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날 모조리 죽인다 (1)
선착장에는 또 다른 별천지다.
탁자 서너 개만 갖춘 선술집들이 선착장 가까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슴푸레한 가운데 붉은 유등이 줄지어 걸려 있어 술과 색욕을 자극한다.
그 화려한 유혹 속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초라한 손수레가 철혼의 눈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좀 놀다 가. 돈 안 받는다니까.”
“고맙지만, 할일이 있어 바쁩니다.”
“바빠? 그럼 우리가 도와줄게.”
“그래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뭐 원한다면 평생 도와줄 수도 있고, 안 그래, 언니?”
“아무렴, 이 짓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모 가가의 첩인들 마다하겠니?”
“어이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워낙 모자란 놈인지라 아리따운 낭자들은 감당 못합니다. 미용에 좋다는 봉밀주(蜂蜜酒) 한 단지 들여놓았으니 손님상에 내지 말고 두 분만 드십시오. 그럼 이만 실례합니다.”
여인네들의 유혹을 겸양으로 털어내며 밖으로 나온 청년이 손수레를 끌려다 철혼을 발견했다.
“어? 언제 왔어?”
“지금 막.”
“이야기는 듣고 있다만······.”
말을 멈추고 철혼의 위아래를 훑어 살피는 모중위.
어딘가 모르게 음습하고 불길함이 느껴지는 것 외에는 별 탈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눈빛을 드러냈다.
“날 만나러 왔을 리는 없고, 이곳에는······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안 돼.”
“왜?”
“그들이 누군지나 알고 있어?”
“설마 누군지도 모르고 찾아왔을까?”
“너 진짜······!”
“중위, 손수레를 끄는 네 모습, 정말 보기 좋다.”
“흥! 한심하다고 얕보는 거냐?”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데, 누가 흉본단 말이냐?”
“그럼 너도 철가로 돌아가서 망치나 잡아.”
“아니, 이게 내 길이다.”
장포자락을 들춰 허리춤에 걸려있는 두 자루의 철곤과 칼자루를 보여주는 철혼.
모중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죽이는 게 무슨······.”
“그래, 사람 죽이는 일 따위나 하고 있다. 하지만 망치로 할 수 없는······.”
그때였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은 칼로만 할 수 있다. 망치와 수레로는 천년만년이 지나도 바꿀 수가 없다.”
당당한 체구의 노인이 똑바로 다가왔다.
‘석노야······!’
열두 척의 선박을 가진 선주다.
남해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지만, 승냥이 떼에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처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중히 인사했다.
자주 보았던 얼굴이 아닌 데다 십여 년 만에 보는 것인데, 알아볼지 모르겠다.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느냐?”
석노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철혼은 고개를 흠칫 들었다. 그랬더니 석노인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무얼 도와주면 되겠느냐? 말만 해라. 이 늙은 목숨이라도 내놓을 참이니까.”
그랬던가?
서문노야를 잊지 않고 있는 분이다.
왕노인이 그랬고, 석노인 역시 잊지 않고 있다.
“안 됩니다.”
모중위가 끼어들었다.
“뭐가 안 된단 말이냐?”
“광동해상(廣東海商)은 안 됩니다. 그들은······.”
모중위의 대답에 석노인은 철혼을 돌아봤다.
“알고 있느냐?”
“복수를 하겠다는 놈이 그만한 정보도 없이 나타났겠습니까? 놈이 해남도주의 자식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철혼의 대답에 석노인이 모중위를 돌아봤다.
“자네는 친구라면서 이 아이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남도는······.”
“해남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무공은 물론이고, 숫자까지 소상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담담히 말하는 철혼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것 같은 맹수의 흉폭함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만이 읽을 수 있는 안으로 내재된 기운이기에 모중위가 그 같은 기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허나 물러서지 않을 결연함과 자신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죽지마라. 죽지 않겠다고 해라.”
“그럴 일은 없다.”
“알았다. 내가 안내해 주마. 이곳에서 그리 멀지······.”
“내가 안내할 터이니, 자네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하게.”
모중위의 말을 석노인이 잘랐다.
모중위는 머리를 저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혹여 그들의 눈에 띈다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겠네. 열두 척이 전부 만선을 해도 남는 게 없네.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네.”
석노인의 말에 모중위는 할 말을 잃었다.
같은 광주 땅이지만, 선착장 부근은 시내 쪽 상황과는 또 달랐다.
시내 쪽과는 달리 숨조차 마음대로 내쉬지 못하는 곳이 바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자신이 있는 게냐?”
단호하게 말했지만, 철혼 혼자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십 년 전에 모든 걸 잃었던 접니다.”
철혼의 대답에 석노인은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더니, 생각을 정한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너라.”
앞서가는 석노인.
철혼은 모중위에게 짤막한 작별을 고했다.
“다시 말하지만, 넌 좋은 친구다.”
잠시 후, 석노인이 안내한 곳은 선착장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한 번화가였다.
이층, 삼층으로 된 전각들이 대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광동해상은 저곳이고, 그 망할 놈은 저기에 있을 거다.”
광동해상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붉은 현판을 가리키더니, 곧이어 몇 채의 전각을 지나 남해루(南海樓)라는 황금빛 현판이 걸려 있는 주루를 가리켰다.
“정말 혼자서 되겠느냐? 여의치 않으면 내 전 재산을 처분해 줄 터이니, 그 돈으로 낭인들이라도 끌어 모으는 게 어떻겠느냐?”
석노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철혼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허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석노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럼!”
철혼은 정중히 포권한 후 남해루를 향해 성큼 걸었다.
뒤에 남은 석노인만 안절부절했다.
이때 당당히 걷는 철혼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문노인이 흐뭇한 얼굴로 자랑삼아 하던 말이 떠올랐다.
- 그릇이 태산처럼 크고, 무언가를 행할 때는 범처럼 신중하니 장차 크게 대성할 아이라네. 두고 보게, 광주, 아니 광동성을 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네.
‘제발 그랬으면 좋겠소.’
석노인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철혼이 남해루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석노인의 등 뒤로 몇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떻게 오셨수?”
건장한 체격의 장한들이 철혼을 막아섰다.
근자에 광주를 뒤흔들고 있는 입소문을 들은 모양인지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광동해상의 상주를 만나러 왔다.”
철혼은 담담히 말했다.
장한들은 곤혹스러워했다. 철혼이 소문의 주인공이냐고 감히 물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광동해상의 상주에게 안내할 수도 없었다.
“예서 기다려주십시오. 안에 기별해 보겠습니다.”
제법 얍삽한 이가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냥 밀고 들어가려던 철혼은 생각을 바꾸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어수선한 소리와 함께 칼잡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런데 지금껏 보았던 귀도림이나 백룡보의 무인들과는 복장이 조금 달랐다.
하나 같이 소매가 없는 조끼처럼 생긴 무복을 걸치고 있어 무인이라기보다는 뱃사람처럼 보였다.
허리에 걸고 있는 칼은 박도나 환도와는 달리 칼날의 폭이 얇고 길었다.
‘해남도의 무인들.’
들은 대로다. 기세가 다르다.
상대가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 기세다.
좋은 자세다.
철혼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해남도의 무인들이 이 열로 늘어서서 길을 열었다. 상주를 만나려거든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는 뜻이다.
지나가는 와중에 칼질을 해댈 수도 있다는 듯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고, 오른손은 칼자루를 움켜잡고 있었다.
철혼은 피식 웃었다.
기꺼이 그들이 열어준 길을 걸었다.
수십 명이 두 줄로 쭉 늘어서서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철혼을 향해 살벌한 기세를 쏟아냈다.
담이 약한 자라면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철혼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그들 사이를 걸었다.
살갗을 곤두서게 만드는 살기가 거세게 요동쳤지만, 철혼은 유유자적할 뿐이었다.
장포 안쪽에서 철곤과 칼이 부딪치는 쩔그럭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남도 무인들의 압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고, 기다란 회랑을 지난 복도 끝에 화려하게 치장된 문이 보였다.
철혼이 당도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안쪽으로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앉아있었다.
철혼은 성큼 들어섰다.
그러자 반대편 문이 열렸다. 그리고 또 다시 이십여 명이 보였다.
철혼은 주저 않고 움직였다.
또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
철혼이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겁간?
그게 아니면 무엇일까? 틀림없다.
나체의 소녀가 선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줄이 두 손을 묶어 머리위로 잡아당겨 쓰러지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소녀의 엉덩이 뒤에서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구릿빛의 장한이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젖가슴이 출렁거리고 있는 소녀의 사타구니에서는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고, 구릿빛의 장한은 고개만 돌려 씩 웃었다.
“백룡보의 전총관을 날려버린 철쟁이가 맞나? 맞다고 해주라. 이 짓도 따분하던 참이거든.”
해남용가(海南龍家)의 이공자, 용태천.
석노인 같은 선주와 어부들에게 악마처럼 군림하고 있는 광동해상의 상주였다.
“소연아!”
갑작스런 목소리는 분명 석노인의 것이었다.
철혼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허겁지겁 달려오던 석노인이 해남 무인의 발길질에 의해 크게 나동그라졌다.
피가 튀었다.
해남 무인은 우악스런 손길로 석노인을 잡아 일으켜 강제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소연아······!”
석노인이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저 늙은이가 자네의 활약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보았네. 어떤가? 내 성의가 갸륵하지 않은가?”
용태천이 비릿하게 웃었다.
몸으로는 철혼이 보라는 듯 소녀의 엉덩이를 계속 밀어붙였다.
그 모습이 철혼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죽여 버리겠다.”
살기가 요동쳤다.
혈루처럼 보이는 눈가의 상흔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흑수라(黑修羅)가 번쩍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용태천은 알지 못했다.
“호오! 이거 무서워서 오금이 다 저리는 구만. 좋아. 죽을 때 죽더라도 하던 건 마저 끝내야겠으니 잠시만 기다려봐.”
용태천이 이죽거렸다.
순간 철혼이 질풍처럼 쇄도하여 일도를 그었다.
번-쩍!
철혼의 움직임과 동시에 양쪽에서 전광 같은 칼날이 날아들었으나 철혼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용태천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소녀의 알몸을 철혼을 향해 밀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철혼은 그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순식간에 방향을 꺾었다.
줄에 묶인 소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일이 없었고, 그런 소녀의 몸을 비껴간 칼이 용태천의 목을 노렸다.
흠칫한 용태천이 자신의 칼을 뽑아 힘껏 휘둘렀다.
채-앵!
불똥이 튀었고, 용태천의 칼이 튕겼다.
순간 철혼이 신형을 빙글 돌리며 수평으로 일도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