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광경을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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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격리가 끝난 후 첫 번째 외출이었다.
현이 오라버니는 특별히 이번 장기 외출에 나를 데려가기로 했다.
여태껏 외출이래 봤자 굴아화 내에서만 다녔지 밖으로 벗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신라의 수도 금성은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눈으로 확인할 기회는 없었기에 굉장히 기대됐다.
뭘 챙겨야 하나 짐을 꾸려봤지만 딱히 챙길게 없어 갈아입을 옷 한 벌 만 가져가기로 했다.
"구슬아, 준비 다 했니? 어서 가자."
"네, 오라버니!"
가벼운 보따리를 등에 메고 총총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
"이게 다예요? 이번에는 물건들을 안 가져가네요?"
여느 외출과는 달리 단출하게 꾸려졌다.
우리가 탈 마차 한 대와 약간의 짐이 딸린 마차 한 대가 다였다.
"이번에는 일 때문에 가는 게 아니야. 친구의 건강이 안 좋다기에 병문안 차 얼굴도 볼 겸 가는 거란다."
달그락달그락.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싱그러운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의 노랫소리가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창밖 구경을 하다가 얼굴이 뜨거워서 가리개를 닫았다.
맞은편에 앉은 오라버니와 진 씨는 둘 다 눈을 감고 있었다.
오라버니를 가만히 감상하고 있자니 아까 봤던 청량한 하늘이 떠올랐다.
반면 그 옆의 진 씨는 오라버니의 그림자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숯처럼 새까맣다.
"진 씨는 왜 항상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요?"
"..."
잠든 것이 아닌 게 확실한데 역시나 내 말은 귓등으로 무시한다.
"시원하게 넘겨봐요. 날씨도 덥잖아요. 답답하지 않아요? 앞이 잘 안 보여서 넘어지거나 하진 않아요?"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칫, 이 차갑고 냉혈한 인간아.
저런 남자를 과연 어떤 여자가 좋아할까?
우리 둘의 대화(일방적으로 나 혼자 떠드는 수준이지만)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라버니가 눈을 뜨고 말했다.
"나도 진 형이 그만 얼굴을 드러냈으면 싶구나."
"그러면 오라버니는 진 씨의 얼굴을 본 적이 있어요?"
오라버니가 진 씨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겼어요? 분명히 포악하게 생겼을 거예요! 눈은 이렇게 찢어져선 못되게 생겼을 거라고요!"
진 씨가 열받았는지 움찔거렸다.
오라버니는 배를 움켜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왜 그렇게 유독 진 형을 싫어하는 거니? 형은 좋은 사람이야.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사실은 다정하고 속 깊은 사람이란다."
오라버니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건 오라버니한테나 해당하는 거겠죠! 진 씨는 평소에 저를 얼마나 무시하는데요. 아까도 봤잖아요. 저 혼자만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고요."
"들었지? 형도 조금은 구슬이한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어때?"
계속 꾸욱 입을 닫고 있던 진 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모시는 분은 도련님 한 분뿐입니다."
"흥, 저도 됐네요! 그렇게 아끼시는 도련님만 모시다가 혼자 늙어 죽으라지!"
혓바닥을 쏙 내밀어 메롱 해 보였다.
진 씨는 또 움찔거렸지만 다행히 그뿐이었다.
"하하하! 둘이 티격태격 대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구슬이가 오고 나서부터 웃을 일이 너무 많아 걱정이야."
현이 오라버니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니 정말 뿌듯해.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어.
오라버니의 눈가는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다.
아마 늘 웃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눈동자에는 수많은 별이 박혀있는 듯 너무나도 예쁘다.
저 눈이 앞으로도 날 향해 계속 웃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틈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덮쳤다.
상상대로 금성은 대단했다!
우선 내가 태어난 곳과 굴아화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람들로 넘쳐났다.
반듯하게 인도와 도로로 분리돼있었고 바둑판처럼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금을 입힌 번쩍번쩍한 집도 있어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금이 어찌나 흔한지 개의 사슬이 금으로 돼있고 원숭이의 목테마저 금이었다!
거리에도 상점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주인이 한눈판 사이에 물건을 슬쩍 훔쳐 달아나는 꼬맹이도 보였다.
얼굴이 꾀죄죄하고 다 뜯어진 누더기를 걸쳤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씨익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더니 이쪽으로 뛰어왔다.
뭐야, 왜 오는 거지?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먹을 것 좀 나눠주셔유!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질 못했더니 쓰러질 것 같아유... 제발유!"
나는 오라버니를 슬쩍 쳐다봤다.
오라버니는 내 눈빛에 난감한 눈치를 보이더니 곧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진 씨가 우리가 간식으로 먹고 남긴 떡을 내주었다.
"우와아! 맛있겠네유! 감사혀유!"
꼬맹이는 그 자리에서 떡을 몽땅 한 입에 털어 넣어버렸다.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역시나 떡이 목에 걸려 캑캑 거리길래 물병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물을 목구멍에 콸콸콸 털어놓고는 끄어억 용트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재빨리 손으로 코를 쥐어 잡았다.
"돌아! 한참 찾았잖어! 또 무슨 사고 친 건 아니구?"
저 멀리서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누나! 이분들께 떡을 좀 얻어먹었지. 아, 누나 것도 남겨놨어야 했는디... 배고프지 누나?"
그리고 돌이라는 남자아이는 불쌍한 표정으로 우리를 다시 쳐다봤다.
으이구...
그때, 지나가던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돌이의 누나를 붙잡았다.
"이 년! 한동안 안 보이더니 여기서 만나네! 빚은 대체 언제 갚을 셈이야?!"
흐익! 나는 깜짝 놀라 창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뒤에 있던 사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우리의 마차를 툭툭 쳤다.
"어이, 이보쇼! 댁들은 가던 길이나 가쇼!"
돌이와 돌이의 누나는 새파랗게 질려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냥 가시죠. 저들을 도와주면 밑도 끝도 없습니다. 다들 자기들도 도와달라고 달라붙을 겁니다."
진 씨의 말에 나는 다시 창밖을 둘러봤다.
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저들과 같은 행색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금성도 마냥 화려하고 밝지만은 않구나...
"출발하지."
오라버니가 가리개를 내리며 말했다.
해가 저물고 거대한 저택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
우리는 하인의 안내로 평평한 돌이 박힌 길을 따라 안채로 향했다.
마당은 굉장히 넓고 휑했다.
현이 오라버니 댁은 햇살이 마구 내리 쬐 따듯한 느낌인 반면, 이 집은 굉장히 외롭고 싸늘한 느낌이었다.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정녕 사람이 사는 곳일까?
이곳에서 식물이 자라난다고 해도 금방 시들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피곤하지? 어서 들어와."
저택의 주인은 굉장히 매혹적인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박힌 진홍 색의 비단은 그의 창백한 인상과 안성맞춤이었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밟는데 시원한 느낌이 뼈 속까지 전해져왔다.
이곳에서 여름이 끝날 때까지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
얇고 가벼운 방석 위에 앉자 술상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시장하지? 어서 들도록 해. 나의 오랜 친구가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가 빙긋 웃으며 오라버니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를 보고 있자니 홍매화가 떠올랐다.
꽃잎이 지고 있는...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현이 오라버니는 인상을 쓰고 심각하게 말했다.
"별 거 아닌걸?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관리만 잘 하면 오래 사는 데 지장 없다고 했어. 하지만 오래 살아봤자 의미가 있을까..."
"너 설마 아직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자자, 우리 이제 막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는 관두자. 나는 웃으며 나의 오랜 친구와 재회하고 싶다고."
그의 긴 눈이 나를 향했다.
"여기 이 꼬마 아가씨는 누구지?"
"아, 소개가 늦었네요! 나이는 열한 살이고 이름은 구슬이에요."
현이 오라버니 댁에 온 이후로 나는 원래 이름을 숨겼다.
굴아화에서 지내는 동안 그 편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냐는 오라버니의 의견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던 나는 별말 없이 순순히 그 의견에 따랐다.
"흐음. 언제 이렇게 어여쁜 동생이 생긴 거지? 아... 동생이라고 칭해도 되는 건가? 혼인을 약속한 사이 같은 건 아니고?"
순간 얼굴이 화악 불타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사람은 그런 말을 어쩜 저리 쉽게 하는 거지?
"오해하지 마. 우리 집에 머물게 됐는데 여동생 삼기로 했어."
오라버니가 딱 잘라 말했다.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구슬아, 대신 사과할게. 류희 장난이 너무 지나쳤지?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는 녀석이야."
오라버니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러자 류희 오라버니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둘이 똑같이 얼굴 시뻘개져선 뭐 하는 짓이야? 그래, 나는 석류희야. 현이랑은 너보다 어릴 때부터... 막 걷기 시작했을 적부터 친구로 지냈어. 이 녀석, 어릴 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르지?"
"놀리는 건 그쯤 해두지그래? 나도 너에 대해 풀어놓을 이야기라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고. 아프다더니 어디가 아픈 건지 전혀 모르겠군!"
말을 마친 오라버니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늘 점잖던 오라버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평상에 앉으니 여름날의 시원한 밤공기가 내 몸을 가볍게 휘감았다.
저 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얘기가 정말로 많겠지.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가족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모님... 동생... 언니들... 잘 지낼까?
막내는 얼마나 컸을까...
차마 볼 수 없기에, 상상만 할 수밖에 없기에 더욱 슬퍼 가슴이 사무치게 아려왔다.
지금 이대로 집에 찾아간다면... 류희 오라버니처럼 가족들도 날 반겨줄까?
가족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 못 견디겠어...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작정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택을 빠져나와 마치 뭐에 홀린 듯 계속 걸었다.
사방이 어둡고 혼자였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걷다가, 문득 멈춰 뒤돌아봤다.
어느새 작은 동산에 올라와 있었고 커다랬던 저택이 한 손에 잡힐 만큼 작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대로 털썩 주자 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왜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야만 하는 걸까?
할머니, 어디 계세요...
날 굴아화에 데려다 놓고 어디로 사라진 거죠?
왜 내가 집을 떠나야만 했는지 납득할 수 있게 해줘요...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차차 정신을 차렸다.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았다.
"하하하하! 이번엔 내 차례야!"
멀리서 남자아이 하나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애 혼자뿐이었고 혼자서 잘도 뛰어놀았다.
"잡았다! 이번엔 길달이 술래야, 모두 잡히지 않게 도망치자!"
나무 뒤에 숨어 한 밤중의 이상한 광경을 계속 지켜봤다.
저 아이는 분명히 혼자인데 마치 여럿이서 노는 듯 행동하는구나.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니... 뜨악!
"꺄아악!"
내 비명소리에 뛰어다니던 남자애가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어두컴컴해서 얼굴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강한 집념으로 저택을 향해 냅다 달렸다.
발이 꼬여 넘어졌다가 일어섰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저택 앞에 도착했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더니 한참을 되돌아오지 않기에 막 찾아 나서려던 참입니다."
진 씨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상대가 진 씨이든 말든 간에 그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진 씨이니까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귀신이에요! 분명해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정부터 하시죠."
"아이 참! 방금 귀신을 봤다니까요?"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나는 더 이상 진 씨에게 얘기하는 걸 포기하고 오라버니가 있는 안채를 향해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잡고 달려갔다.
"어디 갔었니? 서라벌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돼.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니? 순간 내가 널 여기 데려온걸."
나는 오라버니의 말을 끊고 황급히 말했다.
"다시 잘 찾아왔으니 된 거잖아요! 있잖아요, 내가 방금 저기 동산에 올라갔다 왔는데 뭘 봤는지 알아요? 글쎄, 미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 귀신이 있더라고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남자아이 혼자서 놀고 있는 줄 알았더니 글쎄 귀신들과 어울리고 있더라고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자 오라버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벽에 기대 가만히 듣고 있던 류희 오라버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많이 놀랐나 보구나? 네가 방금 본 그 아이는... 아마 비형일 거야. 도깨비랑 어울리는 걸 본 사람들이 있대. 금성에 오자마자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구나."
나는 아직도 공포가 가시질 않아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오늘 밤은 다 잤네. 현이 오라버니가 곁에서 지켜줘야 하는 게 아닌가 몰라."
류희 오라버니가 킥킥 웃으며 사라졌다.
오라버니와 한 방에서 잠을?
다시 얼굴이 뜨거워지려는 찰나 현이 오라버니가 헛기침을 했다.
"정말 혼자 잘 수 있겠니? 아직도 이렇게나 무서워하는데."
"혼자 잘 수 있어요! 아마 그럴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아마 아침쯤이요..."
점점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더니 오라버니가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전혀 괜찮지 않다는 소리잖아."
나는 입을 삐쭉대며 이마를 매만졌다.
"좋아. 그러면 잠들 때까지 옆에서 책을 읽어줄게."
"정말요? 여태껏 누가 저에게 잘 때 책을 읽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대신 제가 동생한테 늘 책을 읽어주곤 했어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요. 그런데 누가 절 위해 책을 읽어주는 건 처음이에요!"
오라버니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 지었다.
그의 머리 위에 떠있는 달보다 더 환한 미소였다.
나를 온통 뒤덮었던 공포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
대신 설레어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금성에서의 첫날밤은 오라버니의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