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약육강식을 안다면 날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1)
“화옥, 오빠가 돌아왔다.”
문이 왈칵 열렸다.
오빠가 보였다.
가슴이 격동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오빠가 손을 내밀자 흠칫했고, 오빠의 손이 뺨을 감싸자 오빠에게로 무너졌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손을 들어 오빠의 얼굴을 매만졌다.
촉촉이 젖어있다. 오빠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인가?
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개를 들어 오빠의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차가운 칼날이 오빠의 얼굴을 갈라버린다.
오빠의 뺨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지며 시뻘건 피가 왈칵 쏟아졌다.
‘오빠!’
비명이 목구멍 안쪽에서만 울렸다.
철화옥이 꿈에서 깨어나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십 년을 넘게 지내온 자신의 방이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아도 자신의 방이 분명했다.
‘돌아온 건가?’
한데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곁에서 집에 돌아왔노라고 말해 준다면 안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찾는 이가 없다.
이불을 움켜잡고 불안에 떨던 철화옥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올까,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느릿하게 걸었다. 그리고 곧 창문을 열어젖혔다.
붉은 노을이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척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땅! 땅! 땅!
철방의 망치질 소리였다.
“흑흑!”
그제야 안도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
철혼은 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홀로 걸었다.
반겨하는 이 없으니 혼자 걸을 수밖에,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옅은 그림자가 길동무를 해주고 있었다.
오가던 사람들이 철혼을 발견하고는 흠칫 비켜났다.
광주상회 앞에서 벌어진 일이 이미 광주 땅 곳곳에 알려졌다.
십전철가에서 고용한 낭인이 철마방의 야차를 죽였다는 소문이다. 철혼을 아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십 년 전의 일을 이야기 했다.
어쨌거나 잔뜩 부풀려진 행색이 지금 철혼의 모습과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 일색인 사내.
사내답게 각진 얼굴에 유리알을 박아 놓은 듯 번들거리는 눈이 뭔가 두려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화옥!’
한 걸음에 달려가 동생의 두려움을 걷어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동생으로 인해 나약해질까 봐 두렵다.
수라의 냉혹함이 몸 깊숙이 배어 버린 지 이미 오래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국 사람 때문에 무너지는 법이다.
냉혈한의 독기도 가족 앞에서는 봄눈 녹듯이 녹고 만다.
지금은 끝을 향해 무정하게 달려갈 때다.
감상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흑수라 본연의 모습으로 그들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야 한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발톱을 드러내 광분할 때까지다.
‘이해하리라 바라진 않으마.’
미안한 마음이다. 동생에게 죄를 짓고 있음이다. 그래도 가지 않는다.
저들이 스스로 지옥문을 활짝 열어버릴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저들이 지옥문을 활짝 여는 날이 오면, 그때 꺼내버릴 생각이다.
흑수라(黑修羅)!
피와 목숨을 아귀처럼 씹어 먹는 괴물.
그날 그들은 진짜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십 년 전, 그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참담하고 절망 가득한 지옥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단 며칠의 시간, 그것이 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유등이 내걸린 현판이 보인다.
받은 게 있으니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 이번엔 이쪽이 한 방 먹일 차례다.
씨익!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청화루(靑華樓).
안이 북적거렸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 달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시끌했다.
이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특히 한쪽에선 웃음꽃이 만발했다.
네 명의 공자와 두 명의 소저.
꽃이 있고, 향기가 있으니 벌이 날갯짓을 할 수밖에.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해줬지. 안 뽑히는 걸 보니 녹이 많이 슬었나봅니다. 저렴한 대장간을 아는데, 소개시켜 주리까?”
“크크크! 자네 검을 빌려주지 그랬어?”
천리표국의 소국주인 동후평이 표행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게진 얼굴인데, 그랬다가는 졸도를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럼 사람들이 날 손가락질 할 거야.”
“아니 왜요?”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쓰러졌으니, 사술을 썼다고 하지 않겠어!”
“크하하! 그도 그렇군.”
“호호! 그런 사술이 있다면 저도 배워보고 싶네요.”
“사술은 그놈에게나 배우라고, 두렵다고 픽 쓰러지는 능력이니······.”
동후평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시선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함께 자리하고 있던 동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도 보았다.
이마에 묵건을 두르고 있는 사내를.
뺨의 굵은 상처가 꿈틀거리는 사내를 본 것이다.
철혼이었다.
철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여섯 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들도 귀가 있어서 철혼이 벌인 일들을 알고 있었다.
이층으로 완전히 올라선 철혼은 여섯 명을 발견하고는 잠깐 멈췄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이제껏 이야기를 주도하던 동후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철혼에게로 다가갔다.
막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점소이를 확 밀쳐버리며 차갑게 으르렁거렸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다던데, 너냐?”
도발이고, 시비다.
객잔 안의 공기가 숨 막힐 듯 긴장하였다.
철혼이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신색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동후평의 신경을 자극했다.
“철쟁이, 맞느냐?”
동후평이 입가에 비웃음을 달며 물었다.
어렸을 적에 몇 번 부딪친 적이 있었다.
하찮은 것들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손 좀 봐주려고 했는데, 게 중 한 놈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철쟁이였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그때 코피가 터졌던 놈이군.”
철혼의 대꾸에 동후평의 손이 검병에 닿았다.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뭉클 일어나 철혼을 휘감았다.
살기다.
이 정도에 살기를 드러낸다는 건 수련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놈! 칼을 뽑아라. 일검에 베어주마!”
동후평이 으르렁댔다.
그가 들은 대로라면 칼을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흑도의 파락호를 쪼갰다는 말도 들었다. 하긴 그 정도의 칼솜씨를 지녔으니 이렇게 혼자 활보할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가소롭다.
겨우 흑도나부랑이 하나 베었다고 의기양양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놈!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지금 보여주마!’
놈을 벨 자신이 있다.
추혼십이검식(追魂十二劍式)의 절초 단월참(斷月斬)이라면 느끼지도 못할 사이에 목을 가를 터였다.
놈이 빠르다고는 했지만, 지금 이곳은 객잔이다. 식탁과 의자들이 걸리적거린다.
그의 움직임은 제한 받을 것이고, 속도라면 놈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원래 검이 칼보다 빠른 법이다.
변화의 검, 힘의 칼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끝이 뾰족한 양날의 검은 찌르고, 베는 데에 용이하게 만들어져 있다. 칼에 비해 무게가 가벼워 좀 더 빠르게 휘두를 수 있다.
반면 한쪽 날만 가진 외날의 칼은 찌르기 보다는 베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빠르게 찌르고 베는 게 아니라 무시무시한 힘으로 일격에 가르고 쪼개버린다.
‘유란에게 똑똑히 보여주지. 이 몸은 백우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야.’
철혼의 칼에 대해 들려준 이가 뒤쪽 자리에 있었다. 피부가 옅은 갈색이라 한 포기 들꽃처럼 생기가 넘쳐 보이는 상유란이었다.
전총관을 베고, 백우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았다고 했다.
워낙 갑작스러웠고, 번개 같은 동작이라 백우가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고 했지만, 진 건 진 것이다.
백우는 놈에게 당했다.
하지만 자신은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란 듯이 놈의 목을 잘라버리겠다.
동후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눈에는 살심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철혼이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나직이 말했다.
“돌아가라.”
“칼을 뽑으라고 했다!”
동후평이 으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 기세를 돋우었다.
그럼에도 철혼은 도를 뽑지 않았다. 앉은 채 가만히 쳐다볼 뿐이다.
그렇게 잠시간 대치했다.
동후평은 이대로 검을 휘둘러 놈을 베어버릴까 하고 고민했다. 놈을 죽일 수는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당한 대결이 아니니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상유란에게 빠져 있는 그로써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할지 망설였다.
“비켜라.”
“뭐?”
“술이 왔으니 비키란 말이다.”
그제야 뒤쪽에 점소이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동후평은 검병에서 손을 뗐다.
“다시 날 보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동후평은 싸늘한 시선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두 사람의 사나운 분위기에 가슴 졸이고 있던 점소이가 그제야 다가와 술병을 내려놓았다.
철혼은 기다렸다는 듯이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분주였다.
혹시나 해서 시켜보았는데, 저번에 모중위와 마셨던 그 분주를 가져다주었다.
독한 분주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니 애써 가라앉혔던 마음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철혼은 안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분주만을 연거푸 마셨다.
생각보다 녹록치가 않았다.
상대해야 할 자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어렸을 적의 기억과 서문노야에 관한 기억을 끌어안은 채 꾹 참고 있어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다.
전장이라면 일거에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사도천(邪道天)과의 싸움은 그래서 좋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전장이 아니다.
대의명분(大義名分)!
천하영웅 맹의 율법!
칼을 뽑는 걸 막고 있는 놈이다.
일거에 베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살귀가 되어 날뛴다면 누구보다 먼저 서문노야가 무덤에서 뛰쳐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있는 분을 실망시키게 된다.
그래서 꾹 참고 있다.
꾹 참고 이유를 만들고 있다. 이유가 합당하면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미끼를 걸기 위해 참아준다.
단지 그뿐이다.
‘너희는 미끼일 뿐이다. 그러니 주저 말고 건드려라.’
철혼은 비릿하게 웃으며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피를 보기는 그렇더군. 게다가 놈이 겁을 먹었는지 칼을 뽑지 않으니 비겁하게 공격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동후평이 돌아와 한 말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슬쩍 상유란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행동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아쉽군. 일검에 베어버렸다면 저 눈이 달라졌을 텐데.’
동후평은 아쉬움을 접었다.
“잘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어른들께서 무언가 준비를 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그냥 지켜보자.”
목소리를 죽여 가며 말한 이는 풍림당의 소당주 유이강이었다.
“어른들께서 손쓰길 기다릴 필요도 없어. 기회를 봐서 내가 단단히 혼을 내줄 생각이다.”
동후평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면서 상유란을 바라봤다. 헌데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철혼을 보고 있었다.
동후평은 가슴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질투의 불길이었다.
“란매는 어떻게 생각하지?”
“어른들은 어른들이고, 우린 우리죠.”
“역시 란매와는 말이 통하는군.”
“글쎄요, 같은 뜻이 아닐 수도 있을 걸요.”
“······!”
그러고 보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을 하고 있다.
계속 놈만을 주시하고 있다.
동후평의 눈빛이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