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四章 보은(報恩).
꾸깃꾸깃하게 구겨진 종이에 쓰인 목록들을 확인하며 강진혁은 시전을 돌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의외로 강진혁은 실수하지 않고 시전상인들이 건네주는 물건들을 받았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왔기에 지게를 빌려야 했지만, 이 정도 일은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지 못했다.
“은근히 고약한데.”
“응? 누구 말인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만 가져가면 됩니까?”
“일단 오늘 몫은 이것뿐이네. 그리고 이것은 덤이야.”
푸줏간의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기를 한 움큼 더 쥐어주었다.
그에 강진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그냥 주는 것이니 가져가기만 하게. 허허허.”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앞으로 악가를 위해 많이 힘써주시게.”
주인이 웃으며 강진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그의 삶이 올올이 담긴 굳은살이 느껴졌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닐 터인데도 그는 악가를 생각했다.
그러한 모습에서 강진혁은 악가의 신망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강진혁이 받아야 할 물건은 푸줏간이 끝이었다.
그렇기에 강진혁은 살짝 들뜬 기색으로 인사를 하고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유월의 따사로운 햇볕이 그의 머리를 내리쬐었다.
“슬슬 더워지겠는 걸.”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 본 강진혁은 걸음을 옮겼다.
목록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다 받아냈으니 이제는 복귀만 하면 되었다.
지게에 한 가득 쌓여 있는 짐들을 보고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왔으나 강진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피만 클 뿐 실질적으로 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무겁다 하더라도 강진혁에게는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내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은근히 하체 단련도 되고 좋았다.
‘다만 문제는 이미 극한까지 단련이 된 상태라 크게 나아지진 않는다는 거지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탄력에 강진혁은 사부와 함께 했던 지옥수련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렸던 그 훈련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악물려지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진짜 죽거나, 아님 강해지거나의 극단적인 훈련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훈련이 있었기에 강진혁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사부가 남겨준 내력을 어서 빨리 합일화 시켜야 하는데.’
현재 강진혁의 내부에는 두 개의 커다란 기운이 있었다.
하나는 강진혁 스스로 수련해서 쌓아온 공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사부가 죽으면서 물려준 기운이었다.
물론 강함의 기준에 공력이 절대적이지는 않겠으나 만약 사부가 남겨준 공력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강진혁은 지금보다 족히 두 배 가까이 강해질 것이 자명했다.
다만 문제는 강진혁이 그럴 마음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저기,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오.”
스윽.
묵묵히 지게를 지고 걸음을 옮기던 강진혁에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만 살짝 돌렸다.
그러자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황의무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형장에게도 나쁜 얘기는 아니니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게 먼저 인 것 같은데.”
“흐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본인은 태안예가의 비조당(飛鳥堂) 소속인 목상걸입니다. 이쪽은 비상대(飛上隊) 소속의 고 무사님이시고.”
“강진혁이다.”
“알고 있습니다. 강 형의 이름 정도는.”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입을 여는 목상걸을 보며 강진혁은 눈을 좁혔다.
방금 전 그의 말에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강진혁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몇 가지가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강진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상걸은 조금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웃음을 머금고서 그를 바라봤다.
그런 모습에서 강진혁은 알 수 있었다.
목상걸이 사람 대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능숙하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본가에서 강 형께 한 가지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들어보지.”
강진혁의 하대에 옆에 있던 무사가 기분이 언짢은지 얼굴을 대놓고 찡그렸다.
하지만 목상걸의 제지 때문인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그에 강진혁 역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고작 저 정도 무사에 기가 죽을 그가 아니었다.
일순 두 사람의 눈싸움으로 인해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흠흠!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고 무사님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강 형께서도 제 말을 들어 주시구요.”
두 사람을 중재하는 듯했지만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더 이상 중재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강진혁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큼!”
“알았다.”
목상걸의 중재에 두 사람은 일단 상대방에 향해 있던 눈빛을 거뒀다. 그리고 목상걸은 그제야 강진혁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간단합니다. 태안예가로 오십시오. 지금 받고 있는 월봉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호오.”
태안예가의 사람이 나타날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람 빼가기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
태안예가는 분명히 산동악가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도 몰락의 수준이 아닌 완벽한 멸문의 수준으로.
“강 형도 알고 계실 겁니다. 현재 산동악가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산동악가는 더 이상 산동악가라 불릴 만 한 가치가 없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 나와 튼튼한 거선으로 옮기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본가는 강 형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목상걸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겐 사람을 끌어당기는, 혹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음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듣고 있는 강진혁마저도 살짝이지만 마음이 동했으니까.
하지만 강진혁이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거절한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산동악가는 이제 저물어 가는 해입니다. 반면 태안예가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산동이라는 이름 예가에게 갈 것입니다. 태안예가가 아닌, 산동예가가 되는 것이지요. 이 차이를 모르시는 않으시겠죠?”
“너무 앞서가는 거 같은데. 아직 산동이라는 이름은 악가에게 있다. 시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지.”
강진혁의 말에 목상걸은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강진혁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재 태안예가가 무섭게 치고 올라간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태안예가를 산동예가라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신망 역시 태안예가보다는 산동악가가 더욱 컸다.
그렇기에 목상걸은 침을 삼킬 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바뀔 겁니다. 그만한 능력과 역량이 본가에는 있으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내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당근이 실패했으니 이제는 채찍을 사용할 생각인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목상걸을 보며 강진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목상걸이 긍정하듯 싱긋 웃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렇게 험악한 자를 굳이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말하기가 한결 편하겠군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죠. 오실 겁니까, 안 오실 겁니까?”
“안 간다.”
강진혁은 다시 한 번 딱 잘라 말했다.
더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그러자 목상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고 무사라 불렸던 강진혁 또래의 남자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윽고 그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타깝군요. 좋은 식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고형선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끌어 올리자 목상걸이 강진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보기에 강진혁의 미래는 뻔했다.
제법 낭인 생활을 했다고 알려지긴 했으나, 그래봤자 고형선에게는 안 되었다.
체계적으로 일류의 무공을 익힌 고형선은 강했다.
비록 내력이 부족해 일류지경에 들지는 못했으나 그의 기교와 솜씨는 일류고수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만큼 강진혁의 최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 말은 멀쩡히 돌아갈 수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목상걸.”
목상걸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왜냐하면 지게에 한 가득 짐을 실고 있던 강진혁의 신형이 마치 미끄러지듯이 고형선에게 움직여 그의 목을 움켜잡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크윽……!”
꼼짝도 못하고 목을 부여 잡힌 고형선이 뒤늦게 빠져나오려고 강진혁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두 손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두 손등에 검푸른 핏줄이 불끈 솟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진혁의 팔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협박이란 건 말이지.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거다.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게 아니라.”
우드득!
“끄어억!”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옥죄어오는 손아귀에 고형선이 끝내 비명을 질렀다.
경추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자 고통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강진혁은 고형선이 처절한 비명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목상걸은 그게 너무나 두려웠다.
아무리 무인이라는 자들 자체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인 마냥 여긴다고 하나, 이건 그 이상이었다.
강진혁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더 섬뜩한 무언가가 있었다.
“살고 싶나?”
몸부림치는 고형선에게 강진혁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고형선이 정말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에게서 거들먹거리는 표정은 없었다.
또한 강진혁을 무시하는 기미도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럼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야. 내 경고는 한 번뿐이거든.”
끄덕끄덕!
이어지는 강진혁의 말에 고형선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부족한 호흡으로 인해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더 이상 산동악가를 건들지 마라. 이건 경고이자 충고다. 그리고 이 말은 네게도 유효하다, 목상걸.”
“흐읍!”
일순 목상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강진혁의 무시무시한 눈빛과 마주하자 몸이 절로 굳어졌던 것이다.
동시에 목상걸은 고형선과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도록.”
“케헥! 쿨럭쿨럭!”
짧은 한 마디를 내뱉고서 강진혁은 고형선을 바닥에 풀어주었다. 그러자 고형선이 목을 부여잡으며 심하게 기침을 해댔다.
그런 그의 목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마치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명심해라. 다음번에는 이런 아량이 없다는 것을.”
차가운 한 마디를 남긴 강진혁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뿌린 강진혁의 기세가 너무나 대단해서였다.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과도 같은 느낌에 목상걸과 고형선은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한편 두 사람을 남겨두고서 다시 이동을 하던 강진혁이 조금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인재를 빼간 건가.”
산동악가에 대한 완고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목상걸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받고 있는 월봉의 두 배를 주겠다는데 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막말로 돈이 궁한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안예가로 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강진혁은 산동악가의 상황이 점차 힘들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저처럼 막강한 자금력으로 밀고 들어오면 정말 답이 없이 때문이다.
“일단 말은 해줘야겠지.”
산동악가주가 알고 있을지, 모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 강진혁은 우선 돌아간 후 악평후나 악소련에게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 월봉은 얼마지?”
태안예가에 대한 생각이 끝나자 강진혁은 실질적인, 그리고 자신과 관계된 사안을 떠올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격시험을 볼 때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월봉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수습이고 신입이니 적을 건 분명한데. 게다가 사정도 이러니 더욱 낮겠지.”
돈에 굳이 연연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강진혁 역시 사람이었다.
이왕이면 많은 게 좋았다.
선인들도 말하지 않았던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강진혁은 그리 생각하며 발을 더욱 빠르게 놀렸다.
목상걸, 고형선으로 인해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므로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