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그림
*
굴아화에서 며칠 후면 손 이방 어르신이 당도하신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급히 금성 저택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일하느라 바쁜 순애랑 제대로 놀지도 못한 아쉬움에 다음번에 만나면 꼭 재밌게 놀기로 약속했다.
류희 오라버니도 아쉬워하며 우리를 배웅했다.
"너희가 벌써 가버리다니 정말 허전할 거야. 다음번엔 내가 굴아화로 찾아갈게."
"됐어, 몸도 안 좋은 녀석이. 시간 나면 또 오도록 할게. 구슬이가 금성이 몹시 마음에 든 것 같아."
현이 오라버니가 친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금성은 굴아화랑 또 다른 느낌이어서 좋아요. 게다가 여기엔 순애도 있으니 순애를 보러 또 와야죠."
내 말에 류희 오라버니가 갑자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숨을 내쉬면 숨결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깜짝 놀란 나는 뒷걸음질 쳤다.
"순애만 보러 올 거야? 이거 정말 섭섭한데?"
"다, 당연히 오라버니도 보러 와야죠! 너무 당연해서 말 안 한 거예요."
"그래, 다음엔 더 커서 오렴."
오라버니가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우와아,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싫은 건 아니야.
"너무 놀리지 마. 구슬이도 이제 마냥 어리지 않다고 했으니까."
현이 오라버니의 말에 뒤에 있던 진 씨가 풉 하고 비웃었다.
나는 곧바로 그를 째려봤다.
"왜 웃어요?"
"아닙니다. 아씨 착각이십니다. 저는 절대로 웃지 않았습니다."
내가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게 그렇게 우스운가?
나는 양쪽 볼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으니 이번엔 류희 오라버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러니까 꼭 개구리 같잖아."
그 말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고,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고, 이별했다.
금성에서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아름다운 류희 오라버니를 만났고,
동생을 정말 사랑하는 순애를 만났고,
상인이 될 수나라 사람 은제도 만났고,
아, 잊을 뻔했는데 귀신이랑 노는 아이도 봤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돋았다.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힘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데 진 씨가 꼭 날 덜떨어진 애 보듯 쳐다봤다.
곤히 잠든 가운데 현이 오라버니가 날 흔들어 깨웠다.
어느새 굴아화에 도착했다.
집이다!
오랜만에 이곳으로 돌아온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온몸이 노곤노곤 피로해졌다.
긴 여행을 마치자 긴장이 풀린 것이다.
당장 방으로 뛰어가 두 다리 뻗고 단잠을 청했다.
내일 일어날 일은 전혀 예상 못한 채.
다음 날, 점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회를 먹고 마당 개와 놀고 있었다.
개가 시끄럽게 월월 짖더니 말 여러 대가 다그닥 다그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 등을 콕콕 찌르길래 뒤돌아봤더니 현이 오라버니가 서있었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르신이 막 도착하신 것 같은데."
우리는 대문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오라버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고 말 못 한 게 있어."
"그게 뭔데요?"
"섭섭해하지 말고 들어주렴. 우리 아버지는 굉장히 거칠고 호탕하시고 나랑은 정반대 셔. 아마 난 어머니를 많이 닮았을 거야. 아버지는 집에 손님이 오랫동안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 그래서 아버지께는 너를 이번에 새로 들여온 몸종이라고 소개하려는데... 괜찮겠니?"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하세요? 전 상관없으니 오라버니 편한 대로 하세요."
"아버지는 아마 금방 또 나가실 거야. 집에 오랫동안 머무시는 일이 별로 없거든. 그러니 며칠만 좀 고생해 줘."
"네, 전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미안하구나. 아버지 눈에 최대한 안 띄면 편할 거야."
오라버니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숨어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야. 그럼 너무 갑갑할 거야.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순 없으니 최대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자.
결심을 마치고 오라버니를 뒤따라 마당으로 가서 몸종들 사이로 파고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살짝 고개를 들어 손 이방 어르신을 살펴보았다.
과연! 오라버니와는 딴판이었다.
대체 닮은 점이 뭐가 있을까?
어르신은 몸집이 굉장히 크고 산적 같았다.
눈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먼 길 다녀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무쪼록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래! 내 아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목소리도 쩌렁쩌렁해서 땅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다 아버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예정보다 빨리 오신듯싶습니다."
"그래! 내가 수나라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지."
히익! 순간 생각났다.
은제가 해준 얘기!
나도 참, 오라버니께 말한다는 걸 깜빡했구나.
"이상한 소문이라니요?"
영문을 모르는 오라버니가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대체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길래 그런 소문이 돌아다닌단 말이냐! 네가 혼쭐을 내줬다는 서역인들 때문에 우리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단 얘기다! 그리고 나에게 딸이 있었더냐? 어디 얼굴 좀 한번 보자. 당장 그 계집애를 데려와!"
잔뜩 흥분한 어르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오라버니는 진땀을 흘리며 얼굴이 새파래져버렸다.
당황해서 굳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재빨리 어르신 앞으로 달려나가 무릎을 꿇었다.
"소녀 인사가 늦었사옵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몸종입니다. 곤란에 처한 저를 주인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그래, 네가 소문의 내 딸이더냐? 고개를 들어보거라."
나는 굳센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어르신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르신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구슬이입니다!"
대답을 하려던 찰나, 오라버니가 재빨리 말했다.
"미천한 몸종 이름을 알아 뭣 합니까? 일도 잘하고 싹싹하길래 아까워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일은 저희 집안과 아버님을 모욕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혼쭐을 내주어야 마땅합니다."
"... 그렇다면 잘 한 일이다. 내 아들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지! 딱 한 번만 빼고... 따라 들어오너라."
어르신이 안채로 발걸음을 옮기자 오라버니도 뒤따랐다.
휴우, 다행이다... 별일 없이 넘겼어.
그래도 어르신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만남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긴장감이 사르르 풀려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뭣 하느냐? 어서 일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면 오늘 밥은 없을 줄 알아라."
진 씨가 내 앞에 빗자루를 툭 던졌다.
이제 진짜로 날 몸종 취급하겠다 이거지?
오라버니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며 빗자루를 들었다.
손 이방 어르신은 집안일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맡겨두고 툭하면 여행을 쏘다녔다.
여행에서 가져온 진귀한 물품들을 교환하거나 파는 식으로 재산을 늘려갔다.
어르신이 집에 있는 기간은 일 년 중 한 달이 채 될까 말까였다.
그 덕에 어르신이 집에 머무는 동안만 종노릇을 하면 돼서 나머지는 편안하게 현이 오라버니 그늘 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붙잡을 틈도 없이 흘러 어느덧 나는 열다섯 소녀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잘 익은 복숭아같이 발그레하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오라버니에게 잔뜩 예쁨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오라버니는 여전히 맑은 하늘의 봄바람처럼 산뜻한 느낌을 간직하면서도 점점 성숙해져 어른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 커서 따라잡으면 그만큼 오라버니도 커서 멀어져 갔다.
그동안 나는 오라버니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오라버니 곁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진 씨가 있었다.
진 씨는 감기가 들었는지 쿨럭쿨럭 기침을 해댔다.
"괜찮아요? 환절기라 조심해야 해요."
"오지 마세요. 옮습니다."
"난 튼튼해서 상관없어요!"
내가 양 팔을 불끈 들어 보였다.
그러자 진 씨가 피식 웃었다.
"진 씨는 나이도 있는데 혼인 안 해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오라버니 뒷바라지하느라 그렇죠? 어릴 적부터 오라버니를 키운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이 없습니다. 처음엔 동생처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같이 느껴... 크흠!"
진 씨는 황급히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며 휘적휘적 사라졌다.
세상에... 이건 어마어마한 발전이었다!
과묵한 진 씨가 두 마디 이상 하는 것도,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진 씨가 사라진 곳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4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점점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 콧노래를 부르며 산책을 나갔다.
들판에는 생동감 있어 보이는 꽃들이 잔뜩 피어올랐다.
여러 색상의 꽃들이 한데 어우러지니 정말 아름답구나.
나는 책을 읽고 있는 오라버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꽃을 하나하나 꺾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꽃다발을 만드는 일은 정말 즐겁구나.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작은 꽃다발을 완성시키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너무 서둘렀는지 그만 발이 엇갈려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옷자락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니 저 멀리서 사람이 보였다.
그런데 낯익은 뒷모습이었다...
분명해...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할머니였다!
뛰어가려는데 한 쪽 발목이 아려왔다.
못 뛰겠어...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눈 깜짝할새 사라져버렸다.
절뚝절뚝 걸어오니 해가 질 때쯤에야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이 근처에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언젠가 다시 또 만나게 될 거야.
나는 확신을 안고 조금 엉망이 되어버린 꽃다발을 오라버니에게 전해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어떠신지요?"
"저는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계속 전갈을 보내오십니다. 참한 여성분을 만날 때마다 도련님과 맺어주고 싶어 하세요. 어르신의 마음을 조금 헤아려주세요."
오라버니 방문 밖으로 얘기가 세어 나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듣고 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또 혼인 얘기였다.
요즘 어르신은 오라버니를 얼른 혼인시키고 싶어 했다.
왜 그토록 서두르시는 걸까?
기분이 가라앉은 채 방으로 돌아왔고 손에 들린 꽃다발은 그 사이 시들어버린 듯했다.
밤이 깊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불도 끄지 않은 채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오라버니의 혼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오라버니가 다른 여자랑 혼인해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그때 나는 어떡하지?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무르지 못 하겠지?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뒤숭숭한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가에 비친 그림자를 보아하니 오라버니였다!
"다행히 안 자고 있었구나. 자는데 깨우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어."
깊은 밤하늘 아래 서있는 오라버니를 보니 웃음이 세어 나왔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우리는 나란히 근처 밤바다를 거닐었다.
쏴아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바닥에 발자국을 찍었다.
"너도 알고 있지? 요즘 아버지가 혼인 얘기를 자주 꺼내셔."
역시나 오라버니도 그 문제 때문에 요즘 고민이 많은 듯했다.
"네... 오라버니가 거절해도 어르신이 자꾸 다시 꺼내시는 걸 보면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요?"
"연세도 있으시니 빨리 손주가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자식이라곤 오라버니 한 분뿐이니 더욱 재촉하시는군요."
나는 구슬피 대답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안될 것 같았다.
어르신은 오라버니에게 나를 추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뿐인 자식을 몸종과 혼인시키고 싶은 부모가 어딨을까?
"헌데 나는 혼인이라는 걸 하고 싶지가 않구나."
오라버니니의 말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그의 얼굴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 어머니랑 아버지는 서로 사랑해서 혼인한 게 아니야. 어른들의 뜻으로 어쩔 수 없이 만난 거지.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어머니는 나를 낳고 도망가셨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머니는 바로 도망가지 않으셨어. 날 몇 년 키우다가 이 정도면 당신이 필요 없겠지 생각하고 떠나신 모양이야. 하지만 난 여전히 어머니가 필요했는데... 그리고 어머니가 떠나고 몇 달 후 난 괴한들에게 유괴를 당했어. 어릴 적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해. 정말로 무서웠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어머니가 날 찾으시는 걸까? 내심 바랬어. 그래서 나는 그들을 어머니가 보낸 자라고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자들이 날 발견해서 구출해내고 집으로 데려왔을 때 난 오히려 아버지께 화를 냈어. 어머니한테 갈 수 있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나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히 난 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았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반항을 했어. 그때는 굉장히 난폭적으로 행동했어. 누군가 다가오면 다가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방어했어. 그리고 날 지금의 이 모습으로 만들어준 건... 진 형이야. 형도 어렸었는데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었지. 그리고 형이 그렇게 돼버린 건 모두 내 탓이야..."
괴로워하는 오라버니가 넘실넘실 대는 저 파도와 하나가 되어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오라버니의 팔을 붙잡았다.
"고마워요. 날 믿고 꺼내기 힘든 얘기를 먼저 해줘서."
"나는 그래서 혼인하기 싫은 거야. 나 같은 아이가 또 생길까 봐. 무책임하게 날 낳아둔 부모님이 정말로 미웠어."
오라버니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도 울고 있었다.
내 눈에는 오라버니가 아픔을 겪었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나는 그 어린아이를 꼬옥 껴안아주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면 돼요. 그러면 그 자식들은 행복할 거예요."
그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왠지 모르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요즘엔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다.
먼 훗날, 오라버니 곁에 있는 나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