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끌거리는 대학가의 술집들, 개강총회니 모임이니 하면서 최근 시작된 새로운 생활에 다들 한 껏 들뜨고 또 망가지기도 하는 모습들. 그래, 익숙하디 익숙한 대학가의 3월 밤이다.
늘 있는 밤 같지만,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밤.
탕! 탕! 탕!
"와~ 소맥 좀 말아봤는데?"
"대박이다-."
"자, 다들 원샷 하시는거에요-. 저부터 갑니다~."
야심차게 능숙히 소맥을 말아대는 미모의 여학우, '한여울'.
늘 술자리에선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일찍 귀가하곤 하던 그녀의 오늘따라 다른 분위기에 모두가 난리가 났다.
"이렇게 잘 놀면서 왜 이때까지 뺐냐 넌~!"
"푸하하!"
"아~. 제가 오늘 기분이 쬐~금 좋아서 그래요 선배님~."
"자~ 자 들어갑니다~!"
"와아아~!"
머리를 질끈 묶고 소맥을 원샷하는 여울이지만 이 어여쁜 2학년 여학우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는 남자들로 가득한 테이블에서 그녀의 신경은 온통 어떻게든 사수해낸 옆자리의 복학생 선배에게 집중되어 있다.
"선배님-. 선배님도 한 잔, 받으세요."
"하하, 그래 여울아."
그저 웃고 적당히만 리액셕을 취하며 있는 이 남자, 복학한 2학년 '서윤우'.
청량한 분위기의 보기드문 꽃미남 선배이기에 그녀의 이런 행동들에 다른 테이블의 몇몇 여학우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쟤 오늘 왜 저러니?.. 맨날 조용히 있더니만."
"컨셉 바꿨나보지.. 밥맛이야. 윤우선배한테 꼬리치는거지 지금?"
"여우같애. 윽. 재수없다 솔직히-."
하지만 그렇게 단지 잘생긴 복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꼬리치는 여자 후배 정도로만 비춰진다면 여울에겐 감사한 일이다. 지금 이 행동들은 겨우 그런것보다 훨씬 중요한, 장르 자체가 다른 이유이기 때문이지.
"선배, 많이 드신거 같은데... 같이 나가실래요? 저도 많이 취한거 같아요. 헤헤..."
"아. 그래. 바람 좀 쐬러 갈래?"
"네. 히히."
속닥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금새 나가버리는 둘에 탄식을 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남학우들.
"에이씨-. 야, 우리끼리 마셔 마셔."
"윤우 저 자식은 군대를 갔다와도 저 얼굴이 여전하냐."
"될 놈은 된다 이거지. 때려쳐!"
흐음~. 춥지만 맑은 바깥공기에 딱히 취하지도 않은 술이 깨는 기분이 든다. 천하의 한여울이가 소맥5잔에 갈리가 없지 않냐고.
"아... 어지럽다아..."
"아.. 많이 마셨어? 괜찮아?"
"헤헤, 네 기분이 좋아서... 좀만 기댈게요.."
선배의 어깨에 기대기까지 성공해버렸다. 됐어! 하하 나이스 한여울!
오늘 왠지 개강총회 느낌이 좋더라니 말이야.
그녀의 핑크색 원피스위로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꼬리가 일렁인다.
"선배 어깨.. 넓으시다."
올해로 스물 다섯 먹은 구미호인 나, 한여울. 구미호들이 매일 꼬리가 닳도록 꼬리를 쳐대는 일. 이 일들의 이유는 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지. 옛날부터 말하던거 있지, 1000년동안 남편한테 정체를 숨기면 구미호가 사람이 된다잖아. 사실 그거... 진짜다?
선배의 팔을 슬쩍 잡는다.
"팔이랑 어깨랑 좀 빌릴게요. 헤헤.."
물론 보통 사람이랑 사랑에 빠지면 다 되는 건 아니고, 그 사람은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줄 만큼 청렴한 기운을 갖고 있는 인간이어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인간들 틈으로 들어와 살아온지 어언 몇 년, 드디어 오늘 이 대학교 개강총회에서 청렴한 기운에 그것도 잘생기기 까지한 남자를 찾았다 이 말이다. 즉, 나는 인간이 될 기회가 제대로 생겼다 이 말이다!
"저, 선배..."
"얘 여울아~!!"
분위기 한창 좋으려 하니까 갑자기 이 분위기를 깨고 들어오는 지나치게 명랑한 목소리, 흰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해맑게 뛰어오는 이 친구는 대학 동기, 박예림이다.
"어..하하...예림아.."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예림의 악의없는 미소가 더 밉게 느껴지지만 어쩔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