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흑수라(黑修羅) (1)
‘웃어?’
철수검 유장해는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를 걷던 새까만 철립을 눌러쓴 사내가 미소를 짓는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저놈입니다.”
“음? 무슨 말이오?”
“저놈이 바로 그놈입니다.”
“아, 저놈이었소? 그런데 어디서 굴러다니다가 왔답니까?”
“낭인으로 떠돌며 굉뢰도를 익힌 듯싶습니다.”
“굉뢰도라······ 확실하오?”
“눈으로 본 게 아니라 확신하지는 못합니다만······.”
“낭인으로 떠돈 게 확실하냔 말이오?”
“저놈 복색이 저러하니······ 어찌 그러십니까?”
“놈의 기도가 심상치 않아서 그럽니다.”
“말씀 드렸잖습니까. 놈의 칼이 보통이 아니라고.”
“어쩌면 두 분께서도 가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정도입니까?”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럴 겁니다.”
유장해의 말에 가득천과 등룡곡주가 굳은 표정을 지을 때였다.
등룡곡의 복장을 한 인물이 이층으로 올라왔다. 그는 등룡곡주가 가득천, 유장해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쪽으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데 등룡곡주가 손짓해서 불렀다.
“귀면살이 왔으면 당장 철가로 가서 백룡보주의 명을 따르라고 해라.”
등룡곡주는 놈의 기도가 심상치 않다는 유장해의 말에 귀면살이라도 먼저 보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도 위신이 떨어지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귀면살이 오지 않았습니다.”
“뭐?”
“불산에서 일이 터진 모양입니다.”
“무슨 일?”
“귀면살(鬼面殺)이 웬 놈들에게 끌려간 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웅루(英雄樓)의 황가라더냐?”
“아닙니다. 뜨내기 낭인들 같은데, 환우멸절우주최강절대무적(寰宇滅絶宇宙最强絶對無敵)! 분쇄곤(分碎棍)! 널 두들겨 팰 이름이니까, 절대 잊지 마라! 라고 외치더랍니다.”
그때였다.
유장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분쇄곤이라고 하였느냐!”
“왜 그러시오?”
등룡곡주가 의아하여 물었다.
그러나 유장해는 잔뜩 굳은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할까?”
“예. 분명 분쇄곤이라고 들었답니다.”
“허어!”
“유대협!”
“분쇄곤이 뭔지 모르시오?”
유장해가 인상을 쓰며 등룡곡주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냐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이러니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소리를 듣지.
귀도림주를 돌아봤다.
그 역시 대답을 못한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하는 게 들어는 보았나 보다.
천하영웅맹이 아니, 맹주부를 제외한 각 부처가 흑영대와 흑수라에 대해 쉬쉬하고 감추었기로서니 이토록 무지하단 말인가.
유장해는 답답하여 확 소리를 질렀다.
“흑영대!”
“흑영대라면 맹주의 직속이라는······!”
“이제 아셨소?”
“분명 흑영대의 무공 중 하나가 분쇄곤이라고 했던 것 같소.”
“분쇄곤은 근접전에 특화된 무공이오. 흑영대가 사도천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것도 다 분쇄곤 덕분이오. 아니, 그것보다 흑영대가 불산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좀 전의 그놈도······ 놈의 인상착의에 대해 말해 보시오.”
유장해는 좀 전에 철혼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거리가 멀었던 데다 철립이 그늘을 만들어 놓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입 꼬리가 말아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설마 흑수라는 아니겠지. 맹주부에 있어야 할 놈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도 이런 인간들과 아웅다웅하면서 말이야. 아닐 거야.’
유장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득천과 등룡곡주를 번갈아 보니 가득천이 입을 열었다.
“각진 얼굴이라 제법 강한 인상이오. 어렸을 땐 없었는데, 얼굴에 상흔이 있더이다.”
“망할!”
가득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장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유대협!”
“놈이오! 놈이란 말이오!”
자세한 설명도 없이 허둥지둥 신형을 날리는 유장해의 모습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지만, 가득천과 등룡곡주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십전철가 정문 앞의 거리에 일백여 숫자가 진을 치고 있었다.
철혼이 나타나자 뒤쪽에도 그만큼의 숫자가 나타났다.
십전철가 안에도 개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철혼은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성큼 걸었다.
보보마다 살의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저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였다.
십전철가를 인질로 삼았으니, 그 대가로 상상도 못할 혈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오른손을 움직여 칼자루를 쥐었다.
- 죽여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라!
놈이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놈이다.
그래도 싫지는 않다.
무인이 칼을 쥐었다 함은 죽이겠다는 것이고, 놈을 쥠으로써 보다 많은 적을 벨 수 있었으니까.
“이놈!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이고 오는 것이냐!”
철혼이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백룡보주 백문초가 호통을 질렀다.
십전철가 안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철가의 사람들이 죄다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철마방의 불나방들이 여차하면 베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꿇어라!”
백문초가 호통을 질렀다.
네놈이 무릎을 꿇지 않고 배기겠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옆에는 풍림당주 유가원과 천리표국주 동중산이 준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 속에 이리의 잔혹한 습성이 가득하다는 걸 광주 땅의 민초들이 모두 아는데 말이다.
뒤쪽에는 철마방주인 흑혈도부(黑血屠斧) 구포라가 두 자루의 도끼를 움켜쥐고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는 도끼를 쥐지 못해 당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자신감이 역력했다.
그의 혈육이 허창(許昌)에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어떡해서든 죽여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상식을 어긋나기도 하는 법.
철혼은 칼을 뽑았다.
“네놈이 정녕 악마의 길을 가려는 것이냐!”
또다시 백문초가 호통을 쳤다.
순간 철혼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막아라!”
백문초가 소리치며 구포라를 향해 달려드는 철혼을 뒤쫓았다. 유가원과 동중산 역시 신형을 날렸다.
쩌-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구포라의 신형이 단박에 튕겨났다.
어찌된 영문인지 구포라의 가슴에 철혼의 칼이 박혀있었다.
흑도의 수괴인 철마방주 구포라를 반드시 죽여야 할 자로 여기고 있던 철혼이 혼전인 와중에 그가 도주할 것을 우려하여 도끼를 쳐내자마자 훤히 드러난 구포라의 가슴에 칼을 박아버린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한 백문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놈이 도주하려는 모양이오!”
쥐새끼도 구석으로 몰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다급해지면 고양이를 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놈의 뒤쪽에 철마방주를 배치했다.
다급해지면 놈이 그쪽으로 달아날 거란 심산이었다.
역시나 생각대로였다.
십전철가 사람들을 살리자고 무릎을 꿇을 수는 없을 터, 놈이 할 수 있는 건 도주뿐이다.
‘놈, 그렇다고 무기까지 버린단 말이냐! 서문노인이 무덤에서 한숨을 쉬겠다!’
백문초는 흰 이를 드러내 웃었다.
놈은 도주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철마방 패거리들 사이사이에 귀도림과 등룡곡의 고수들을 심어두어 놈의 걸음을 붙잡도록 지시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이 이상한 행동을 했다.
계속 도주를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철곤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흥! 어디서 곤법이라도 한 수 얻어 배운 모양이구나!’
백문초는 난화무영수(亂花無影手)의 절초로 철혼의 목을 꺾어버릴 생각을 하며 더욱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그때였다.
철혼이 오른손에 쥔 철곤을 뻗었다.
그러자 철곤의 끝이 구포라의 가슴에 박힌 칼자루의 끝과 맞물리며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로 결합되었다.
철곤과 칼이 결합하자마자 구포라의 가슴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핏줄기가 빠져나가는 칼날을 따라 빗줄기처럼 뿜어졌다.
쉬악!
백문초는 깜짝 놀랐다.
철곤과 결합한 철혼의 칼이 허공을 크게 가르며 그의 머리를 쪼개려고 들었다.
급히 신형을 비틀어 피하니 찰칵 소리가 들리며 칼이 쏜살처럼 날아가 뒤쪽에서 따르던 누군가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백문초는 누가 당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철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광풍처럼 들이닥치는 철곤들의 무자비한 파상공세를.
백문초는 기겁하여 난화무영수를 펼쳤다.
기쾌하게 뻗어나오는 손 그림자, 시작과 끝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다.
그러나 상대는 무자비한 악마의 철퇴였다.
시작이고 끝이고 가리지 않고 힘으로 두들겼다.
퍼버버버벅!
‘헉!’
백문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두 다리는 연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철곤에 실린 경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여 그의 두 손이 짓이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또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풍림당주인 유가원과 천리표국주인 동중산이 제 때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어딘가 두들겨 맞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촤자자자자장!
동중산의 검이 추혼십이검식(追魂十二劍式)의 검초들을 어지럽게 쏟아냈고, 유가원의 장도가 대홍유가도법(大紅柳家刀法)의 도격들을 사납게 펼쳤다.
그러나 두 자루의 묵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막는 정도이지 밀어붙이지 못했다.
‘굉뢰도 보다 더 강한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백문초의 가슴이 철렁했다.
허나 놀라고 있을 틈조차 없다.
서둘러 신형을 날려 놈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빡!
어느새 철곤이 내리쳐 막는다.
그리고 한 걸음.
놈이 한 걸음 움직이자 태산이 눈앞에 우뚝 선 것 같다.
부아악!
위맹하기 짝이 없는 파공음을 터트리며 철곤 하나가 달려든다.
“죽어라!”
“조심하시오!”
동중산과 유가원이 화급히 달려들어 보지만, 또 한 자루의 묵곤이 광풍을 일으키니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 사이 둔탁한 소리가 터지며 백문초가 대경한 모습으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오른손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수공(手功)을 익힌 자가 철곤에 맞아 손목이 탈구된 것이다.
철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당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범처럼 덮쳐갔다.
부아아악! 부악!
두 자루의 철곤이 위맹한 기세를 폭발시켰다.
세 사람은 좀 전과 같은 오만함을 잃고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당주님!”
“이놈, 죽어라!”
풍림당의 사풍도(死風刀) 염당과 혈풍조(血風爪) 척가량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끼어들었다.
섬전수(閃電手) 백이를 비롯한 백룡보의 고수들도 달려왔고, 천리표국의 표두와 표사들 역시 다급히 달려왔다.
퍽퍽! 퍼버버버벅퍽퍽!
철혼의 철곤은 절대적이었다.
달려드는 족족 나가떨어졌다. 병기를 휘두르면 병기와 함께 두들겨 맞았다. 두 자루 철곤에 실린 경력을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철혼의 손속은 무자비했다.
팔이고 가슴이고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머리통이 깨져 피를 철철 흘린 자도 있었다.
절대지세!
철혼 한 사람이 십여 명의 고수들을 일거에 밀어붙였다. 광주의 다섯 호랑이 중 세 사람이 힘을 쓰지 못했다.
두 자루의 철곤이 이토록 무서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백에 달하는 일반무인들은 고수들의 결전을 목격하고는 경악과 감탄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찰칵!
철혼의 묵곤이 칼과 결합했다.
당연하게도 칼의 길이만큼 공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스칵!
혈풍조(血風爪) 척가량의 팔이 잘렸다.
“철혼!”
죽을 힘을 다해 달려들던 백이의 섬전수가 왼손의 철곤에 맞아 박살이 났다.
손가락뼈가 바스러졌으니 최소 몇 년간은 수저조차 들지 못할 것이다.
철혼은 이리떼를 밀어붙이는 맹호 같았다.
달려드는 족족 일격에 나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왔던 길을 거슬러 십전철가의 정문 앞까지 밀고 왔다.
철혼의 뒤로 십여 장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삼십여 명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즉사를 면치 못했다.
“멈추시오!”
우레와 같은 대성일갈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철혼은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유장해가 장내에 도착했다. 귀도림주 가득천과 등룡곡주는 철혼의 배후가 되는 위치에서 멈추었다.
유장해는 양측의 사이에서 잔뜩 굳은 얼굴로 거리를 둘러본 후 철혼을 바라봤다.
“흑영대주가 맞는가?”
묻는 얼굴이 경직되어 있다.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눈알을 굴려 이쪽의 무위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만만하면 연수합격을 마다않고 사납게 물어뜯으려고 들겠지.
그러길 바란다.
아니, 그렇게 될 것이다.
만만히 보고 한 놈도 도주하지 말라고 적당히 상대해 주었으니까.
자, 이제 대답을 해줄까.
물론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