
서로에게 흐름을 맡기듯 종이비행기를 가리킨 맞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의 손짓대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 모습이 동심을 불러일으켰던 탓일까?
그만 종이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그런 어린애다운 생각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