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두 번은 없다는 걸 알아야지 (1)
백우가 다가왔다.
그는 최소한의 경계심으로 철혼을 살폈다.
‘보통이 아니다!’
얼굴의 검상,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투기를 자극하고 있다. 거친 길을 걸어온 자가 틀림없다.
백우는 철혼의 존재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나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백우가 생각하기에 철혼은 손을 잡으면 큰 힘이 되어줄 자다. 하여 스스럼없이 대하며 안으로 안내했다.
철혼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볼일이 있어 왔으니까. 철혼은 잠자코 따랐다.
한쪽에서 지켜보던 마일중만이 안절부절 할 뿐이었다.
정문을 넘어서자 너른 앞마당이 그들을 맞았다. 분주히 오가던 일꾼들이 백우를 알아보고 넙죽 허리를 숙였다.
몇몇의 무인들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예의를 갖추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저렇게 한다는 건 그만큼 기강이 바로 서 있다는 걸 의미한다.
철혼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십니까?”
“보주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버님을?”
철혼은 고개만 끄덕였고, 백우의 얼굴에는 진한 의혹이 떠올랐다.
“이유가 뭡니까?”
“직접 말하겠습니다.”
백우는 철혼을 바라봤다.
철혼의 입은 꾹 다물어져 있다. 강제로 벌어지는 입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백룡보다. 지나친 경계는 소심해 보일 뿐이다.
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매, 내 거처로 가 있어. 내 아버님께 여쭙고 바로 그리로 갈게.”
“저도 여기서 기다릴게요. 보주님께 인사 여쭈어야지요.”
“그럼 나와 함께 가자.”
“호호호! 저만 손님인가요?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조금 망설이던 백우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총총히 사라졌다.
백우가 사라지자 란매라 불린 소녀가 철혼을 돌아봤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다.
혈루처럼 보이는 눈 밑의 칼자국과 그 만큼이나 험한 분위기가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는 무척이나 달라 보일 터.
“많이 아팠나요?”
귀를 자극하는 달짝지근한 음성.
여느 사내라면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빙글 돌아서서는 연방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허나 철혼은 고개를 돌려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바라보듯 무감정한 시선이다.
“그렇게 바라보면 내가 무안해지는데······.”
배시시 웃는다.
들꽃처럼 생기발랄하다.
좋다.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백룡보와 가까운 여인이다. 철혼의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
“직접 겪어 보면 알아.”
무뚝뚝한 한 마디. 그리고 진짜 칼을 뽑으려 한다.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소녀가 급히 손 사레를 쳤다.
철혼은 고개를 돌렸다.
“쳇! 이 예쁜 얼굴에 칼질할 생각을 하다니······.”
소녀의 투덜거림마저 귀에 착 감긴다.
그러나 철혼은 얼음장일 뿐이었다.
백룡보의 보주 단혼수 백문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룡보 정도의 무가라면 문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백우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까지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국엔 힘으로 밀고 들어왔을 것이다.
백우는 그의 부친인 백문초 대신 총관인 전추광을 데려왔다.
“그래, 보주님을 뵙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철혼은 대답만 했다. 포권 같은 예의는 갖추지 않았다.
전추광이 미간을 찌푸리며 백우를 돌아봤다. 전추광이 비록 총관이긴 하지만 보주인 백문초와는 의형제였다.
백우와 백이 두 형제 역시 예를 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백우가 주의를 주듯 말했다.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철혼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전추광을 바라볼 뿐이다. 그에 백우는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전추광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무슨 용무인가?”
“돈 받으러 왔습니다.”
전추광과 백우의 표정이 구겨졌다. 두 사람 뒤로 늘어서 있는 무인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지켜보는 소녀만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긴장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처럼 불길했다.
그때 철혼이 결정타를 날렸다.
“십전철가에서 돈 받으러 왔습니다.”
***
철혼은 풍림당으로 향했다.
묵빛 장포엔 군데군데 핏물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백룡보에서 피를 본 모양이다.
물론 철혼의 피는 아니다. 그 정도의 인간들에게 피를 흘릴 것 같았으면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철혼은 무심히 걸었다.
차가운 냉혈한의 걸음이 아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강자의 걸음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챌만한 고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잠시 후 풍림당에 도착했다.
한데 풍림당의 정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세 명의 무인이 철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혼은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정문 안쪽에 수십 명이 숨을 죽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확히 금 열 냥에 은 다섯 냥 반이다.”
당주 유가원이 전표를 내밀었다.
철혼은 말없이 전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차례 그들을 훑어보았다.
유가원과는 달리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손을 쓸 기세다.
슬쩍 건드리면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것 같다.
“거래라는 건 주고받는 것입니다.”
“뭐야?”
“이놈이 천지분간을 못하는구나!”
철혼의 말에 두 사람이 움직이려고 했다.
유가원이 손을 벌려 막았기에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을 뿐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받았으면, 그만 돌아가거라.”
유가원이 말했다.
눈빛에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럼에도 꾹 눌러 참고 있음이니, 인내심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한 모양이다.
“앞으로 외상은 물론이고, 터무니없는 가격에는 거래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철혼은 입가에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폭발할 것 같은 기세, 그러나 유가원을 비롯한 세 사람은 끝까지 참아냈다.
철혼은 피식 웃었다.
참고 있는 건 저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만 아니라면 저들의 목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단칼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목······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등을 돌린 철혼은 유유자적 걸어갔다.
예의 그 무심한 강자의 걸음이다. 역시나 유가원을 비롯한 세 사람은 그 걸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윽고 철혼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녀갔다는 것은 땅에 점점이 떨어져있는 핏방울이 알려주었다. 백룡보에서부터 이어져 온 핏방울이다.
유가원이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머릿속에 십 년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의 옆구리에는 커다란 자상이 있다.
서문노인에게 입은 상처다. 그 상처로 인해 궂은 날씨엔 욱신거려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왜 말리셨습니까? 설마 셋이서 놈 하나를 감당 못하겠습니까?”
사풍도(死風刀) 염당이다.
“맞습니다. 놈이 서문 늙은이의 진전을 이었다고 하더라도 예전의 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혈풍조(血風爪) 척가량이 이를 바드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유가원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들 실력에 못지않은 전 총관의 가슴이 베어졌다질 않은가. 함께 있던 염라수 그 아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전총관을 베고 목에 칼을 들이댈 정도로 빨랐다고 하니······. 오죽했으면 백 보주가 놈을 칠 생각을 않고 우리에게 연락을 취했겠는가? 십 년 전을 떠올린 게야. 연수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게지.”
유가원은 옆구리를 주물럭거리며 중얼거렸다.
철혼은 천리표국으로 향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십전철가로 방향을 틀었다.
생각보다 빨랐다.
천리표국에서나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상황이 풍림당에서 벌어졌다. 저들의 연계가 그만큼 끈끈하다는 증거다.
십 년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뭉친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달라지는 건 없다.
“단단할수록 충격이 크겠지!”
낮게 조소를 흘렸다.
웃음을 따라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잠시 후, 철혼은 십전철가로 돌아왔다.
한데 십전철가에 낯선 무인들이 가득했다. 들려오는 목소리와 파동치는 공기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철혼의 눈빛이 빛났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귀도림, 바로 그들일 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먹이를 찾는 이리 떼처럼 몰려왔을 것이다.
철혼은 천천히 다가갔다.
뒤쪽에 있던 귀도림의 무인들은 철혼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순간 소리와 기세조차 죽여 버리니 하급의 무인들이 어찌 알아차릴까. 옆에서 칼을 뽑고, 자신의 목을 잘라버릴 때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철혼과 그들의 무공 실력이 그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물론 저들은 그러한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또 보는군.”
갑작스런 철혼의 목소리에 귀도림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비켜! 비켜봐!”
가조양이 소리쳤고, 귀도림의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서 길을 열었다.
그 사이로 가조양과 철혼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개자식! 진짜 여기에 있었군. 뭐야? 철 가주가 노망이라도 난 거냐?”
가조양이 흥분하여 날뛰었다.
다혈질적인 성정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죽일 생각만 하느라 철혼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철혼은 피식 웃으며 십전철가의 정문을 넘었다.
눈빛을 반짝이고 있는 채방을 확인하고는 입가의 조소를 더욱 진하게 베어 물었다.
“꿇어! 당장 꿇지 않으면 두 다리를 자르고 눈알을 파버리겠다!”
가조양이 더욱 격분하여 소리쳤다.
십전철가의 정문을 넘어선 철혼은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꼈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라 가조양의 살심을 더욱 부추겼다.
물론 가조양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주기를 바라고 한 것이다.
‘음?’
돌연 채방이 인상을 썼다.
‘저놈이 서 있는 위치, 우연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교롭고 절묘한 위치다.
십전철가의 정문에서 한 발짝 안쪽이다. 절정고수가 칼부림을 일으키면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할 위치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지금 놈에게서 피 냄새가 난다.
시선을 돌리니 묵빛의 장포에 얼룩져 있는 핏물이 보인다.
채방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놈은 칼부림이 벌어지면 오십 가까이 되는 숫자를 모두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그 정도의 자신감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하다.
어설픈 자가 아니다. 몸에서는 포악한 살기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 기세와는 다르게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쉽게 움직이는 자가 아니야.’
놈을 상대할만한 숫자는 열이 채 되지 못한다.
자신과 소림주 그리고 몇 명이다. 놈은 그 숫자를 순식간에 짚어냈을 것이다.
경험과 안목, 놈은 상당한 고수임에 틀림없다.
이제 놈의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위험한 자다.
맹수처럼 조심히 상대해야 한다.
“뭐 하나만 물으려는데 말이야.”
채방은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가조양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다행하게도 가조양이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쉽게 흥분하고 주저 없이 행동할 뿐이다.
가조양도 상대가 강하다는 것쯤은 안다.
이미 한차례 겪어보지 않았는가. 상대가 갑작스럽게 손을 쓴 탓에 제대로 겨뤄보지도 못하고 당했다고는 하지만 전광석화 같은 그 움직임이 분명 고수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자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격분했다.
상대는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도 상대가 훨씬 더 강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화가 났다. 거기다 그 자가 십전철가에 머무른다. 어찌 분개하지 않을 것인가. 그녀와 한 솥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다.
가조양은 눈앞의 사내가 철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극도로 치민 분노 때문에 상대의 정체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채방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채방의 입장에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철혼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게다가 철혼의 정체를 알았을 때의 가조양을 채방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가조양이 물러섰다.
성난 황소처럼 날뛰려던 분기를 억누른 것이다.
채방은 그런 가조양에게 일부러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철 가주의 뜻인가?”
채방은 철 가주를 끌어들였다.
지금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 귀도림과 십전철가의 일임을 인식시켜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