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변하지 않았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1)
패도(覇刀)의 길은 곧 수라의 길.
그래서 혼이 없다.
“흑수라(黑修羅)를 잡을 비책을 알려주십시오.”
“놈을 잡을 비책 따위는 없다. 허나 놈에게서 살아남을 방법은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놈이 칼을 뽑으면 일 장 밖으로 물러나고, 칼이 아니라 두 자루의 철곤을 쥐면 삼 장 밖으로 물러나면 된다.”
“철곤의 길이가 더 깁니까?”
“철곤이 칼보다 빠르다. 병기가 빠르다는 건 몸의 움직임 역시 빨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니 놈보다 빠르지 않다면 삼 장 밖으로 물러나야 한다. 만약 놈이 철곤과 칼을 하나로 결합하면 오 장 밖으로 물러나는 게 좋다. 잊지 마라. 오 장이다.”
“그건 싸우지 말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럴 바에는 놈이 무기를 뽑지 못하도록 하는 게 낫겠습니다.”
“멍청한 놈, 놈이 병기를 손에서 놓았을 때가 가장 무섭다는 것도 모르느냐? 놈이 병기를 뽑지 않고 달려든다는 건 살의가 극에 달했다는 뜻이다. 그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
“하면······, 놈을 잡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원로원의 봉공들을 움직이면 되겠지.”
“그럴 수 있다면 제가 고민하고 있겠습니까?”
“하긴 돈과 권력에 찌든 늙은이들이 뭐가 좋다고 나설까,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게 뭡니까?”
“한 손이 열 손을 감당 못하는 법이다.”
“숫자로 밀어붙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잊으셨습니까? 흑영대(黑影隊)가 함정에 빠져 전멸할 위기에 처했을 때 놈이 혼자 혈로를 뚫었다는 거 말입니다. 당시 사도천(邪道天)의 혈전대(血戰隊) 일백이 놈 하나를 감당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벌써 일 년 전의 일입니다.”
“멍청한 놈! 백이 부족하면 이백을, 이백도 부족하면 오백을 데려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놈이 맹을 떠난 이상 스스로 사지(死地)로 뛰어든 꼴이 아니냐. 놈에게 칼을 가는 곳이 어디 한두 곳이냔 말이다.”
“아,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천하영웅 맹 감찰부의 특임감찰 소면검(笑面劍)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가조양은 귀도림(鬼刀林)의 소림주다.
다혈질적인 성격에 곧잘 패악을 부리곤 하지만, 튼튼한 배경 덕분에 사람들이 제법 따르는 편이다.
그게 진심어린 충정이 아님을 가조양 본인도 잘 알고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권력과 금력을 추종하기 마련이니까.
지금 가조양은 수하들과 함께 십전철가를 방문한 후 귀도림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눈앞의 구릉에 올라서면 멀리 귀도림이 보인다. 대나무 숲이 울창한 가운데 몸을 잔뜩 웅크린 대호(大虎)처럼 보이는 곳이다.
어쩌면 귀호림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가조양은 웃었다.
소리가 없을 뿐이지, 절세신병이라도 얻은 양 그렇게 웃었다. 미친놈이 아닌 이상 그가 이렇게 웃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십전철가에서는 귀도림이 원하는 가격에 병기들을 만들어 주기로 약조했다. 품속에는 그 계약서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기뻐하는 게 아니다. 십전철가와의 계약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토록 기분이 좋은 것은 간만에 그녀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화옥.
십전철가의 무남독녀로 이곳 광주(廣州)에서 손꼽히는 미녀다. 어쩌면 광동성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모른다.
‘철화옥 넌 내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크흐흐!’
양쪽으로 쭉 찢어진 입 꼬리가 제자리를 찾을 줄을 몰랐다. 보보마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뚝뚝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대소를 터트릴 것 같다.
헌데 귀도림에 당도할 때까지 계속 웃을 것 같던 가조양이 갑자기 미소를 거두었다. 반대편에서 낯선 사내가 구릉을 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웬 놈이지?’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가조양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알지 않는 한은 언제 어디서든 낯선 얼굴을 만날 수 있는 법이다. 가조양 역시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낯선 이들을 보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디의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이곳을 지나가는 이유가 궁금해 길을 막고 물어본다.
구릉을 넘어서면 귀도림에 가깝다.
그 때문이다.
귀도림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낯선 자들은 감히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로 여겼다. 그래서 길을 막고 자신을 과시했다.
가조양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구릉 너머로 낯선 사내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묵빛 장포가 나붓거린다.
‘낭인인가?’
장포는 누구나 걸칠 수 있다. 허나 저처럼 멋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칠흑 같은 장포는 뜨내기 낭인들이 주로 걸친다.
좀 더 가까워지자 사내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먼저 이마의 묵건(墨巾)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무런 치장이 없는 그냥 묵빛 천이다.
저 정도면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다보니 그냥 묵빛 천 쪼가리를 동여맨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묵건은 유별스럽게 보인다.
웬만한 낭인들도 저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위아래로 온통 흑색 일색이면 자칫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비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무인들의 시비는 결국 칼부림으로 귀결되는 법, 타지에서 저런 복장을 하고 다니다간 칼침 맞기 십상이다.
‘재밌군.’
가조양은 저 유별난 사내에게 흥미가 생겼다.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처럼 입 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걸음을 멈춘 가조양은 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높고 푸르다.
몇 점 구름만이 둥실 흘러간다.
‘좋군.’
정말 기분 좋았다.
철화옥을 보았고, 간만에 몸을 풀 수도 있을 것 같다.
고개를 내려 전방의 낯선 사내를 바라봤다.
순간, 가조양의 표정이 변했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 뭐야······.’
단지 몇 걸음 더 가까워졌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유유하고 평온하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싸늘한 기운이 송곳처럼 찔러댄다.
그걸 느낀 순간, 손이 꿈틀거렸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자꾸만 칼자루를 잡으려 한다. 무인이니 칼을 뽑는다 한들 이상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의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진창에 빠진 듯하다.
무언가가 단단히 옭아매 강하게 끌어당긴다.
뿌리칠 수가 없다.
‘저놈이?’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기운 때문이다. 사내의 기운에 자신이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허나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그 와중에도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가조양은 숨을 죽이고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각진 얼굴이라 그런지 사내다워 보인다.
얼굴 한쪽에 붉은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다. 분명 검상이다.
피와 죽음을 거친 자일 게다.
사내의 눈.
거친 야수의 그것처럼 냉혹해 보인다.
여차하면 사납게 물어뜯을 것 같다.
‘무슨 놈의 눈빛이······.’
생각을 접어야 했다.
너무 가깝다.
가조양은 슬쩍 한 걸음 비켜서고야 말았다. 결국 낯선 사내의 앞을 막지 못했다.
자존심 같은 것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두 다리가 스스로 움직여 버렸다.
“여전하군!”
흠칫!
사내의 굵은 목소리에 가조양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땅! 땅! 땅! 땅!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
십전철가 안으로 들어선 철혼은 십여 년 만에 들어보는 소리에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십니까?”
시선을 돌려보니 웃통을 벗고 있는 장한이 흠칫 놀란다. 눈빛에 위축된 모습이다.
처음 보는 얼굴인 것을 보니 철혼이 이곳을 떠난 후에 들어온 모양이다.
철혼은 눈빛을 죽이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을 뵙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약속을 하셨습니까?”
묻는 장한의 태도가 조심스럽다. 그나마 조금 전처럼 위축된 모습은 아니다.
“아는 분이라 인사나 드릴까 합니다.”
인사는 누구나 한다.
살수들도 인사하러 왔다며 목을 베어가곤 한다. 좀 전에 잠깐 보았던 눈빛이라면 그리 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한의 시선이 철혼의 위아래를 살핀다.
‘낭인 복장인데······ 살수가 위장한 건가? 아니지, 굳이 낭인으로 위장하고 올 이유가 없잖아? 이곳에 무공을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럼 진짜 낭인이라는 건데, 왜 왔을까?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지나가다 푼돈이라도 얻어 보려고 그러는 건가?’
장한의 고민이 길어졌다.
그러나 장한이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주와 아는 사이라고 하니 내칠 수가 없다.
“이름이나 알려주십시오. 안에 여쭙겠습니다.”
“철혼이라고 합니다.”
당당히 이름을 밝히는 게 정말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장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예.”
철혼은 고개를 끄덕였고, 장한은 한 번 더 경계심을 내비친 후 가주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오십 줄의 중노인이 맨발로 달려왔다.
웃는 눈매에 둥글납작한 코, 볼에는 살집이 가득했고 귓불이 두툼하니 늘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후덕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 초로인.
그가 바로 십전철가의 가주 철중양이다.
철중양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는 철혼을 바라보았다. 가타부타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답답한 공기가 두 사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철혼은 침묵에 동화된 듯 미동조차 없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말수가 적고, 입이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굳은 듯 다물어져 있던 철중양의 입이 벌어졌다.
“난 네 녀석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철혼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검상이 자못 험악해 보인다. 어떤 길을 걸었을지 능히 짐작 되었다.
철중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자신이 만들어준 상처일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곳에서 내보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살려야했으니까.
하지만······.
철중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 방법 밖에 없었을까?’
답이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때의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자신이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각오를 하고 온 것이냐?”
“각오는 제 몫이 아니라 가주님 몫입니다. 피와 죽음이 이곳을 뒤덮을지도 모릅니다. 가주님께서는 진정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되묻는 철혼의 얼굴이 차갑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니라면 어찌하겠느냐?”
“······.”
말이 없다는 것은 부정이다. 자신과 상관없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읽을 수 있다.
“변했구나!”
“변하지 않았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철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횡액을 당하고도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네놈이 이렇게 돌아왔다는 건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 터, 믿어도 되겠느냐?”
철중양의 물음에 철혼이 미소를 지었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미소다. 그래서 섬뜩하도록 차가워 보인다.
철혼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철중양이 그것을 내려다봤다.
“이건?”
철중양의 두 눈이 커졌다.
철혼이 내민 것은 철중양이 귀도림의 망나니와 오늘 작성한 계약서였다.
***
“여깁니다.”
장한이 안내해 준 곳은 십여 년 전에 철혼이 머물던 방이었다.
서문노인과 칠 년을 함께 보낸 곳이다.
철혼은 방문을 말없이 바라봤다.
문을 열어도 서문노인을 만날 수는 없다. 세월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철혼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쾨쾨한 공기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 속에 서문노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여기저기 서문노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십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 좁은 방안에서 서문노인과 생활했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다.
전장의 살기가 송두리째 잠식해 버린 몸이지만, 서문노인과 관계한 기억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더불어 모든 걸 앗아가 버린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잊고 있겠지?”
평온에 젖은 자들은 잊기 마련이다.
가해자라면 특히 그런 법이다.
“잊었다면 생각나도록 만들어 주마!”
차갑게 중얼거린 철혼은 곧 밖으로 나갔다.
서문공위지묘(西門工位之墓).
십전철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보잘것없는 작은 묘가 있었다. 철혼을 키우다시피 한 서문 노인의 묘다.
철혼은 십 년 만에 절을 올렸다.
절이 끝나자 탁주를 꺼내 묘에다 조금씩 부어 주었다. 주향이 가슴을 진탕시켰다.
철혼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몇 모금 남은 술이 그의 목구멍 저편으로 넘어갔다.
“나무라지 마십시오. 술은 함께 마셔야 제 맛이라고 하셨잖습니까.”
휙!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졌다. 수풀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누군가에게 발견될 때까지 제 모습을 잃지 않는다면 또다시 술을 품을 수 있을 게다.
철혼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묘에서 풍겨온 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입에 침이 고였다. 풀잎을 뜯어 잘근 씹는 것으로 주귀(酒鬼)를 억눌렀다.
운명이라는 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한때는 두려웠다. 참혹한 현실이 두려워 도망치고자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제는 가소로울 뿐이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줄까? 후후후!”
바람이 부는 것인가? 나직한 웃음에 대기가 출렁이는 착각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