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휘이이잉!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강렬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어지러이 휘몰아치는 바람은 깊게 뿌리 내린 거목조차도 크게 흔들릴 정도로 강렬하며 포악했다.
스윽.
그런데 폭풍이 휘몰아치는 단애의 끝에 놀랍게도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이리저리 펄럭이는 옷으로 보건데 엄청난 바람을 맞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신기하게 인영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마치 하나의 석상처럼, 혹은 바위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인영이 심유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 천하(天下)가 담겼다.
“……12년 만인가.”
어리지도, 그렇다고 나이가 많지도 않아 보이는 인영의 눈동자에 아련한 기색이 떠올렸다.
무엇을 떠올리는 것인지 한참이나 말없이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더 이상 아련한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스스로 직접 보고, 느낀 후에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남자가 이내 천장단애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바닥으로 떨어져야 할 남자의 신형이 놀랍게도 거의 수평을 이루며 날아가듯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마치 새가 활강을 하듯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사내의 신형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第一章 귀향(歸鄕).
강소성 무석현에 도착한 강진혁은 주변을 크게 살펴봤다.
무려 12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으나 달라진 것은 크게 없는 것 같았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훌쩍 자란 신체 때문에 달라진 눈높이 정도랄까.
12년 전에 있었던 건물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만 그 안의 사람들만 바뀐 듯 했다.
강진혁은 먼지가 가득한 황의장삼을 손바닥으로 살살 털어내며 저잣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저잣거리는 한산했다.
강소성 최고의 도시인 소주를 인근에 두고 있는 마을치고는 말이다.
저벅저벅.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냄새를 만끽하며 저잣거리를 걷던 강진혁의 눈동자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선학객잔(仙鶴客棧)이야말로 그의 어린 시절을 모두 담고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그는 친구들과 항상 저 선학객잔의 뒤뜰에서 모여 놀곤 했다.
배가 고프면 숙수가 버린 음식 찌꺼기들을 먹으면서 말이다.
강진혁은 그때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왜 자신이 이곳에 왔는지를 깨달았다.
“잘들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군.”
친구들이 보고 싶어 고향에 되돌아오기는 했으나, 사실 강진혁은 조금 막막했다.
흘러간 세월이 무려 12년이었기 때문이다.
강산이 변해도 한참은 변했을 시간이다.
그렇기에 강진혁은 친구들이 모두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무석현의 남동쪽에는 중원 최고의 향락 도시로 꼽히는 소주가 있지 않은가.
그곳으로 상경했을 수도 있기에 강진혁은 내심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긴 변한 게 없네.”
12년 만에 돌아왔음에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저잣거리를 벗어나 마을 외곽에 위치한 빈민촌에 들어선 강진혁은 코를 살짝 찡그렸다.
들어서기 무섭게 코로 파고드는 쾌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몸에서 나는 악취와 분뇨 냄새, 거기에 여인들의 싸구려 방향 냄새가 뒤섞인 오묘한 악취는 강진혁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진혁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스윽.
제법 멀쩡한 의복을 입고 있는 강진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다 허물어가는 움막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던 거지꼴의 아이들이 경계 서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강진혁은 그런 아이들의 시선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왜 저런 시선을 보내는지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아주 오래전 자신과 친구들이 머물렀던 움막 앞에 도착한 강진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찾았던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에 작은 안도감이 들었다.
친구들이 이곳에 없다는 것은 밑바닥 인생을 청산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사부를 따라가기 전에 머물렀던 집을 확인했기에 강진혁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비릿한 악취가 여전히 그의 코를 찔렀지만 강진혁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포근함을 느꼈다.
“자, 이제 하나씩 찾아볼까.”
좀 전보다 확연히 밝아진 음성으로 강진혁은 움직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서.
너무나 오랜 시간 헤어져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는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강렬한 느낌을.
그래서 막막하긴 해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고향을 떠날 이유는 없으니까.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은 말이지.’
강진혁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사부를.
하지만 이내 그는 회상을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별했을 때의 슬픔이 아닌, 재회의 반가움이었으니까.
다시 시전으로 돌아온 강진혁은 눈을 크게 뜨고서 사방을 훑었다.
혹시라도 있을 친구들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어어?”
“훗.”
한참 동안 시전을 돌아다니던 강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한 포목점(布木店)에서 옷을 사러 나온 여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본 후에 떠오른 미소였다.
비단을 팔기 위해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여인들에게 입을 놀리던 남자 역시 강진혁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작스런 그의 변화에 웃으며 경청하고 있던 여인들도 고개를 돌려 강진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여인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그녀들이 시선을 주기에는 강진혁의 외모가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다.
키가 제법 크고 몸이 탄탄하다는 느낌을 풍기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묘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여인들은 강진혁을 한 차례 훑어 본 후에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때에는 좀 더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입지요. 제가 언제 거짓말 한 적 있나요?”
“호호호! 없지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그럼 나중에 올게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포목점주의 모습에 여인들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이내 발걸음을 돌려 포목점을 벗어났고, 그제야 포목점주가 웃는 얼굴을 돌려 강진혁을 바라봤다.
“진짜 너냐?”
“보면 모르겠냐?”
“정말 미친개냐?”
빠직.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강진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정말 찰나에 변하는 강진혁의 표정에 남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진짜 진혁이구나! 이게 얼마만이냐!”
“정확히 12년 만이지. 그보다 좀 떨어지지 그래? 난 남자는 관심 없어.”
“짜식. 여전히 까칠하구만. 반가움에 이 형이 포옹까지 해주는데 이따구로 말하다니.”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냄새는 냄새야.”
강진혁은 피식 웃으며 친구의 몸을 밀어냈다.
반가운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 둘이 포옹하고 있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저잣거리의 한복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곧바로 친구를 떼어 놓았다.
“마, 이 더위에 일 하다 보면 땀 냄새가 날 수도 있는 거지. 그보다…… 완전히 돌아온 거냐?”
연신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강진혁에게 물었다.
그에 강진혁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정착할 마음은 없나 보구만.”
“사부님의 유언이 있어서 말이야. 그것을 다 끝내기 전에는 못해.”
“꽤 심각한 일인가 보다?”
그가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12년 전 강진혁이 어떤 이를 따라갔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대충 어떤 일인지는 예상이 갔다.
무인을 따라갔으니 당연히 무림(武林)과 관계된 일이 자명할 터였다. 그리고 무림과 연관된 일은 모두 생사와 관련된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퍽!
그런 친구의 시선에 강진혁이 등짝을 가볍게 내려쳤다. 그런데 울리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 살짝 내리친 것 같았는데 고통이 의외로 강렬했던 것이다.
“컥!”
“너한테 걱정 받을 정도로 나 약하지 않다. 그리고 조금 어려운 일이지 위험한 일은 아니다. 단지 개수가 좀 돼서 그런 거지. 그 일만 잘 끝내면 고향에 정착할 생각이야. 지금은 하산한 김에 잠깐 들른 거고.”
“하산? 그럼 이제 다 배운 거냐?”
“다는 아니지만, 경지에 오르긴 했지.”
마치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말하는 강진혁을 보며 그가 상당히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무림이라는 세계는 뭇 남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사뭇 부러운 표정으로 강진혁을 바라봤다.
“저기, 나한테도 가르쳐 줄 수 있냐?”
“늦었어.”
“너무 딱 잘라 말하는 거 아니냐.”
“어쭙잖은 기대를 하게 하느니, 차라리 현실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게 낫지.”
강진혁은 일고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에 남자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노기가 서렸다. 하지만 강진혁의 의지는 확고했다.
“치사한 녀석.”
“오견(汚犬)이라 불린 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끄응!”
반가움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강진혁을 째려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진혁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강진혁의 물음에 남자가 오히려 반문했다.
그런데 되묻는 그의 눈빛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 눈빛에서 강진혁은 최소한 한 가지만은 느낄 수 있었다.
“잘들 살고 있나 보네.”
“그래. 나름 제 몫을 하며 살고 있지. 나처럼 말이야.”
“아빠!”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한 남자가 포목점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헤픈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앙증맞은 여아 한 명이 총총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이구, 우리 딸. 밥은 다 먹었어요?”
“네, 아빠! 아빠도 식사하세요!”
“하하! 그래야지!”
강진혁은 멍한 표정으로 친구인 장구식을 바라봤다.
어엿한 포목점도 하고 있어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이만한 딸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더구나 딸을 낳기 위해선 여자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는 말은 장구식이 혼인을 했다는 소리.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강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근데 저 아저씨는 누구에요?”
“응. 아빠 친구야.”
“아빠 친구?”
여전히 딸을 품에 안고 서 있던 장구식이 옆에서 말없이 서 있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묻는 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보아온 아빠 친구 중에 강진혁은 없었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있다가 이제 와서 소향이는 잘 모를 거야.”
“아, 내려주세요.”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아가 발을 흔들며 말하자 장구식이 딸을 땅에 내려주었다.
그러자 여아가 강진혁의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두 손을 모으고 귀엽게 인사하는 여아의 모습에 강진혁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