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귀향(歸鄕).
드르륵.
우 총관이라 불린 여인이 조신한 걸음걸이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윽고 매화실이라 적힌 방 앞에 도착한 강진혁과 장구식은 우 총관이 열어주는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을 풍기는 방 안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주루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우리들이 항상 먹던 걸로 차려주시구려.”
“알겠습니다.”
장구식은 한두 번 온 것이 아닌지 익숙하게 주문을 했고, 우 총관 역시 자연스럽게 주문을 받으며 뒷걸음질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과도하게 예를 차리는 모습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상하게 보기에는 좋았다.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강진혁은 여전히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만한 주루에서 술을 제대로 마시면 청구될 금액이 장난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비싸긴 해도 못 낼 정도는 아니니까. 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돈 벌어서 제대로 쏘던가.”
“지금이라도 난 쏠 수 있다.”
“호오. 돈 좀 있나 보다?”
“없진 않지.”
강진혁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돈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따로 일을 하진 않았으나 수련하면서 캐낸 약초를 판 돈으로 강진혁은 수중에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사부와 함께 있던 곳이 나름 영산이라 불리던 곳이었기에 제법 귀한 약초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것들을 판 돈으로 강진혁은 사부를 모셨고, 그 외 자잘한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게다가 하산하기 전에 상당히 비싼 약초를 캐서 팔았기에 지금 그의 전낭에는 상당한 액수가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한테 빈대 붙으려고 했단 말이냐!”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사달라고 한 적 없다. 네가 날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지.”
“어유, 진짜 말은 청산유수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조목조목 따져가며 대꾸하는 강진혁을 보며 장구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는 사이 방 안으로 음식들이 대령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올려지는 음식들을 보며 강진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침이 절로 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매화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운루 앞에서 우연찮게 만났는지 양칠과 하굉이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열고 들어왔던 것이다.
덜컥!
“이 녀석!”
“……!”
마른 체격의 장구식, 노상덕과는 다르게 거구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강진혁을 노려보듯 쏘아봤다.
그리고는 이내 뜨거운 눈빛을 보내왔다.
특히 철견(鐵犬)이라 불리며 엄청난 맷집을 자랑했던 양칠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강진혁의 두 손을 잡았다.
“잘 왔다! 잘 왔어!”
“…다행이다.”
반가움을 넘어 감격한 표정으로 강진혁의 손을 잡은 양칠은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반대로 하굉은 짧은 말 한 마디만 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굉의 마음은 절절하게 느껴졌다.
“자자, 왔으면 일단 앉아. 술부터 받아야지!”
스윽!
갑자기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장구식이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을 앉혔다.
그리고는 술병을 들어 강진혁에게 내밀었다.
“첫 술은 주인공이 따라 줘야지. 안 그래?”
“그런가.”
12년 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제 헤어졌다가 만난 것 같은 편안함에 강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양칠에게 먼저 술을 따라주었다.
“장사 잘 되는 것 같더라. 축하한다.”
“하하.”
노상덕과 헤어진 후 강진혁은 장구식을 따라 양칠이 숙수로 일한다는 객점에 찾아갔었다.
점심도 해결할 셈으로. 하나 그는 아쉽게도 양칠을 만날 수 없었다.
워낙에 손님들이 많아 보조 숙수로 있는 양칠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점심만 해결하고서 점소이에게 말만 전해 달라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기쁘기만 했다.
이 정도로 큰 객점에서 양칠이 인정을 받으며 일한다는 사실이 기꺼웠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아니 함께 했던 대부분의 시간들을 오로지 싸움으로만 지새웠던 그들이었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싸움만 줄기차게 하던 이들이 번듯한 직업을 가지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따로 배울 만 한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강진혁은 내심 많이 걱정했었다.
혹시나 아직까지도 뒷골목 잡배로 허송세월이나 보내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또르륵.
겸연쩍게 웃는 양칠의 술잔 위로 술을 따라준 후 강진혁은 그의 옆에 앉은 하굉을 바라봤다.
여전히 말수가 적은 친구의 모습을 보며 강진혁이 빙긋 웃었다.
“몸이 더 좋아졌네. 특히 팔뚝이.”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까.”
야장 기술을 배워서 그런지 하굉의 팔뚝 두께는 장난이 아니었다.
여인들의 허벅지보다도 두꺼워 보이는 팔뚝을 보며 강진혁이 말하자 하굉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 술잔이 채워졌으니 시원스럽게 들이켜야지? 상덕이는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니 일단 우리부터 마셔보자고!”
“그거 좋지!”
“역시 네놈은 술을 마다하지 않는구만!”
“흐흐흐!”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죽이 잘 맞는 장구식과 양칠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던 강진혁도 가득 채워져 있는 술잔을 들어 올렸고, 뒤이어 하굉도 술잔을 들었다.
“잠깐!”
“응?”
네 사람의 술잔이 모두 머리 높이까지 들어 올려 졌을 때, 방문이 열리며 노상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백의가 아닌 평범한 갈의장삼을 입은 그는 뛰어온 모양인지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다행히 안 늦었군!”
“너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왔다.”
술잔을 든 채로 굳어 있듯 가만히 있던 네 사람 중 장구식이 묻자 노상덕이 히죽 웃으며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빈 술잔을 강진혁에게 내밀었다.
“훗.”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달라는 노상덕의 행동에 강진혁은 아무 것도 잡지 않고 있는 좌수로 술병을 들어 그에게 따라주었다.
이윽고 다섯 개의 술잔이 허공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에 돌아온 강진혁을 위하여!”
“위하여!”
장구식의 선창에 세 사람이 복창하며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오늘 이 술자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강진혁도 시원스럽게 술을 들이켰다.
“크흐!”
“좋구만!”
“끝 맛이 단 게 오늘은 쭉쭉 들어가겠는 걸?”
한 잔의 술로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듯 하굉과 장구식, 양칠이 입맛을 다시듯 쩝쩝거렸다.
또한 오랜만에 술을 마신 노상덕 역시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술은 많이 남아 있다.”
강진혁은 아쉬워하는 친구들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다들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제법 독한 축에 들어가는 죽엽청을 연거푸 마시니 취기가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진혁도 지금 만큼은 내기를 사용하지 않고 술을 마셨기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장소를 잘못 고른 거 아니냐? 진혁이를 위해서였으면 주루가 아닌 기루로 갔어야 하는 거 아냐? 우리야 마누라가 있다지만 진혁이는 아니잖아?”
“짜식. 네가 가고 싶어서 그러지?”
“헉! 어떻게 알았지?”
“네 눈만 봐도 난 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장구식의 호언장담에 양칠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노상덕과 하굉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강진혁은 그저 피식 거리기만 했고.
“그나저나 이 녀석은 무조건 도둑놈이 되겠는데. 그것도 그냥 도둑이 아닌 상도둑놈.”
“왜?”
양칠과 시시덕거리던 장구식이 가만히 앉아서 안주를 집어 먹는 강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강진혁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장구식에게 쏠렸다.
“생각해 봐. 이 녀석 나이가 올해로 스물여덟 살 아니냐. 그렇다면 거의 열 살 이하인 여자를 만나지 않겠냐?”
“무림세가의 여식들은 스무 살 넘어서도 시집 잘 간다던데?”
“그거야 그쪽 세계 얘기고. 얘가 무림세가랑 가당키나 하냐. 그냥 일 끝나고 돌아오면 여기 처자 만나서 장가가야지.”
“그런가.”
생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양칠이 장구식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굉은 다른 부분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괜찮은 처녀 한 명 찾아놔야 하는 건가?”
“바로 그렇지.”
장구식이 하굉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가 노렸고, 원했던 것이 바로 그 말이었다.
박수까지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구식의 모습에 노상덕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강진혁의 짝으로 괜찮은 여인이 누가 있나 고심하는 듯했다.
“어디 보자.”
“잠깐만. 왜 이야기가 그리로 가냐?”
“그야 당연히 노총각인 너를 구제해주기 위해서이지.”
“난 구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만.”
강진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구식을 바라봤다.
하지만 넘치는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장구식은 강진혁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생전 처음 듣는 이름들을 나열하며 혼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 성격이 까칠하니까 최대한 순하고 착한 여자를 찾아야 해.”
“어릴 적에 가슴 큰 누나만 보면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가슴도 커야 해.”
“얼굴도 보통 이상은 되어야 할 걸.”
장구식이 말문을 트기 무섭게 양칠과 노상덕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에 강진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배려하지 않는 친구들의 행태에 기가 찼던 것이다.
“일단 세 명으로 압축이 되는군.”
“혹시 그 세 명?”
“그 정도는 되어야 저 녀석의 눈이 차지 않겠냐?”
“흐음.”
양칠과 생각이 겹치는지 장구식이 그리 말하며 눈을 빛냈다. 그러자 노상덕이 자신에게도 말해보라는 듯이 두 사람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 모습에 강진혁은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더 이상 말해봤자 저 세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부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다고 했지?”
“응. 유언과도 같은 부탁이라 꼭 들어드려야 해.”
“오래 걸리는 일이야?”
“글쎄다. 딱 잘라 이 정도 걸리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세 명이 강진혁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열띤 토의를 벌이고 있을 때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며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하굉이 입을 열었다.
“힘든 일이냐?”
“힘들다기보다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다고나 할까. 좀 그런 일이야.”
아무리 친구라지만 꼭 모든 것을 다 말해줄 필요는 없었기에 강진혁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설사 말해준다고 해도 하굉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왜냐하면 하굉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하굉도 알고 있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언제쯤에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런 셈이지.”
“그래도 돌아올 거지?”
“물론. 내 고향은 이곳이니까.”
강진혁의 대답에 하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됐다.
어디에 있든, 어디를 가든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하굉은 생각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어?”
“우 총관을 바라보던 너의 눈빛을 제수씨에게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덤으로 여기 단골이라는 사실도 말이지.”
“헉!”
강진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구식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하굉은 피식 웃었고, 노상덕과 양칠은 꼴좋다는 표정으로 박장대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그래도 무섭긴 한가봐?”
“제수씨가 한 성격 하거든. 아, 진혁이 너도 알 텐데? 다리 밑 홍나찰.”
“어? 제수씨가 그 애였어?”
노상덕의 말에 강진혁이 깜짝 놀랐다.
다리 밑의 홍나찰이라고 하면 그도 아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무석오견이라는 이름이 무석현의 골목을 시끄럽게 하고 다닐 때, 홍나찰을 위시로 한 여자들 패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패거리의 악명은 결코 무석오견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홍나찰의 수장이 장구식의 아내라고 하자 강진혁은 진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마,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 꺼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이인데 말해주면 어때. 그리고 나중에 지금처럼 놀라는 것보단, 미리 놀라는 게 낫지 않아?”
“끄으응!”
노상덕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진심으로 깜짝 놀란 강진혁의 표정을 보면 차라리 지금 알리는 게 더 나았다.
대면한 상태에서 놀라면 그의 아내 역시 민망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눈치 빠른 그녀라면 강진혁을 소개하기 무섭게 그가 광견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참에 아예 알려주는 게 더 나았다.
“호오. 천하의 그 홍나찰을 꼬셨단 말이지.”
“내가 안 꼬셨어! 물린 거지!”
“역시.”
“거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
강진혁의 말에 저도 모르게 그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비밀을 토설한 장구식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됐다.
동시에 노상덕과 양칠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반대로 장구식은 아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 모습에 강진혁을 비롯한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술맛이 더욱 맛있어졌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주 그냥 술술 넘어가네.”
“크크큭!”
장구식이 고개를 떨구거나 말거나 친구들은 흥겹게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명백한 놀림이었다.
하지만 장구식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과거에 떵떵거리듯 했던 거짓말 때문에 차마 친구들의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자리의 흥취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