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두 번은 없다는 걸 알아야지 (3)
철혼은 그 모습을 보며 뒤쪽을 돌아봤다.
반대쪽에서도 수십 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양쪽을 합쳐 육십에서 칠십 정도 되어보였다.
“회주님!”
부회주가 회주를 불렀다.
상회 안으로 피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회주는 그런 부회주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원 대협! 피를 보실 일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듣도록 할 것이니······.”
회주는 말을 멈추어야 했다.
원적기가 묵빛의 철필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너무 평온했나봅니다? 아니면 우리가 만만해 보였든지.”
원적기의 싸늘한 외침이 거리를 울렸다.
광주상회 안쪽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거리 곳곳에 숨어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습게도 십전철가에서 칼잡이를 고용한 모양입니다. 돈을 많이 들였는지 이 원적기가 손 한 번 쓰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솜씨를 지녔더이다.”
거리 곳곳을 둘러보며 보란 듯이 떠벌리고 있는 원적기의 모습은 광주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방을 치려고 칼잡이를 고용해? 앙?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본방에 칼을 겨누면 어찌 되는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보여줄 테니까.”
으름장을 마친 원적기의 철필이 철혼을 가리켰다.
야차와 같은 원적기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감히 날 위협해? 두 다리를 자르고, 두 팔을 자른 다음, 두 눈알까지 모조리 파내주마!’
철마방에서 칼 좀 쓴다는 놈들을 모조리 끌고 왔으니 놈을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놈의 움직임이 굉장하다 싶을 정도로 빨랐지만, 이렇게 거리를 가득 채워버렸으니 운신의 폭이 줄어들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을 터, 놈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몇 해 전에 죽였던 뜨내기들과 다를 바가 없다.
대도를 쓰는 놈들이라 상대하기가 여간 난해한 게 아니었지만, 결국 인의장벽으로 놈들을 가두고 팔다리를 잘라버렸다.
당시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수하들 중 이십 정도는 죽을 것이다.
허나 상관없다. 죽은 숫자만큼 십전철가에 그 대가를 톡톡히 물을 생각이니까. 물론 이건 방주의 생각이다.
“날 죽이겠다는 건가?”
철혼이 갑자기 물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원적기는 그것을 무시하며 쏘아붙였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느냐! 네놈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반드시!”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철마방에서는 철혼의 정체를 모른다.
철혼의 정체를 알았다면 이 정도의 숫자만 믿고 이렇게 몰려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문노인의 굉뢰도(宏雷刀)는 그만큼 무서웠다.
다시 말해 철마방은 백룡보, 풍림당 등과의 연계가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들에게 들은 바가 없어 철혼을 그저 십전철가에서 고용한 칼잡이로만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군가를 죽이고자 할 때는 자신 역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나?”
철혼은 원적기를 향해 씩 웃었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느냐고?
당연히 아니다. 이렇게 몰려와달라고 건드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죽이려고 몰려와 주었으니, 이제는 죽여도 무방하다. 지켜보는 눈까지 많으니 금상첨화다.
“뭐? 이놈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의 다리를 잘라버리지 않고!”
원적기가 명을 내렸다.
순간 철마방의 패거리들이 거리 양쪽에서 철혼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사전에 명령이 내려진 듯 양쪽에서 달려들어 철혼이 날뛸 수 있는 공간을 빠르게 채우고 있었다.
철혼 역시 움직였다.
원적기를 향해 일직선으로 튀어 나갔다. 몰려오는 숫자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슈-악!
철혼의 칼이 뽑혀져 나와 무시무시한 불을 뿜었다.
공간을 가르는 철혼의 일도에 섬뜩한 살기가 폭발하여 달려들던 자들이 흠칫했다.
파공성에 앞서 공간이 갈라졌다. 분명히 위아래로 두 쪽이 났다.
“엇!”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맨 앞에 있던 장한의 몸이 좌우로 분리되었다.
푸학!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물이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비릿한 혈향과 처참하게 갈라진 동료의 주검이 달려들던 자들을 주박처럼 묶어버렸다.
그때 철혼의 그림자가 그들의 사이를 순식간에 관통했다.
부딪침은 없었다. 한줄기 빛살이 되어 섬전처럼 지나가버렸다.
스-악!
또 한 번의 파공음이 터졌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가슴이 섬뜩해졌다.
손가락이나 자르고, 배에 칼 한 번 꽂아보는 게 전부였던 자들이 어디서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았겠는가.
경험 많은 원적기와 일부의 칼잡이들조차 처음 보는 무척 생소한 광경이었다.
팔다리를 자르는 게 다였지, 목조차 잘라본 적이 없다. 하물며 사람이 양단되는 광경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까.
지독한 혈향이 사위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철마방의 장한들은 눈을 부릅뜬 채 철혼의 모습을 찾았다.
철혼은 그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정확히는 원적기의 바로 앞이었다.
지난번과 무척이나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요동치는 살기가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두 번은 없다는 걸 알아야지.”
철혼이 차갑게 말했다.
툭!
두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원적기의 손에서 묵빛의 철필이 땅으로 떨어졌다.
주춤 물러나는 원적기.
그의 목에서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지더니 이내 시뻘건 핏물이 왈칵 솟구치며 목 위쪽의 머리통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철혼은 칼을 집어넣으며 천천히 돌아섰다.
주변에 철마방의 개떼들이 바글거렸지만,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특유의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잔뜩 겁먹어 돌처럼 굳어버린 개떼들 사이를 지나 광주상회의 회주를 향해 다가갔다.
놀란 눈을 치뜨고 있는 사람들.
거리 전체가 죽음 같은 정적 속에 짓눌러버렸다.
철마방의 두 칼잡이들도 도병만 움켜잡고 있을 뿐,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사람을 일도로 쪼개버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통경(一通境)!
몸속의 내기(內氣)가 칼끝까지 넘쳐흐르는 일기관통(一氣貫通) 경지.
아름드리 거목이나 사람을 쪼갤 수 있다는 건 최소한 일통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명문거파의 후기지수들이나 일성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보통 일통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십전철가의 가주께서는 앞으로 제대로 된 가격에만 거래에 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광주상회에서도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어떤 선택을 하시든 그 결정을 존중할 것입니다.”
철혼이 광주상회의 회주에게 한 말이다.
철중양의 뜻을 그렇게 전해주었다.
회주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잔뜩 치뜬 눈 속에 의구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
“얼마 전에 흘러들어온 자들인데 손속이 잔인하다고 하더군요.”
“그래봐야 낭인이지. 삼사십 정도 되는 숫자라면 모를까, 그 정도로는 굉뢰도를 상대하지 못해.”
“쾌비수(快飛手)를 죽였다고 하니 죽이지는 못해도 놈의 진실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쾌비수라면 그 빠르다고 소문난 도둑놈? 그놈이 죽었어?”
“예. 얼마 전에 시비가 붙었는데, 아주 난도질 되어 죽었다더군요.”
“빠른 발을 잡을 수 있는 속도에 난도질할 수 있는 손속이라면 자네 말대로 놈의 실력을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 같군.”
“이쪽의 피해가 어느 정도냐가 문제이지, 어차피 놈은 죽은 목숨입니다.”
“보통이 아닐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사람을 양단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독해야 할 수 있는 일입지요. 하지만 놈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검상, 경험처럼 무서운 건 없죠.”
“잘 알고 있군. 그래서 방법은?”
“놈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 약점을 물라고 철마방에 일러두었습니다.”
“철마방?”
“철마방이 그들과 함께 일을 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알려줄 것입니다. 놈의 숨통을 끊으려면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한지를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끊어버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좋군. 좋아. 놈에 대해서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그건 그렇고, 연무장에만 틀어박힌 모양이던데 괜찮을까?”
“후후후!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입니다. 놈이 소림주의 가슴에 불을 붙여놓았거든요. 더욱 강해지실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귀도림주의 얼굴에 여유가 넘쳐흘렀다.
‘서문늙은이도 일통경(一通境)이였었지?’
***
철혼이 십전철가로 돌아오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십 년 전 철혼이 가까이 지냈던 두 명의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전날 만나 실망만 잔뜩 안겨준 화평객잔의 양우천이 해가 뜨고 가라앉을 때까지 항상 붙어 다녔던 친구라면 지금 스스로 찾아온 모중위는 늘 다투었던 친구였다.
십 년이 흘렀지만, 서로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군지 할 일 없는 놈이 이걸 버렸더군.”
철혼의 곁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불쑥 내민다.
눈에 익은 술병이다. 철혼이 서문노인의 묘지에서 버렸던 술병이었다.
철혼은 술병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독한 술이다. 뱃속까지 단숨에 짜릿해졌다.
“뭐지?”
“분주(汾酒)다. 산서성에서 제법 알아주는 놈이다.”
그러고 보니 모중위의 집안은 대대로 술도가를 운영해 왔다. 어른들 몰래 술깨나 훔쳐 먹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좋은 놈이다.”
“알아. 내일부턴 이놈을 내놓을 생각이다.”
“너 말이다.”
“······!”
“고맙다.”
철혼은 서문노인의 묘를 돌봐준 이가 모중위라는 것을 지금 알았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말한 것이다.
모중위는 대꾸 없이 바라보더니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노야 옆에 또 다른 무덤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
“돌아가라.”
양우천과 똑같이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둘이서 술 한 병을 반씩 나눠마시던 때가 생각나는군.”
“망할 자식아! 돌아가란 말이다. 혼자서 무얼 하겠다고 이리 온 거냐? 왔으면 조용히 처박혀 있든지.”
모중위가 바득바득 소리쳤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철혼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뭐가?”
“네가 걱정하는 일.”
모중위는 착잡한 심정으로 철혼을 응시했다.
무인들 중엔 간혹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어느 정도 무공을 성취하게 되면 자신은 강하고,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
철혼이 그런 어리석은 이가 아니길 빌었다.
“망할 자식! 그때 넌 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모중위는 술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벌컥벌컥 마셨다.
화가 난 때문인지, 아니면 취기 때문인지 금세 얼굴이 벌게졌다.
“망할 자식아! 죽어서 길거리에 굴러다녀도 모른 척 할 테니까 알아서 해.”
술병을 건네고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가버린다.
말릴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도 그랬다.
서로 우기고 우기다 끝내 포기하고 돌아서는 이는 항상 모중위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욕을 하고는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늘 다투기만 했지, 해질녘까지 함께 돌아다니지 못했다.
철혼은 혼자가 되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꿀꺽!
남은 분주를 남김없이 마셨다.
“분주라······ 좋은 놈이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철혼은 빈 술병을 들여다보다 문득 생각난 바가 있었다.
“왕노인께서 기다리고 계시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