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패도무혼
작가 : 도검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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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554     추천 : 0     분량 : 7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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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그럼 살려줄 줄 알았소?

 

 

 

 유가원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진 바로 그 찰나의 순간.

 찰칵!

 유가원의 코앞에서 기음이 들렸다.

 칼자루 끝에 결합한 철곤이 풀리는 소리였다.

 퍽!

 철혼의 신형이 빙글 도는 것을 목도한 순간 유가원의 머리통에 아찔한 충격이 강타했다.

 퍼퍽! 촤좌좌좌좡!

 동중산과 가득천 그리고 상문충 세 사람의 공세를 일거에 쳐낸 철혼이 다시 한 번 빙글 돌아 한쪽으로 기우뚱 하는 유가원과 마주섰다.

 무자비한 눈빛.

 활화산 같은 분노가 깊숙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극도로 차가운 눈이었다.

 그 눈을 대하는 순간 철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퍽!

 유가원은 머릿속의 무언가가 산산이 박살이 나는 것을 느끼며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유 당주!”

 “이놈!”

 동중산과 가득천 그리고 상문충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유가원의 죽음에 자신들의 위기를 직감한 세 사람은 생사를 걸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은 흑수라였다.

 파바바바밧!

 철혼의 두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세 사람은 마치 홀로 철혼을 상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광풍처럼 쏟아지는 두 자루의 철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빙장을 펼치고 있는 상문충의 두 손이 점점 뻗기를 거부했고, 가득천과 동중산의 칼과 검이 제대로 휘둘러지지도 못하고 튕겨나기 일쑤였다.

 퍼퍽!

 결국 가슴에 일격을 허용한 상문충을 시작으로 가득천과 동중산 역시 팔과 어깨를 두들겨 맞고 말았다.

 세 사람이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철혼은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 땅을 향해 철곤을 뻗었다.

 찰칵!

 죽어서도 놓지 못하고 있는 유가원의 손에 잡힌 칼자루에 철곤을 결합한 철혼은 단숨에 끌어당겨 세 사람을 향해 겨누었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이군.”

 두곽을 죽인 흑영대원이 중얼거렸다.

 속도가 워낙 빨라 철곤 두 자루를 쥐었을 때가 더 무섭지만, 칼을 결합했을 때가 맨손일 때 다음으로 살기가 요동치고 있을 때였다.

 과연 철혼의 주위로 살기가 휘몰아쳤다.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살기였다.

 살기를 동반한 내기를 고스란히 개방해버린 때문이었다.

 철혼이 다가가자 세 사람이 뒷걸음쳤다.

 철혼의 무공에 주눅이 들었고, 살기에 짓눌렸다. 두려움과 당황이 엄습한 눈길로 살 길을 찾아 염두를 굴리는 모습이 참으로 꼴사나웠다.

 십 년 전에는 다섯이 뭉쳐 서문노인을 잘도 난도질 하더니 지금은 저리 살고자 바동거리는 꼴이라니.

 철혼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얼굴로 섬전처럼 움직였다.

 부아아악!

 공간을 가른 칼날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터트렸다.

 상문충이 이를 악물고 한빙장을 뻗었다.

 써컥!

 섬뜩한 절단음이 귓속을 파고들었고, 불같은 통증에 진저리를 치려는 찰나 두 번의 쇳소리와 두 번의 절단음이 연거푸 들렸다.

 “······!”

 상문충은 가득천과 동중산을 돌아봤다.

 휘청이는 가득천의 가슴이 쩍 갈라졌고, 석상처럼 멈춰 서 있는 동중산의 목이 시뻘겋게 벌어지며 그의 머리통이 굴러 떨어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 죽여라! 어디 맘껏 죽여보아라!”

 

 양팔에서 전해져온 지독한 통증과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상문충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두 손이 잘린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순간 철혼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살려줄 줄 알았소?”

 “뭐?”

 눈을 부릅뜬 상문충의 눈에 섬광이 보였다.

 그의 목을 가르는 섬광이었다.

 죽음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그간 누렸던 풍요와 사치를 모조리 빼앗아 가버렸다.

 광주의 다섯 맹호들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천하가 지옥에 잠겨도 여전히 광주를 지배할 것 같던 이들이 한꺼번에 죽은 것이다.

 이 믿지 못할 비현실적인 상황에 거리는 온통 정적에 휩싸였다.

 다섯 맹호들을 따르는 무인들이 아직 수백이나 남았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함부로 움직였다간 자신들의 머리통 역시 땅에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주박처럼 속박해버렸다.

 거리 곳곳에 숨어서 지켜보던 양민들은 자신들 위에 군림하던 맹호들이 죽었지만, 환호를 지를 수가 없었다.

 거리에 흐르고 있는 참혹한 죽음이 그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은 때문이었다.

 세상이 달라졌음을, 아니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려면 며칠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몫이고, 철혼은 자신의 복수를 마쳤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허나 아직이다.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 마무리가 남았다.

 혈지옥도의 한복판에 선 철혼은 우두커니 서 있었고, 거리를 채우고 있는 수백의 사람들은 숨죽이고 기다렸다.

 철혼의 침묵에 거리는 지독한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이런 죽음 같은 분위기와 동떨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대주답지 않군.”

 “틀렸다. 대주답게 하고 있다.”

 “틀렸다고? 저게 대주다운 거라고? 대주 실력이면 한두 합에 목 하나씩 떨어져야 정상 아냐?”

 “그래서 대주다운 거다.”

 “뭐?”

 “상대가 강하면 몸을 사리는 법이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저들 다섯으로 대주의 복수가 끝이라고 생각해?”

 “아니냐?”

 “발본색원, 삭초제근. 십전철가와 광주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씨를 말려야 해. 그게 대주 생각일 거야.”

 “지금 전부 죽이면 되잖아.”

 “숫자가 부족해. 늙은 너구리를 포함해서 전부 오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의 상황만으로 씨를 말렸다간 감찰부가 개입하게 될 거다.”

 “그럼?”

 “그래. 귀찮지만 이계를 시작해야지.”

 십전철가 사람들을 구해준 흑영대원들은 그 같은 대화를 나누며 철혼을 향해 다가갔다.

 이때 그 대화를 들은 철화옥은 철혼을 바라봤다.

 야차와 같이 난폭한 모습으로 싸우던 철혼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 목을 간단히 잘라버리는 냉혹한 모습에 그의 피 역시 그렇게 차가운 건 아닌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철혼이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다행히 흑영대원들의 대화에 그녀가 바라보는 모습은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악마가 되어서라도 십전철가와 광주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저런 겉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저런 겉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까 봐 경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쓰러웠다.

 안타까워 그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세 명의 흑영대원들이 철혼의 뒤로 섰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한쪽 거리를 채우고 있던 무리들이 화들짝 놀라 좌우로 갈라서더니 그 사이로 일단의 무리가 걸음을 재촉했다.

 다섯이었다.

 선두에는 털북숭이 장한과 한 명의 여인이 보였다. 한 걸음 뒤로 날카로운 기도를 유지하고 있는 세 명의 장한이 따랐다.

 하나 같이 새까만 장포를 둘렀다.

 철혼과 같은 종류의 철립을 쓰고 있었다.

 불산에서 귀면살을 곤죽처럼 두들겨 팬 후 어디론가 끌고 사라진 이들이었다.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와 죽음이 질펀한 거리를 거리낌 없이 걸어간 다섯 사람은 곧 철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며 절도 있게 포권했다.

 “대주를 뵙니다.”

 굵은 목소리가 선두에 있는 털북숭이 장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철혼은 그들의 몸을 순식간에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철마방은?”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이로써 광주의 흑도가 처리되었다.

 수장을 잃었지만 백룡보와 귀도림 등 광주를 지배하던 다섯 개 문파가 아직 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놓고 민초들을 등치고, 화류 여인들에게 빌붙고, 배수와 도둑 등 하오잡배들을 관리하는 등 철마방이 했던 온갖 더럽고, 추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으지 못한다.

 그건 스스로를 흑도로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짓을 했다간 결국 정도영웅맹이 나설 빌미가 된다.

 십 년 전, 서문노인은 그 같은 생리를 간파하고, 가장 먼저 철마방을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일의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렸다.

 사람의 도리를 지나치게 따진 때문이다.

 결국 철마방이 제공한 달콤한 상납금에 맛을 들인 다섯 맹호들이 나설 시간을 주고 말았다.

 ‘결국은 마찬가지야. 서문노야께서 철마방을 없앴어도 저들은 틀림없이 나섰을 거다. 노야를 죽이고, 적당한 인물을 내세워 제 이의 철마방을 세웠겠지.’

 철혼은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있는 백이를 바라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망연자실 넋을 놓더니 곧 철혼을 향해 악을 쓰고 고함을 질러댔다.

 백룡보의 무인들이 악착같이 붙잡아 철혼을 향해 달려들지 못하게 막았다.

 철혼은 그들을 바라본 후 귀도림, 천리표국, 풍림당 그리고 등룡곡의 무인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복수에 집착한다면 살 것이고, 양민들의 고혈에 눈독을 들인다면 죽을 것이다. 모조리!”

 철혼의 말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염왕의 판결과도 같았다.

 그러나 인간은 유혹에 약한 동물이다.

 한 번 경험해 본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철혼 역시 잘 알고 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철혼은 시선을 돌려 털북숭이 장한을 바라봤다.

 “일조장과 함께 이곳을 정리하도록.”

 철혼은 그 명령을 내리고 십전철가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남은 건 서문노인의 바람대로 사람의 도리와 시장의 원칙에 의해 광주의 상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걸 책임지고 해내고 지켜나가야 할 사람이 철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가주.

 놀람과 후련함 그리고 장래의 일에 대한 두려움이 복잡하게 뒤엉킨 얼굴이었다.

 ‘애초 서문노야를 끌어들인 건 가주님이셨습니다. 그러니 목숨을 위협당해도 결코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게 바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선택은 철가주의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시선을 돌리니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쥐고 있는 철화옥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뒤에 핼쑥한 얼굴로도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는 왕노인,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여노인, 감노인을 비롯한 십전철가의 식구들이 보였다.

 철혼은 십전철가의 정문을 넘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들이다. 하지만 해줄 말이 별로 없다.

 “끝난 게냐?”

 철중양이 물었다.

 철혼은 철중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끝일 수도 있고, 이제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철중양.

 허나 곧 철혼의 말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구나.”

 철혼은 시선을 돌려 철화옥을 바라봤다.

 가슴을 얼마나 졸였는지 꼭 쥔 손과 얼굴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철혼은 가볍게 웃어주었다.

 십 년의 간극을 넘어 그가 할 수 있는 배려는 그게 다였다.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잘 했다. 내가 다 속이 시원하다. 암, 잘했고말고. 네놈이 꼭 해낼 줄 알았다.”

 왕노인의 호탕한 소리가 없었다면 또다시 철혼이 먼저 얼굴을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왕노인의 큰소리에 철화옥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철혼을 쳐다봤다.

 그 사이 철혼은 왕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왕노인은 철혼의 어깨를 두들겨준 후 철중양을 돌아봤다.

 “가주님, 오늘 같은 날 술이 빠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함세.”

 “아니 왜요?”

 “하아, 사람이 이토록 많이 죽었는데, 술이 먼저인가?”

 철중양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철마방 무인들 뒤로 시체들이 즐비했다. 흑영대 세 사람이 도륙한 철마방의 무인들이었다.

 “저놈들이 괴롭힌 사람들이 흘린 피눈물을 생각하면 못 마실 것도 없습니다. 아주 흥겹게 노래도 부르겠습니다.”

 무려 십오 년이었다.

 그 긴긴 기간 동안 폭력, 강간, 살인을 서슴지 않는 철마방의 흉악무도함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걸 잘 아는 철중양이기에 더는 말을 못했다.

 이때 철혼이 철마방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염왕이 다가오는 것 같아 철마방의 무인들은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날 봐.”

 나직한 철혼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실려 있어 철마방의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철혼의 차가운 눈을 확인하고는 분분히 고개를 떨어트려야 했다.

 “너희들이 숨을 쉬고 있는 건 전부 죽이라는 내 명령을 거부한 수하들의 자비심 덕분이다. 다행히 내 기억력이 좋아 네놈들의 얼굴을 모조리 기억했으니 어디엘 가든 또다시 흑도에 몸담아라. 그렇게 해서 꼭 내 눈에 띄어라. 그때는 내가 손수 죽여주겠다.”

 염왕의 판결도 이보다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

 철마방의 무인들은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극도로 차가운 철혼의 살기가 모두의 신경을 단단히 옭아맨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동료들의 시체를 가지고 전부 사라져라.”

 철혼의 말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허나 곧 철혼이 진각을 밟으며 거듭 소리치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갈라지고, 쪼개진 동료들의 주검을 챙겨들고는 혼비백산한 몰골로 허겁지겁 십전철가 밖으로 도망쳤다.

 “저것들 말대로 한 번 흑도는 영원한 흑도다. 모조리 죽여 버려야 했다.”

 왕노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제겐 수하들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왕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과연 왕노인이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철혼의 이어진 말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주귀들이 오는군요. 술이 충분히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왕노인이 철혼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흑영대원 여덟 명이 십전철가의 정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

 

 철혼은 서문노인의 묘 앞에 섰다.

 미리 준비해 온 술을 묘 여기저기에 잔뜩 뿌렸다.

 “앞으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십 년 만에 온 놈이 또 사라진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라고 찾아왔습니다.”

 복수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서문노인이 복수를 반길 리가 없다는 걸 잘 아는 때문이다. 자랑스레 복수를 운운할 정도로 통쾌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꼭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과거에 얽매이고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칼을 익혔으면 천하를 베어보라고 하더군요. 천하제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습니다만, 제 칼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지 한 번 가 보렵니다. 살아남는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복수심으로 살아온 세월이었지만, 늘 공허했다.

 복수를 마친 후에나 느낄만한 허전함이 언제부터인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 네 그릇은 대해와 같은데, 복수만을 담고 있으니 그런 게다.

 - 네 가슴에 천하를 담아라. 그 칼로 천하를 베어라. 공허함 따위는 깨끗이 사라질 게다.

 

 그 말이 옳았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공허함 따위는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를 집념의 불씨가 차지했다.

 스승이라 부르지 못한 맹주의 뜻을 완수하고 나면 활활 타오를 불씨였다.

 “이제 갑니다.”

 철혼은 공손히 절을 올렸다.

 잠시 아쉬운 시선을 던지고는 산을 내려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는 날 다시 찾아올 터였다.

 그 전에 광주의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위정자들과 늙은 탐욕이 바글거리는 복마전(伏魔殿).

 천하영웅맹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있는 진흙탕으로 가야만 한다.

 철그럭! 철그럭!

 흑수라가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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