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돈 받으러 왔습니다 (3)
무인이 아니라고 배척받는 흑도인들이지만, 어쨌든 근본은 무인이다. 그들은 철혼이 강자임을 알아보았다.
자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거늘 어찌 몰라볼까.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지럽고 급박한 발소리.
다시 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혼의 무심한 시선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꽂혔다.
비쩍 마른 몸에 팔 길이가 조금 길어 보이는 장한이다. 철마방에서 중간쯤 가는 자일 게다.
철혼의 판단은 정확했다.
여무일은 철마방 총관의 직속 부하다.
가끔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떠돌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가 나서서 해결한다.
물론 입이 아닌 칼로 해결한다.
그만큼 칼 솜씨가 날카롭다.
그런 여무일이 흠칫 긴장했다.
보자마자 자신이 수장임을 알아보았고, 이쪽의 숫자가 열을 넘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여유마저 느껴진다.
숫자로 상대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무일입니다.”
여무일이 먼저 머리를 숙인다.
범상치 않은 자의 등장이다.
마방 안쪽에서 몰래 지켜보던 자가 자리에서 슬쩍 사라졌다.
철혼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우위에 선 자는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말이 많을 필요도 없다. 그저 필요한 말만 툭 내던지면 족하다.
“안내하지?”
“······!”
철혼은 나이로 치면 분명 어린놈이다.
뺨에 험악하게 달라붙은 흉터만으로는 이십 대 초반의 나이를 가리지 못한다.
여무일은 알면서도 저자세를 풀지 못했다.
“별호라도 알려주셔야 안에다 기별을······.”
“지금쯤 기별이 닿았을 텐데?”
철혼의 말에 여무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가늠해 본다.
불행하게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숨이 막히도록 엄청난 기도는 아니지만 선뜻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불길함이 잔뜩 풍겨온다.
조심하라고, 함부로 상대하지 말라는 머릿속의 경종이 울린다.
이럴 때는 본능을 따르는 게 만수무강의 지름길이다.
그럼에도 잠시 대치한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안에서 준비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끄는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다.
하지만 촌각이 여삼추 같다. 등골이 서늘하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여무일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철혼은 말없이 여무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앞마당에 삼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숫자가 진을 치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옅은 웃음을 흘리고 있다. 흡사 부처님처럼 인자해 보이는 미소다.
철마방의 총관인 흑살필(黑殺筆) 원적기란 자다.
얼굴은 부처의 형상이지만, 그 얼굴로 피 보기를 서슴지 않는 포악한 자다.
병기는 큼지막한 붓이다. 허나 형상만 붓일뿐 철로 만들어져 있다.
철혼은 그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많은 눈들이 사나운 기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철혼은 원적기와 오 장을 격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 장의 간격.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원적기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철혼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다.
철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의 주인입니까?”
“방주께선 아무나 만나줄 정도로 한가한 분이 아니시다.”
“총관쯤 됩니까?”
“목적은?”
되물을 뿐 부정하지 않는다.
철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이면 충분했다. 굳이 방주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터, 잠깐의 여유를 두고 철혼이 툭 내뱉었다.
“돈 받으러왔습니다.”
“······!”
원적기의 고개가 갸웃해진다.
난데없이 찾아와서는 돈을 받으러 왔단다.
얼마 전에 상반기 상납금을 빠짐없이 보냈다. 혹시나 빠진 곳이 있나 떠올려보지만, 그럴 리가 없다.
원적기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말투를 바꾸어 물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원적기가 조심스레 묻는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철혼의 대답에 얼굴을 확 일그러트린다.
“십전철가입니다.”
“뭐?”
원적기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분노가 한 겹 씌워졌다.
철혼은 원적기의 분노를 읽었다.
한낱 대장장이라며 속으로 욕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대장장이들이 보내서 왔다는 생각에 우습게 보일 터였다.
철혼은 원적기의 얼굴에서 그런 조롱을 읽을 수 있었다.
협상은 결렬됐다.
애초부터 협상일 것도 없었다.
철혼은 장포 안쪽의 도병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냈다.
차가운 조소가 피를 부르는 신호탄이 되었다.
“죽여라.”
원적기가 명을 내렸다.
굳이 살려줄 필요가 없다.
십전철가의 가주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를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단단히 실수했다.
이 자는 죽을 것이고, 십전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광주 땅의 불문율이다.
원적기의 분노가 터지자 삼십여 명이 철혼을 향해 주린 이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순간, 철혼의 두 발이 움직였다.
“엇!”
맨 앞쪽에서 달려들던 자들이 헛숨을 들이키며 걸음을 멈추었다.
한줄기 바람이 부는 것 같더니 철혼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진 때문이다.
퍽퍽!
몇 번의 둔탁한 격타음이 들리더니, 철혼의 그림자가 달려들던 자들의 사이사이를 순식간에 관통했다.
촌음의 순간에 마치 섬전처럼 지나가버렸다.
모두들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철혼은 그들의 뒤쪽에 있었다. 정확히는 원적기의 바로 앞이었다.
“······!”
원적기는 목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차가운 감촉에 숨 한 번 크게 내쉬지 못했다.
철혼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가져갔으면 대금을 지불해야지. 안 그래?”
원적기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고수다. 자신은 철필을 꺼내지도 못했다. 물론 방심한 탓이긴 하지만, 철필을 뽑았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이만한 실력이 있으니 이리 찾아왔겠지. 십전철가주가 상당한 돈을 들인 칼잡이가 분명하다.
그러니 말로만 하는 협박 같은 게 통할 리 없다.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
원적기는 조금이라도 더 크게 끄덕였다간 목이 댕겅 잘릴 것 같은 두려움을 억누르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혼이 칼을 거두자 원적기는 수하를 보내 돈을 가져오게 했다.
방주의 추궁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았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고 볼 일이다.
잠시 후 수하가 양손에 전표들을 나눠 쥔 채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원적기는 전표를 받아 철혼에게 건넸다.
“앞으로는 제대로 거래하도록 해. 그러면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거야.”
철혼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묵빛 장포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감히······ 감히!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원적기의 눈에 살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 식경 정도 걸렸다.
십전철가에서 철마방까지의 거리다.
외곽에 위치한 귀도림은 반 시진 정도다. 귀도림과 철마방 간의 거리는 한 시진이 조금 미치지 못한다.
십전철가가 삼각형 형태를 그리며 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백룡보(白龍堡)도 한 식경, 풍림당(風林堂) 역시 한 식경에 가깝다. 천리표국(千里鏢局)은 반대편이라 다소 멀다. 반 시진이다.
등룡곡(登龍谷)은 작은 산을 넘어야 한다.
바다로 나가는 뱃길도 있다.
머릿속으로 거리를 재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곳 광주(廣州)의 길이란 길은 죄다 머릿속에 들어있다. 때문에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 그려준 그림이다. 조만간 그 그림을 따라서 피가 흐를 것이다.
얼마나 흐를지는 자신이 아닌 저들의 선택에 달렸다.
철그럭! 철그럭!
철혼은 걸음을 옮겼다.
다음 대상인 백룡보를 향해서였다.
***
채방은 귀도림의 지낭이다.
학식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눈치가 비상하고 잔꾀에 밝다.
그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움직인다. 이리저리 두 번, 세 번 재보고 움직여야 할 때라 여겨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움직인다.
또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가 직접 나설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채방이 가조양을 따라서 귀도문을 나섰다.
소림주인 가조양이 낯선 외인을 만나 사나운 꼴을 당했다.
당사자인 가조양과 귀도림의 수장이자 가조양의 부친인 가득천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채방은 내심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리 직접 나선 이유는 괴한이 십전철가에 여장을 풀었다는 보고 때문이다.
가조양과 이십여 명의 수하들을 혼절시킨 고수가 계약서를 빼앗아서 십전철가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가조양의 말로는 분명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했다.
가조양을 알아보는 과거, 그리고 십전철가.
채방은 어렵지 않게 한 소년을 떠 올릴 수 있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때 죽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었는데······ 헌데 왜 소림주를 죽이지 않았을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당시에 십전철가의 노인을 죽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손을 모아야 했다.
한낱 대장장이 따위가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결국 전신이 낭자되어 죽었다.
당시 노인의 처참한 죽음이 눈에 선했다.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만나자마자 부딪쳤고, 십전철가로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과거를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았을까?
혹시 그가 아닌 것인가?
채방은 직접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얼굴을 보아야 무언가 하나라도 확실해질 것이다.
가조양을 따라 십전철가로 향한 이유였다.
***
백룡보 보주는 단혼수(斷魂手) 백문초란 자다.
단혼(斷魂)이니 혼을 끊어버리는 무공.
문득 궁금하다. 그 손으로 서문노야의 어느 곳을 끊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흘리게 했는지가 무척 궁금하다.
‘단혼이라…….’
멀리 백룡보가 보였다.
철혼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단혼이라는 두 글자를 질근 씹었다.
뜨거운 기운이 폭발하듯 발산했다.
대기가 이글거렸다. 삼 장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던 행인들이 화들짝 놀란다.
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철혼은 걸음을 멈추었다. 백룡보라는 세 글자 바로 앞이었다.
“······.”
철마방에서와 마찬가지다.
철혼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을 뿐이다. 헌데 알아보지 못한다. 여무일처럼 눈치 빠른 자가 자리에 없는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철혼이······.”
자신을 알아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약간 휘어진 콧등, 사마귀······.
오른쪽 눈썹 끝에 붙어있는 사마귀.
‘마일중!’
어렸을 적 가끔씩 어울리던 세 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머릿속을 뒤지자 어렵지 않게 해답이 나왔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일했었다. 대물림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테니까.
그는 철혼을 알아봤다.
많이 변했음에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철혼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고개를 숙이고 만다.
서문노인의 죽음과 관계된 곳에 소속된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삶의 무게를 감당 못해서 그렇지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뭣들 하는 게냐? 손님이 오셨으면 안으로 모시지 않고.”
거침없는 호통.
내려다보는 자의 것이다.
철혼은 천천히 돌아섰다.
짙푸른 청의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보였다.
백문초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염라수(閻羅手)와 섬전수(閃電手)가 바로 그들이다.
둘째인 섬전수 백이는 호리호리한 체형이라고 했다. 청의 청년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염라수 백우로군.’
철혼의 추측은 정확했다.
청의 청년은 염라수 백우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옅은 갈색 피부를 가진 소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철혼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