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친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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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에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나 흘렀다.
커다란 규모의 시장들을 구경하며 길거리 음식, 싸움판이 벌어지는 곳, 도박을 즐기는 현장도 심심치 않게 봤다.
신라의 수도답게 외국인들도 굉장히 많았고 서역인이 지나갈 때면 오라버니가 잔뜩 경계했다.
그리고 큰 연못가의 잘 꾸며진 정자에는 날마다 여러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향가를 부르며 매일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연못가에 띄어진 작은 배 위에서도 똑같이 사람들은 유흥을 즐겼다.
류희 오라버니 곁에는 늘 여자들로 넘쳐났다.
어쩌면 곁에 있는 여자들보다 류희 오라버니가 더 아름다운 것 같았다.
그에게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꿀벌들이 딱 하나밖에 없는 꽃에게 이끌리듯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어떠니?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길을 걷다가 오라버니가 가판대 위에서 노란 꽃 모양의 머리장식을 집어 들었다.
"와아,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오라버니가 웃으며 환한 색상의 머리장식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신나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면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해유... 죄송해유! 다 지 잘못이 어유!"
내가 해야 할 말인데 그쪽에서 사과를 해왔고 그녀는 금성에 처음 온 날 마주쳤던 돌이의 누나였다.
행색이 그때보다 더 꾀죄죄하고 안 좋아 보였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널 친 거야."
"죄송해유... 제발 살려 주셔유..."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너 돌이 누나 맞지?"
내 말에 그녀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돌이... 지 동생을 아셔유?"
"그래. 저번에 본 적이 있어. 그런데 왜 우니?"
"아... 불쌍한 돌이... 그 애는 잘못한 게 없어유..."
돌이 누나는 횡설수설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말이야? 돌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정신없이 끅끅 울길래 등을 토닥여줬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진정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돌이는... 그 불쌍한 아이는 얼마 전에 죽었어유... 흑흑... 나쁜 놈들..."
"뭐? 어쩌다가?"
깜짝 놀란 나는 그만 쥐고 있던 머리장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세상에! 그 건강해 보이던 애가 어쩌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돌이의 누나 순애는 어릴 적 엄마가 집을 나가서 아빠와 돌이와 셋이 살았는데 아빠가 매일 술을 마시곤 남매를 학대했단다.
그래서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해 석 달 전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빚쟁이들이 아빠가 진 빚을 자식들인 순애와 돌이에게 갚으라고 협박을 했단다.
며칠 전 돌이가 그놈들한테 반항을 하다 얻어맞고 넘어지면서 재수 없게 돌에 머리를 찧어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순애는 노예가 되어버려 누군가 자기를 사가고 아빠의 빚을 갚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괜찮니? 일단 진정하고... 아, 이거라도 머리에 꽂으면 조금 기분전환이 될 거야."
나는 노란 꽃 머리장식을 순애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훌쩍훌쩍 구슬피 우는 내 또래 여자아이를 모른 척 지나칠 순 없었다.
동생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길로 곧장 근처에 있는 오라버니에게 찾아갔다.
우리는 며칠 동안 쫄쫄 굶은 순애에게 국밥 한 그릇 시켜주었다.
처음에 순애는 입맛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내가 억지로 한 숟갈을 입에 넣어주자 입맛이 도는지 그 뒤로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그런데 오라버니의 시선은 내내 순애의 머리장식에만 꽂혀있었다.
큰일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감사드려유. 지를 거둬주신 분이 아씨라 정말 다행이어유... 미천한 소녀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겨주시어 감사할 따름이어유.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유."
식사를 마친 순애가 우리에게 절을 올렸다.
그런데 옷이 너무 헤져서 저 상태는 벗느니만 못 할 듯싶었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저에게 옷 한 벌이 더 있어요. 그걸 순애에게 주고 싶어요."
"하지만 너도 옷 한 벌만 챙겨오지 않았니?"
"괜찮아요. 저는 이 옷 한 벌로도 충분해요. 혹시나 하고 가져와봤는데 지금이 그 옷이 쓰일 때에요."
오라버니는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구슬이는 정말로 착하구나."
우리는 바로 순애를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
뽀드득 깨끗하게 씻고 내 옷으로 갈아입혀주었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세상에! 그동안 가려져있어서 몰랐는데 정말로 곱구나!"
나의 칭찬에 순애는 수줍은 듯 웃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웃었고 마치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에게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런지 순애를 자꾸만 더 챙겨주고 싶었다.
순애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기... 헌데 이건 돌려주어야 할 것 같아유."
노란 꽃 머리장식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순애 쪽으로 밀었다.
"아니야. 널 위해서 준 건데 왜 돌려줘? 사양 말고 받아."
"하지만 아까부터 도련님께서 자꾸만 이 머리 장식만 보시던걸유... 그래서 틀림없이 그분은 아씨를 위해 주셨을 거라고 생각했구먼유."
"맞아. 똑똑하구나. 하지만 지금 이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오라버니도 다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 속이 정말 깊으신 분이시거든."
"그 분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시네유."
순간 내 얼굴이 붉게 타올랐고 순애도 당황해했다.
"지가 감히 건방진 말을 해버렸네유! 용서해 주시어유!"
"네 말이 맞아. 나는 오라버니의 웃는 모습이 좋아. 하지만 웃는 모습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공부를 하다가 잘 안 풀리는지 인상을 찡그릴 때에도, 고민이 있는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을 때도 좋아. 그냥 오라버니가 뭘 하든 간에 다 좋아."
그래, 그냥 오라버니 그 자체가 좋아.
굴아화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였어.
그 안도의 웃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경이로운 표정이었어.
난 오라버니를 만나고 다시 태어난 거야.
"류희 오라버니, 부탁드릴게요. 제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만 순애도 같이 지내게 해주세요. 잠은 저랑 같이 자고 먹을 것도 제 것을 반 나눠줄 거예요."
오라버니 어깨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아니꼽게 쳐다봤지만 순애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누구? 친구라도 만든 거니?"
오라버니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네, 제 첫 친구예요."
"현이에게 대충 얘기는 들었어. 몸종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아무 방이나 써도 좋아. 어차피 방은 많으니까. 그리고 밥도 나눠 먹을 필요는 없어. 식량은 넘쳐나거든."
“꺄아!”
오라버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리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고 오라버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자는 시끄러운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는 오라버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왔다.
"오라버니가 널 받아들여주셔서 정말 다행이야!"
"감사 드려유, 이게 다 아씨 덕분이어유. 지는 참말로 행운아구먼유. 아씨같이 좋은 분을 섬기게 됐으니까 말여유."
순애는 여태껏 본 웃음 중에 가장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저 애에게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곧이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 순애를 데려가 머물게 될 방이 정해지고 그녀는 다음날부터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 여자들이 이렇게 찾아오는 걸까요?"
시녀를 대등하고 류희 오라버니의 방으로 걸음을 바삐 옮기는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류희가 보고 싶어서 찾는 거겠지. 물론 그 녀석도 여자들을 계속 부르는 걸 테고."
현이 오라버니가 탐탁지 않은 듯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자신의 친구가 여자에 빠져 허구한 날 술이나 마셔대니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참, 내일 수나라에서 사신이 방문한다는구나. 상인들도 대동한다기에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역시 너도 가고 싶겠지?"
"그런걸 입 아프게 뭣하러 물어보세요? 제 대답은 당연히 저도 갈 거예요!"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한숨을 쉬며 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걱정 말아요! 제 곁에 오라버니가 있잖아요. 저도 이제 마냥 어리지만은 않다고요. 오라버니를 만나고부터 세상 물정 많이 배웠거든요.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고요."
오라버니가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알았어. 다시는 걱정 안 할게. 당사자인 네가 괜찮다는데 왜 내가 쓸데없이 이러는 건지 모르겠구나... 혹시 나도 너처럼 강했더라면... 괜찮았을까..."
멀찌감치 떨어져 마당 개와 놀아주고 있는 진 씨를 바라보며 오라버니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걸요?
오라버니가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돼주고 싶어...
다음 날, 연못가의 정자로 가니 수나라 상인이 물건을 펼쳐놓았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류희 오라버니는 우리를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방으로 들어가니 수나라 상인 여러 명이 있었고 그 중엔 내 또래 남자아이 한 명도 섞여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고 그 남자아이는 뭔가 재미난 걸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밥을 먹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애가 자꾸 흘끔흘끔 날 쳐다봤지만 애써 무시했다.
오라버니들은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우리 수나라에서 새로 개발한 창과 포탄을 가져와봤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창고로 가서 들어보시지요."
"물량은 얼마나 됩니까? 저희도 더 사용하기 쉬운 노를 개발했는데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류희 오라버니는 술잔을 들이켰다.
상인인 현이 오라버니는 여러 가지 물건을 취급하지만 주로 무기를 들여오고 있다.
그래서 굴아화의 외딴곳에 떨어진 창고에는 수입해온 무기가 한가득이고 종류와 수량을 확인해 류희 오라버니의 아버지에게 보고한다.
가만히 앉아있기 지루해서 슬쩍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건물 밖에서 누군가가 방 안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에 놀란 수상쩍은 사람은 그대로 달아나버렸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아까 방 안에 같이 있던 남자아이였다.
"너였니?"
"뭐가?"
"...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다른 사람 못 봤니?"
"지금 너 말고는 본 적 없는데?"
"왜 나왔니?"
배시시 웃는 남자애는 상인치고는 어딘가 제법 귀티 나 보였다.
"너를 만나보고 싶었어."
"날 아니?"
"당연히 알지. 넌 상인들 사이에서 유명인인데."
"내가? 왜?"
나의 반응에 남자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냐니? 정말 모르는 거야? 함부로 건드렸다간 황천길 간다는 소문의 여자아이가 손 이방 댁 딸이라는 얘기. 서역인들이 어찌나 벌벌 떨던지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라더라."
맙소사, 그 일이 그렇게 소문이 날 줄이야!
오라버니는 알고 계실까?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금시초문인가 보구나? 그 대단한 소문의 주인공이 누군가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말을 마친 남자애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는 넌 누구니?"
"나? 난 수나라의... 상인의 자식이지 뭐!"
뒤통수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더니 곧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수은제야. 넌?"
"난 구슬이야."
손을 못 본 척 잡지 않았더니 민망해하며 손을 거두었다.
"다음에 다시 보면 그때는 잡아줘야 해?"
은제가 머쓱해 웃으며 말했다.
눈 밑에 예쁜 점이 있구나.
"넌 여기 왜 왔니?"
내가 물었다.
"신라 사람들 구경하러 왔지! 난 따분한 정치 얘기보다는 이렇게 밖에 나오는 게 더 좋아."
나는 후후후 웃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와 세상구경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정치의 일종이야. 민심을 알 수 있게 되잖아."
"그렇구나? 너 굉장히 똑똑하다! 수나라로 돌아가면 당장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야지!"
잔뜩 흥분한 은제가 말했다.
"아바마마? 네가 무슨 왕자라도 되니?"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니 은제가 몹시 당황해했다.
"무슨! 아니야! 우리 집에선 평범하게 아버지라고 안 불러... 그냥 우리 집이 좀 유별난 거야."
"너희 집안은 왕족이 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나도 동참할게. 왕자님, 소녀가 인사 올리겠사옵니다."
공손하게 절을 올리자 당황한 은제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러지 마! 나는 내가 왕자라고 절대로 얘기한 적 없다고!"
나는 푸하핫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은제도 곧 따라 웃었다.
한참을 시끄럽게 놀고 있는데 수나라 상인이 은제를 데려갔다.
은제는 떠나기 전, 뒤돌며 말했다.
"다음에 다시 또 봐. 그때는 네가 먼저 내 손을 잡고 싶어질 거야."
"글쎄? 네가 멋있어진다면 그렇게 할게."
나는 메롱 혀를 내밀었고 그렇게 은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짧지만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허전함도 잠시, 곧 현이 오라버니도 날 데리러 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