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돈 받으러 왔습니다 (1)
“그놈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그놈?”
“십전철가의 아이 말입니다.”
“십전철가라면······ 서문노인의 그 아이 말인가?”
“예.”
“무공은?”
“칼을 가지고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상당한 모양입니다.”
“서문노인의 도법을 제대로 익혔다면 그럴 테지.”
“어찌 할까요?”
“시험해보라고 하게.”
“시험이라면?”
“몇 놈 보내서 건드려보라는 것이네. 별 거 없으면 조용히 묻어버리고, 심상치 않다 싶으면 놔두라 이르게. 독 오른 놈이 실력까지 갖췄다면 조심해야 하는 법, 그런 놈은 제대로 함정을 파서 잡아야 하네. 서문노인처럼 말이네.”
“알겠습니다.”
***
“오빠!”
아침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요염해 보이는 붉은 입술과 우뚝 선 콧날 그리고 시선을 잡아끄는 새까만 눈동자.
화려해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가득했다.
‘화옥!’
어려서 십전철가로 오면서 처음으로 생긴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동생. 누구보다 예뻐해 주었고, 누구보다 지켜주고 싶은 여동생 철화옥이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한 것을 보니 자신이 돌아왔다는 말을 이제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음이 역력했다.
어렸을 때 헤어진데다 십여 년이 흘렀으니 어색할 만도 하건만, 얼굴을 뚫어져라 확인하더니 금세 집나간 오빠를 맞이하듯 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돌아온 거야? 돌아온 거지?”
“그래, 돌아왔다.”
철혼의 말에 기어코 눈물을 흘린 철화옥이 와락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단 말이야!”
울먹이는 철화옥.
철혼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 난 어른이 되면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
- 멍청아, 오빠한테 시집가는 동생이 어딨냐?
- 안 되는 거야?
- 당연하지.
여섯 살의 기억이다.
울음을 터트리던 그녀를 달래느라 서문노야의 쌈짓돈을 훔쳐 당과를 사주어야 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친누이처럼 생각했다.
누구보다 아껴주었고, 언제나 지켜주고 싶었다.
- 화옥아, 난 열일곱 살이 되면 호북성으로 갈 거다.
- 호북성?
- 응, 그곳에 영웅맹(英雄盟)이 있거든.
- 진짜 무인이 될 생각이야?
- 두고 봐.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서문노야의 무공이 최고라는 걸 세상에 알려줄 거다.
열셋의 나이.
몹시 불안한 표정을 짓는 철화옥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 오빠, 죽지 마. 꼭꼭 숨어서 살아.
- 반드시 돌아올 거야. 돌아와서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 오지 마. 오면 오빠도 죽어.
- 안 죽어! 안 죽을 테니까, 두고 봐!
십전철가를 떠나던 날.
그날의 기억은 꿈으로 자주 떠올리곤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꺼지지 않는 복수심과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집념 덕분이었다.
“얼굴이 이게 뭐냐, 칠칠치 못하게······.”
“험악하니?”
“응. 그럭저럭 봐줄 만 한 얼굴이······ 괜찮아. 오빠니까 괜찮다고 봐 줄게!”
낯설을 것이다. 차가울 것이다.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상당히 험악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굴며 어색하지 않게 해준다.
생각보다 활달하고, 마음이 따뜻하게 성장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마음이 놓인다.
지금의 어려움만 거둬주면 밝게 살아갈 것이다.
“오빠, 밥 먹어야지?”
“그래. 같이 먹자.”
“아냐, 난······ 그것보다 바빠? 아, 바쁘겠지.”
철화옥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철혼이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너랑 함께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
“정말?”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자국이 선명해서 묘한 느낌이다.
“시간 많이 안 뺏을게.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그래. 나도 궁금하다.”
“밥 먹고 와. 내 방에서 기다릴게.”
그러고는 잠깐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등을 돌리고 간다. 저만큼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고, 또 저만큼 가다 돌아본다.
‘녀석!’
잠시 후, 철혼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 바라봤다.
시선마다 경계의 빛이 완연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다.
철화옥 덕분에 따스해졌던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십여 년의 간극이 이리도 컸던가?
서문노야의 발자취가 저들에겐 십 년의 값어치도 안 된단 말인가?
‘누굴 위해 그리 하신 겁니까?’
철혼은 서문노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머릿속의 서문노인은 그저 웃어줄 뿐이다.
포근하고 따뜻한 미소다. 하지만 자신한테만 지어주는 미소가 아니기에 더욱 부아가 치민다. 식당 안의 모두에게 그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
저들도 그리 여겼을까?
“뭐해? 왔으면 자리에 앉지 않고?”
왕노인의 호통이다. 변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
사람들과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니 왕노인이 밥과 찬을 잔뜩 담아서 가져왔다.
“남기지 말고 전부 처먹어! 큰일 하려면 배가 든든해야 하는 법이다.”
“잘 먹겠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원래 소식하는 편이지만, 조금도 남기고 싶지 않다.
입 안에 한가득 떠 넣고, 적들의 생살을 씹듯 으적으적 씹어댔다.
치미는 부아를 그렇게 풀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풀어질 리가 없다. 그렇다고 고함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으니, 보아도 못 본 척 꾹 눌러 참을 수밖에.
한동안 음식을 씹어대는 소리만이 들렸다.
지금 할 일은 먹는 것뿐이라는 듯 열심히 먹었다.
그러나 왕노인이 가져다 준 양이 상당히 많았고, 대충 씹는 철혼이 아니었기에 먹는데 시간이 걸렸다.
“서문노인은 이곳 광동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 넌 어떠냐?”
그런 고수임에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뜻이고, 서문노야보다 더 강하냐고 묻는 것이다.
철혼은 마지막 숟가락까지 깨끗이 먹어치운 후 왕노인을 똑바로 쳐다봤다.
“밥값은 할 겁니다.”
“충분히?”
“예. 충분히.”
“알겠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만 해라. 사람 고기 빼고 뭐든 잡아주마!”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노인이 가져다 준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식당 안의 사람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진즉 먹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다 처먹었으며 나가서 일하지 않고!”
왕노인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왕노인이 무소불위의 지배자였다.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식당 안이 텅 비자 철혼은 왕노인을 바라봤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 저녁은 꼭 이곳에서 먹어라. 네놈 주려고 십 년 전에 담가둔 술이 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십 년 전에 담가두었다는 말에 가슴이 울렸다.
허나 감사하는 표현을 달가워할 왕노인이 아님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은 듯 식당 밖으로 나갔다.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건장한 장한이 식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처음 본 장한이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집무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철혼은 곧 철중양을 찾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철중양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고뇌를 혼자 짊어진 얼굴이었다.
“화옥이는 만나보았느냐?”
“잘 컸더군요. 감사합니다.”
“내 딸이다.”
“제 동생이기도 합니다.”
“다른 마음은 없고?”
“······?”
“네가 원한다면 둘이 광주를 떠나 살 수 있게 해주마.”
“화옥이는 제 동생입니다.”
“복수 때문이냐?”
“제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어렸을 때 이제부터 화옥이가 네 동생이라고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하냐?”
철중양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갔다.
허나 고개를 숙인 철혼은 보지 못했다.
잠깐 동안 서먹한 기운이 흘렀다.
철중양은 아쉬운 눈길로 철혼을 응시하다 이내 마음을 잡았는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철중양의 얼굴에 염려의 빛이 떠올랐다.
철혼이 어떻게 할지 모르니 더욱 불안해진 것이다.
혹여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아닌지, 그랬다가 서문노인의 전철을 밟는 건 아닌지 몹시 걱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마. 할 수 있겠느냐?”
“제가 돌아왔습니다. 무엇을 묻고자 하십니까?”
한다고 했으면 하고야 마는 고집불통 같은 성격임을 잘 알지 않느냐는 뜻이다.
“그들은 과거보다 배는 더 무서워졌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서문노야를 그렇게 만든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는 정도로는······.”
소리치던 철중양은 불길이 이는 듯 일렁이는 철혼의 눈빛에 말을 잇지 못하고 안으로 삼켜야했다.
“부담스러우시면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그럼 나가거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철중양.
철혼은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철중양이 무언가를 탁자위로 내던졌다.
철혼이 바라보니 그건 한 권의 얇은 서책이었다.
“저들이 체불한 내역을 기록해 두었다. 한 푼도 남김없이 모조리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가져가거라.”
철중양의 각오다.
나가라고 한 말은 그냥 해본 말이다. 그 대신 확실하게 할 자신이 있거든 가져가라고 말하고 있다.
철혼은 철중양을 바라보다 조심스런 손길로 서책을 집어 들었다.
“언제 시작하려느냐?”
“오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알겠다.”
그것으로 두 사람간의 대화가 끝났다.
철혼은 정중히 포권한 후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철혼은 약속대로 철화옥을 찾아갔다.
“밥은?”
“먹었다.”
“많이 먹었어?”
“왕노인께서 많이 주셔서······.”
“어디 봐.”
다짜고짜 철혼의 배를 매만지는 철화옥.
꽉 들어찬 철혼의 배를 만져보더니 장난스레 웃는다.
“얼굴만 아니라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네.”
“사내 낯짝은 잘 생겨봐야 쓸모없다.”
“이왕이면 잘 생긴 게 좋지.”
“얼굴값 하느라 바람피우면 어떡하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잖아?”
“꽃이 있으면 벌과 나비들이 날아들 듯, 잘생긴 사내에겐 여인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아흔아홉 번을 참아도 한 번을 참지 못하면 그게 바로 통정이고, 바람이 된다.”
“그럼 못생긴 사내하고 살라는 거야?”
“사내다운 놈하고 살면 된다. 내가 그런 놈을 찾아주마.”
“피이! 시집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헛수고 마세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그건 그렇고 저건 뭐냐?”
철혼이 가리킨 곳에 큼지막한 광주리가 있었다.
냄새로 보아 아침식사거리로 몇 가지 요리가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내 아침이야.”
십 인분은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 같은 광주리를 보며 철화옥이 씩 웃었다.
반 시진 후, 철화옥이 철혼을 데려간 곳은 광주 외곽에 위치한 빈민가였다.
움막집과 판잣집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 중심지에 제법 널찍한 공터가 있었고, 공터 한 쪽에 마치 이곳 빈민가의 회관이라도 되는 양 큼지막한 판잣집이 지어져 있었다.
“누나!”
“우엥! 화옥 언니다! 소진이 너 언니한테 이른다고 했지? 언니!”
철화옥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철화옥은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맞았다.
“모두 잘 잤니? 진아는 소진이가 또 장난 쳤구나? 비아는 또 세수 안 했지? 얼른 갔다 와. 안 그럼 아침 안 줄 거야.”
“씨이!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알았어. 오빠, 그거 이리 줘.”
철혼이 광주리를 내밀자 제법 묵직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받아드는 철화옥.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철혼에게 기다리라고 한 철화옥은 한 손으로는 큼지막한 광주리를 든 채 다른 손으로는 가장 어려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공터의 양지바른 곳으로 향했다.
그런 철화옥을 아이들이 치맛자락을 잡아가며 우르르 따라갔다.
“오빠라고 하는 걸 보니 십 년 만에 돌아오신 분이로군요.”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철혼이 돌아보니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여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합장하고 있었다.
철혼은 공손히 포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