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전화위복(轉禍爲福).
악만기는 하나로 만든 옥패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강진혁에게 내밀었다.
물론 아교를 바른 게 아니었기에 손을 떼면 떨어지므로 조심히 건네야 했다.
“딱 맞네요.”
이제는 완전히 하나가 된 옥패를 바라보며 강진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악만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옥패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주겠나.”
“저 역시 사부님께 들은 얘기라 자세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드리지요.”
차분한 음성으로 운을 뗀 강진혁이 과거에 사부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찬찬히 꺼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강진혁의 사부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도중 굉장한 고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주 단순했다.
사부의 무위를 알아본 고수가 다짜고짜 덤벼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부는 사흘밤낮을 쉬지 않고 싸웠다.
그때 당시 사부의 무위는 이미 절대의 경지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을 시기였으나 문제는 갑자기 만난 사내의 실력 역시 사부 못지않다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결국 승자는 강진혁의 사부였다.
무려 오일 동안 쉬지 않고 싸운 끝에 승부를 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하기는 했으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이기긴 했으되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강진혁의 사부는 사경을 헤맸다.
워낙에 엄중한 내상을 입은 상태라 정신을 잃고, 차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사부를 발견했다. 그리곤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길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치료해 준 것이다.
그에 사부는 감명을 받았고, 후일 구명지은을 갚기 위해 수중에 있던 옥패를 반으로 갈랐다.
그게 바로 지금 강진혁의 손에 들린 옥패였다.
“그 분이 내 부친이셨던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의외로 강호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였다.
괜히 냉혹무림, 비정강호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 정도로 강호인들은 친인이나 혈육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에게 극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명이 쟁쟁한 사람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아까 내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본가의 명성 회복이네.”
눈을 빛내며 말하는 악만기를 보며 강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처한 산동악가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바라는 문제이기도 했다.
바람이란 이뤄지기 힘든 상황을 염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니까.
“어려운 부탁이로군요.”
“역시 그런가.”
“하지만 적어도 그 근처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가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가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 악만기는 기대를 하곤 있었지만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큰 기대를 가지기에는 그가 본 강진혁의 나이가 너무 어리기도 했고, 아직 알게 된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강진혁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오자 꺼져가던 악만기의 눈빛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악가에 있어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고수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우선은 그것부터 해결을 해볼까 합니다.”
강진혁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이어지는 뒷말에 눈을 끔뻑였다.
해결을 해주겠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강진혁은 악만기의 눈빛을 받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받으세요.”
“뭔가, 이건?”
“열어보시면 알 겁니다.”
강진혁의 품속에서 나온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목갑이었다.
그에 악만기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목갑을 받았다.
일단 주는 것이니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목갑의 뚜껑을 열었을 때 악만기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다.
파아앗!
볼품없는 목갑 뚜껑을 열기 무섭게 청량하고 산뜻한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악만기는 그 향을 느낄 새가 없었다.
왜냐하면 목갑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온 신경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 이건.”
“오백년 정도 묵은 산삼입니다.”
“꿀꺽!”
눅눅한 흙과 함께 고이 담겨 있는 오동통한 산삼 한 뿌리를 보며 악만기는 절로 침을 삼켰다.
굳이 강진혁이 부가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손에 들린 산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더구나 오백 년 정도 된 산삼이라면 능히 영약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또한 값으로 따질 수도 없는 무가지보였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세상에 나오지 않는 이상 구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이와 같은 영약이었다.
그래서 악만기는 두 손을 덜덜 떨며 강진혁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서 심호흡을 했다.
“이걸… 진짜 나에게 주는 건가?”
“사부께서 입은 구명지은에 대한 보답입니다.”
강진혁은 하산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산동악가에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 것인지를.
그러다가 떠올린 것이 마침 수중에 있던 산삼이었다.
원래는 기력이 쇠한 사부님에게 달여 드리기 위해 구한 것인데, 복용을 원치 않으셨기에 결국 쓰지도 못하고 남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먹어 봤자 쓸모도 없을 것이기에 강진혁은 이 산삼을 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세가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약이란 게 하늘이 내린다는 말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면 그래도 보은(報恩)하는데 있어 부족함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 이렇게 마음먹은 것은 또 아니었다.
대충 이런 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중요한 것은 우선 가서 보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러다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강진혁은 마음을 정했다.
산삼을 악만기에게 주기로.
적어도 지금 상태에서 내력이 증진된다면 눈에 띄게 강해질 수 있으니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귀한 물건인데…….”
악만기는 말을 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산삼을 보고 있으면 탐욕을 감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 정도로 산삼의 가치는 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악만기는 받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는 선물이라고 하나, 그 선물이 너무 과했다.
차라리 판다고 하면 그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조리 팔아서라도 살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받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귀해도 사부님보단 아닙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받으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악만기가 강진혁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자 흔들림 없이 심유한 강진혁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아쉬움도, 아까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잔잔하고 촉촉한 눈빛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맙게 받겠네.”
“그거면 됩니다.”
악만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산삼을 잡았다.
그러나 두 손으로 잡았음에도 그의 손에 들린 목갑은 여전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악만기는 멍하니 산삼만 바라봤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가 않는 얼굴로 말이다.
“지금 복용하십시오.”
“지금 말인가?”
넋을 놓고서 산삼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악만기가 강진혁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예. 제가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악만기가 살짝 주저했다.
영약이라 불리는 것들은 보통 약성이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그래서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게 영약이었다.
몸에 좋다고, 귀하다고 함부로 먹으면 되레 복이 화가 될 수도 있기에 복용하기 전에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악만기는 선뜻 먹으려 하지 않았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아니. 믿지. 암. 믿고 말고.”
무가지보라 칭할 수 있는 영약을 단지 과거에 사부가 은혜를 입었다고 선뜻 내놓은 이가 강진혁이었다.
그런 이를 믿지 못할 정도로 악만기는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자신보다 강한 강진혁이 호법을 서준다면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그는 대뜸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음을 편히 가지고 운기하시길.”
“알겠네. 그리고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굳건한 눈으로 강진혁을 한차례 바라본 후 악만기는 도톰한 산삼을 단번에 집어넣었다.
두툼하기도 하거니와 잔뿌리가 많아 한 입에 다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는 어떻게는 꾸역꾸역 입 안에 다 넣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서 천천히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으으음!”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약력이 오는 모양인지 악만기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작이군.’
악만기의 씹어 넘김이 줄어들수록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도 강해졌다. 그러자 방 안이 순식간에 후끈하게 달아 올렸다.
우우우웅.
영약의 기운을 본격적으로 흡수하는 모양인지 묘한 소성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던 열기가 몸을 중심으로 휘돌기 시작했다.
“흐읍! 흐으윽!”
운기행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백 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오백 년이나 묵은 산삼이었기에 기운을 일체화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악만기는 정말 이를 악물고서 운공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시진이 흐르자 한계가 도달한 듯 몸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이 승부처다.’
악만기를 바라보는 강진혁의 두 눈이 빛났다.
사실 강진혁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했었다.
오백 년 묵은 산삼의 기운이 엄청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로 독촉하듯 복용시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부르르!
강진혁은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는 악만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전음을 들었음에도 악만기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약기운과의 사투로 강진혁의 전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에 강진혁이 악만기의 등 뒤로 돌아가 명문혈에 양손을 댔다.
그러자 엄청난 열양지기가 그의 손을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강진혁이 이러한 상황을 만든 이유.
그것은 단순히 내공증진에서 끝내지 않고 지금보다 한 단계 더 위로 성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막대한 내공과 더불어 경지까지 상승된다면 악만기는 지금보다 족히 세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산동악가의 힘이 세 배는 더 강해진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강진혁은 일부러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