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두 번은 없다는 걸 알아야지 (2)
철혼은 채방의 의사를 알았다.
채방의 말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철혼이 강하더라도 모두를 지켜줄 수 없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채방을 비롯하여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다하더라도 귀도림 전체를 죽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머리가 좋은 자다. 그리고 가조양을 움직일 수 있는 자다. 귀도림에서 중책을 맡고 있을 게다.
‘채방! 그래, 네가 채방이로군.’
철혼의 눈이 빛났다.
적을 상대할 때는 머리를 굴리는 자를 먼저 치는 게 좋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지금 눈앞의 채방이 그런 자다. 우선적으로 죽여야 할 자.
철혼이 팔짱을 풀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 순간이다.
금방이라도 칼이 휘둘러질 것 같은 분위기, 견디지 못하면 달려들고 만다.
그때였다.
채방이 한 걸음 움직였다.
가조양과 나란한 위치다. 그러면서도 가조양 보다는 철혼에게서 멀다. 철혼이 그를 죽이려면 먼저 가조양을 거쳐야 한다.
‘눈치가 빠르군.’
철혼은 피식 웃었다.
생각을 바꿨다. 주인보다 제 목숨을 챙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라면 잔꾀에 밝을 뿐이다.
“내 인사가 조금 과격했나 보군. 그렇다고 이리 몰려올 것 까지는 없었을 텐데.”
“아, 그 정도 일로 피를 볼 이유는 없지. 우린 다만 계약서를 가져간 게 철가주의 뜻인지 궁금해서 말이네.”
“계약서? 무슨 계약서를 말하는 거지?”
철혼은 되물었다.
굳이 능청을 떨 필요도 없다. 자신이 탈취한 건 저들도 알고 자신도 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따지려들지 않을 것이다.
“이 개자식! 분명히 네놈이 가져가지 않았더냐?”
가조양이 소릴 질렀다.
어수룩하지는 않지만 똑똑하지도 않다. 철혼은 그저 웃어줄 뿐이다.
채방이 다시 나섰다.
“소림주께서 착각하신 모양이오. 뭐, 세상엔 닮은 얼굴이 제법 많은 법이니까.”
가조양이 엉뚱한 발언을 하는 채방을 휘둥그레 돌아봤다.
채방은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며 달랬다. 그리고 다시 철혼을 바라봤다.
“이왕 온 김에 계약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채방이 돌아섰다. 때마침 철가주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철중양이 달라졌다.
채방은 한눈에 알아봤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처져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도전적인 기운이 가득했다.
‘좋지 않군.’
우려하던 바다. 그러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저 자를 믿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차차 알아봐주지.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말이야.’
채방의 입가에 조소가 매달렸다.
그것을 철중양이 보았다.
철중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잘 찾아왔군. 마침 가격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약서······.”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으면 싶네.”
철중양이 채방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채방을 똑바로 응시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물론 그 계약서를 들이댄다면 그대로 해줄 것이네. 불공평하더라도 계약은 계약이니까.”
가조양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채방을 돌아봤다.
채방의 얼굴이 굳어 있다. 자신의 귀가 잘못 된 게 아니다.
“이 무슨 개 같은…….”
가조양이 성질을 폭발시켰다.
그때 누군가가 가조양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가주님! 안 됩니다. 벌써 잊으셨단 말입니까?”
소로장인 여노인이다.
철중양이 여노인을 돌아봤다.
“잊지 않았네. 그 날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니네. 복수는 철혼의 몫이니까. 난 그저 합당한 대우를 받기를 원할 뿐이네.”
그 말을 끝으로 철중양이 채방을 돌아봤다.
“들었겠지? 앞으로 나는 제대로 된 가격에만 거래에 응할 것이네. 자네들이 힘으로 핍박하려 든다면 차라리 문을 닫을 생각이니 자네는 이 말을 림주께 그대로 전해주게.”
표정에서 단호함을 읽을 수 있다.
채방은 혈풍을 짐작했고, 십 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십전철가가 시작이었다. 십전철가에서 제 가격을 선언했고, 다른 철방들로 번졌다.
객잔, 주루, 의가, 양조장, 푸줏간, 포목점, 선주들······ 급기야 광주상회까지 합류했다.
단박에 귀도림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다.
철마방에서 들어오던 것도 대폭 줄어버렸다. 철마방에서 자신들에게 상납하듯이 자신들 또한 철혈문(鐵血門)에 연줄을 대고 있다.
그 연줄이 끊기게 생겼다.
피바람이 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서문노인이라고 했던가?’
그 노인의 존재가 상인들을 규합시켰다.
광주의 군소문파들은 당황했고, 손을 쓰기로 합의했다.
가조양과 철혼의 싸움이 빌미가 되었다. 서문노인에게 따지러 왔던 귀도림의 무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물론 서문노인이 아니다.
등룡곡의 귀면살(鬼面殺)과 귀장랑(鬼掌狼)이다.
서문노인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고 복귀하는 귀도림의 무인들을 중간에 그들이 죽였다.
자신도 알고 귀도림의 림주도 아는 사실이다. 모를 수가 없다. 자신이 생각했고, 림주가 승낙했었으니까.
결국 그 일을 빌미로 많은 고수들이 직접 움직였다. 그리고 서문노인을 죽였다.
‘철혼이 확실하군.’
이제 확실해졌다.
서문노인의 복수를 하려고 돌아온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가조양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자신감인가?’
강함엔 자신감이 뒤따른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서문노인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한손이 열손을 감당하기 어려운 법, 그걸 알고 가조양을 죽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쪽이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이렇게 나타난 이상 놈의 운명은 정해졌다.
놈은 서문노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강해도 애송이는 애송이일 뿐이다. 암전(暗戰)을 벌인다면 모를까. 그 어리석은 자신감이 네놈을 망가뜨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온통 빈틈투성이처럼 여겨진다.
자신과 수하들이 놈을 막는 사이 소림주가 철가주를 붙잡는다면 놈이 어쩌겠는가?
채방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철혼의 존재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너, 너 이 새끼······.”
가조양도 상대가 철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철가주가 철혼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채방은 모른 척 지켜봤다.
가조양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이더니 복잡한 표정을 거쳐 점점 굳어갔다. 그러다 격한 감정을 완전히 가라앉혔다.
“넌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가조양은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철혼을 스쳐갔다.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한 꺼풀 벗었군! 너에게 감사하지. 그리고 조만간에 다시 보도록 하지.’
채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조양의 뒤를 따랐다. 귀도림의 무인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귀도림은 그렇게 물러갔다.
“서문노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곳에 피바람이 부는 꼴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여차하면 문을 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생각이니, 어떻게 하든 그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철중양이 다가와 한 말이다.
철혼은 철중양을 돌아봤다.
단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지만, 확실히 예전만 못했다.
‘약해지셨군.’
서문노인과 함께 광주의 군소 상인들을 규합하던 기개가 보이지 않았다.
서문노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그를 움직이고 있음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음인가?
철혼은 내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 광주상회에 다녀 오거라. 가서 내 생각을 전하고 함께 할 뜻이 있는지 여쭈어 보거라.”
철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십전철가의 정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주님!”
“입 다물게. 자네 딸이 뜨내기 놈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 때 서문노인이 구해주었다는 것을 벌써 잊었는가?”
철중양의 말에 소로장 여노인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보셨지 않느냐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자칫 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여노인의 입 안에서 가득 맴돌았다.
돌아선 철중양은 여노인과 함께 있는 감노인을 바라봤다.
“자네 아들이 철마방에 끌려가 죽게 생겼을 때 누가 구해주었는가? 칼을 버리고 쇠를 만지며 여생을 보내려던 서문노인이 다시 칼을 잡게 된 건 우리 때문이 아니던가? 그걸 알면서도 서문노인의 죽음을 헛되도록 하자는 말을 하려거든 차라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게.”
철중양은 단호히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십전철가의 정문 밖을 스쳐지나가는 몇몇의 무리가 보였다. 방향으로 보아 철혼의 뒤를 따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철중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두 눈에는 염려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저들은 철마방의 파락호들인데······.’
***
광주상회.
광주의 상권을 쥐락펴락하는 군소상인 대부분이 연계되어 있는 곳이다.
수십 척의 선주들까지 대거 가입하거나 손을 잡고 있으니 광주 상권의 중심이라 할만 했고, 그 때문에 철마방이 가장 공을 들여 감시하고 있는 곳이었다.
철혼이 광주상회에 도착한 건 한 식경 가량이 지난 후였다.
“십전철가의 가주님께서 이곳의 회주님께 전하라는 전갈이 있습니다.”
“회주께서는 출타중이시니 내게 말하시게.”
얼마나 허리를 숙이고 살았는지 서 있음에도 꾸부정해 보이는 노인이 눈길 한 번 주고는 말했다.
철혼을 안내한 이의 말로는 눈앞의 노인이 부회주라고 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회주와 함께 중대사를 논의할 위치일 것이니 부회주에게 전해도 될 듯싶었다.
철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중양의 전갈을 전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회주님께서 돌아오십니다.”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부회주가 철혼을 향해 웃었다.
“마침 돌아오신 모양이네. 함께 나가보세.”
부회주와 함께 상회 정문으로 나가보니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끼익!
낡은 경첩소리가 들리더니 마차 문이 열렸고, 뚱뚱한 비단장삼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오십니까?”
부회주가 허리를 조아리자 뚱뚱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차 문 좀 고치라 이르게. 거상이 되려면 보여주는 것도 있어야 하거늘 이거야 원 창피해서 돌아다닐 수가 있어야지.”
“당장 기름칠이라도 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보다 십전철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철가주가?”
회주가 다소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철혼을 돌아봤다.
그제야 마부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칼잡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철혼이 시선을 돌려 정중히 포권했다.
“가주님의 전갈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름이 뭔가?”
뜻밖의 물음이었다.
철혼은 고개를 들고 회주를 응시했다.
“철혼이라고 합니다.”
“자네로군.”
“······!”
“서문노인이 데려온 아이.”
“예.”
철혼이 대답하자 회주의 시선이 살짝 마부석으로 향했다가 다시 철혼에게로 돌아왔다.
잠깐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철혼이 그것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회주가 먼저 상회로 향했다.
그런데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이곳에서 말씀 나누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부석에서 들려왔다.
철혼은 마부석을 바라봤다.
두 명의 칼잡이들이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철마방의 방주께서 자네들을 내게 보낸 건 본회의 일에 이렇듯 관여하라는 게 아닐 것이네.”
“이놈이 십전철가의 가주가 보낸 것이라면 다릅니다.”
두 명의 칼잡이가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철혼은 이제야 회주가 이들의 눈치를 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감시자들.
철마방의 방주가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붙여둔 감시자들이 분명했다.
“이 아이가 누구와 관계가 있든 본 회주는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으니, 자네들이 정 탐탁지 않거든 돌아가서 철마방주에게 이르도록 하게.”
회주가 제법 당차게 나가자 두 칼잡이들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함부로 칼을 뽑아들고 위협을 할 수도 없다는 듯 당황한 기색도 내비쳤다.
그때였다.
“회주가 그리 원한다면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습니다. 허나 그놈은 우리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물론 회주는 그놈의 머리통과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살기 어린 목소리가 거리에서 들려왔다.
철혼이 돌아보니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철마방의 패거리였다.
선두에는 철마방의 총관인 흑살필(黑殺筆) 원적기가 보였다. 이를 빠드득 갈아붙이며 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살기등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