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각오가 되셨습니까? (2)
사람을 납치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보는 눈이 없다면 좋겠지만, 있어도 크게 문제될 건 없다. 간혹 정의를 심장에 꽂고 사는 놈들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피만 볼뿐이다.
가장 납치하기 좋은 상대는 역시 계집이다.
무공을 모르는 계집, 똑똑한 계집이라면 더더욱 좋다. 멍청한 계집은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어리석은 정의감을 부추기고 결국 피를 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납치 대상은 최상이다.
다섯 걸음을 유지하고 에워쌌다.
그리고 동행을 요구했다. 물론 험악한 인상과 함께 날이 시퍼런 육도를 슬쩍 보여주었다. 겁주는 데는 푸줏간의 육도가 제격이다.
육도를 보는 순간 살이 갈라지고 뼈가 잘리는 몸서리쳐지는 광경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토끼처럼 놀란 얼굴이 예쁘다.
예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리고 체념한다.
소리쳐 보았자 피만 볼 뿐이라는 걸 알아차렸으니 똑똑한 계집이라는 증거다.
문제는 함께 있는 계집이다. 친구인가? 아니면 시비? 뭐가 되었든 하얗게 질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태세다.
이럴 땐 즉효약이 따로 있다.
퍽!
기절한 계집을 부축하며 슬쩍 웃어준다.
사악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바라는 바다. 바들바들 떨며 따라온다.
똑똑한 계집은 이래서 편하다.
하지만 재미가 없다. 긴장감 같은 게 없다.
철방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구하러 올 놈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있었으면 좋겠다. 간만에 난도질하는 손맛 좀 보게.
“화옥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껏 다른 곳에서 자본 적이 없는 애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들의 소행이다. 그놈들이 화옥이를 잡아간 것이 틀림없단 말이다. 이 일을 어찌 할 테냐?”
“초조하십니까?”
“넌 그렇지 않은 것이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넌 알고 있었단 말이냐?”
철가주의 목소리가 떨린다.
생각과 실제의 차이다. 혹은 설마하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놈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느꼈으리라. 죽음이 곁에 있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문득 드는 의문, 후회하고 있을까?
“다시 묻겠습니다. 각오가 되셨습니까?”
“이놈아! 화옥이가······.”
철중양은 입을 닫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 너무 차갑다. 냉정한 게 아니라 냉혹하게 보인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어찌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서문노야를 능가하고, 저들 모두를 상대할 힘이 있을 때 돌아오라 했었다.
그런데 돌아왔다.
똑똑한 놈이었으니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 냉철하게 변한 모습에 마음이 놓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냉철한 얼굴 안에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한데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
냉혹, 냉혈······ 그렇게만 보인다.
“내일, 내일까지다. 화옥이가 내일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 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만 나가 보거라.”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물러가지 않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응시한다.
“돌아올 것입니다. 틀림없이.”
밖으로 나온 철혼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납치라······.’
저들이 하는 행동은 누군가의 예상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예견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고개를 들어보니 손톱달이 여전히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둠이 사방을 짓누르고 있다.
누군가를 겁주기에 충분한 어둠이다.
‘그럼 만나러 가볼까?’
철혼은 어둠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흐트러진 침상.
한차례 뜨거운 폭풍이 지나쳐 갔는지, 아직 그 여운이 침상 곳곳에 남아있다.
터질 듯한 젖가슴에 번들거리는 땀방울, 거칠어진 호흡.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몸은 오뉴월 엿가락처럼 축 늘어졌다.
거침없던 열락은 끝이 났다. 허나 그 여운이 남았다.
만족한 미소와 함께 몽롱한 느낌을 조금씩 현실로 이끈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잠이 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람일 뿐이다.
문득 여인이 이불을 끌어당긴다.
땀이 식으며 한기가 느껴지는 모양이다. 한데 여인의 눈에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를 열락으로 이끈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뚝 멎은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사내의 알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두 다리가 허공에서 사납게 교차했다. 한 번의 호흡에 열여덟 번을 내찼다.
흑도에서 맹위를 떨쳤던 철우십팔퇴(鐵牛十八腿)다.
한데 걸리는 게 없다.
사내가 당황했다. 순간 무지막지한 철곤이 사내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빠악!
사내가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웬 놈이냐?”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리쳤다.
그러자 무겁게 깔린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혈도부(黑血屠斧) 구포라!”
철마방의 방주 구포라는 흠칫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설마하니 모르고 여길 찾아왔겠는가. 그가 놀란 것은 사내의 음성 때문이다.
음성만으로도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다.
‘고수!’
구포라는 어둠에 묻힌 괴한을 살폈다.
어둠보다 더 짙어 보이는 장포, 그리고 붉은 검상.
구포라가 눈을 부릅떴다.
“넌······.”
“내일 정오까지 돌려놓지 않으면 허창(許昌)에 세 구의 시체가 뒹굴게 될 것이다.”
구포라는 오한이 든 듯 잘게 떨었다.
그가 알기로 중원에 허창이라 부르는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가 숨겨놓은 핏줄이 있다. 언제가 되었든 향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갈 곳이다. 그의 미래가 거기에 있었다.
묵빛 장포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구포라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누, 누구 없느냐?”
그가 밖을 향해 소리친 것은 거의 반각이나 지난 후였다.
그는 가장 신뢰하는 수하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 수하가 이끄는 십여 명이 소리 없이 철마방을 빠져나갔다.
***
독질(毒蛭) 두곽.
성질이 잔인하고 무자비하여 인간 이하의 짓만 골라하는 놈이다. 나름 처세까지 할 줄 알아 여태 홍등가를 지배하고 있다.
삼십여 명의 노류장화들이 그를 위해 몸을 팔았고, 이십여 명의 독사 같은 놈들이 그를 수족처럼 따랐다.
지금 두곽은 짜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받은 돈은 없지만, 자신에 대한 무언의 인정, 그것이 대가이기에 그리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 일에 세 명의 낭인들을 따로 고용했다. 보아하니 모두들 한 가락씩 하는 놈들이다.
마찬가지로 불만은 없다.
이따금 그들에게 고용된 낭인들을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었으니까. 그러려니 한다. 그러면 된다.
불만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세 놈들에게 있다.
세 명의 낭인들이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미끼를 손대겠다는 것이 아니다. 함께 끌려온 계집을 손대겠다는 거다. 어차피 덤이지 않은가.
덤이 어찌 된다고 해서 물건에 손상이 가는 건 아니다.
한데 세 놈이 건드리지 말라고 나선다. 간만에 싱싱한 맛 좀 보려고 했더니 방해꾼의 등장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목이 뻣뻣하다 못해 눈을 내리 깐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심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죽이든 씹어 먹든 내 맘이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두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수하들이 육도를 움켜잡았다. 그럼에도 세 명의 낭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회색장포에 방립을 깊이 눌러썼다. 전형적인 낭인들의 모습이다.
‘삼귀(三鬼)라고 했었지?’
귀수(鬼手), 귀혼(鬼魂), 귀도(鬼刀).
두곽은 삼귀의 우두머리인 귀수를 쳐다봤다.
낭인으로 떠돌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일에 이골이 났을 터, 그럼에도 성인군자인 양 이렇게 나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해할 수가 없다.
좀 더 건드려보면 알게 되겠지.
“호오!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냐?”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도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도발해 본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손을 떼겠다.”
“······!”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게 우리 삼귀의 원칙이다. 그게 틀어지면 우리는 손을 뗀다.”
삼귀는 선택권을 넘겨줬다. 대신 주도권을 가져갔다.
두곽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
태양이 머리 꼭대기를 향하고 있었다.
한식경이면 놈이 말한 정오다.
구포라는 안절부절 자리에 앉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초조와 불안, 자꾸만 정문을 쳐다본다.
“식사를······.”
시비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손을 저어 쫓는다.
“방주님 이번 천리표국에······.”
“만금장(萬金莊) 만 대인 생신 선물로······.”
“백룡보에서······.”
오늘따라 왜 이리 자신을 찾는 놈들이 많은지, 구포라는 바쁘게 손을 내저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타들어가는 마음이 어느새 까맣게 재가 되어갈 때였다. 갑자기 철마방의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괜스레 흠칫한 구포라는 굳은 듯 정문을 응시했다.
그때 정문이 활짝 열리며 밖을 지키던 이들이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쓴 혈인을 부축해왔다.
“방주님! 철귀(鐵鬼)놈입니다.”
순간 구포라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하고 주저앉았다.
철귀는 온몸이 쇠처럼 단단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구포라가 가장 아끼는 수하였다.
간밤에 그가 허창으로 보냈던 이가 바로 철귀였다.
“어떻게 된 것이냐?”
구포라의 물음에 철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도중에··· 전부 죽었습···니다.”
구포라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독질 놈에게 알려라. 빨리 돌려주라고 알리란 말이다.”
구포라의 고함에 몇 명의 수하들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
“실패했습니다.”
“강하더냐?”
“싸움은 벌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철마방주가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뭐야?”
“말을 하지 않습니다만, 놈이 무언가 수를 쓴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있습니다. 놈도 무언가 준비가 있다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그 계집과 십전철가가 놈의 약점이라는 게 보다 확실해졌으니까요. 놈은 자신의 준비를 드러내면서까지 계집을 구했습니다. 그걸로 놈의 운명은 끝난 겁니다.”
상대가 생각보다 강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피해가 조금 더 커질 뿐이다.
그러나 상대의 감추어진 패를 모른다는 것은 자칫 치명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놈의 약점이 확실해졌다고는 하지만, 놈의 준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채방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이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는 느낌이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흐음!”
가득천은 무겁게 침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