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아이의 사랑
인적이 드믄 카페에 지수와 남편 재영이 마주 앉아 있다. 법원을 나와 집으로 가려는 지수를 억지로 재영이 할말이 있다며 붙잡은 것이다.
“그 동안 집나가서 어디서 지냈어? 걱정되서 어머님 댁에 찾아 가 봤더니 빈집이던데.”
“당신이 찾아 올까봐 친구 집에 있었어요. 이제 우리 남이니까 집에 마음대로 찾아온다거나 하는 행동 하지 말아요. 비밀 번호도 봐꿨으니까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 할 거고.”
“지수야. 나 좀 봐. 그렇게 외면하고 있으면 내가 말을 못하잖아.”
고개를 들어 재영을 바라 본다. 서로 마주 앉은 이 장면도 내일이면 과거가 되겠지. 그래 마지막 뒤돌아서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자 할 말 빨리해요. 이제 곧 당신이 무슨 엉뚱한 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머님이 수배령 내리실텐데 나 다시는 어머님과 마주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한참을 망설이더니 어렵게 재영은 입을 열었다.
“ 나... 미국으로 갈까해. 예전부터 그쪽 에이전시에서 연락도 있었고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떠나서 살아 보려고.”
뜻밖의 말에 절로 시선이 간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서로 안보면 감정 정리도 쉽겠지.
“그래요? 잘됐네요. 가서 잘 지내요.”
“후회... 없겠어?”
“후회? 무슨 후회요?”
이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날 잡아 앉혀 놓고는 새장의 새처럼 자신의 옆에 가만히 있기만을 원했던 사람. 나와 어머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어머님의 뜻대로 그저 잘 꾸며진 인형이 되서 자신의 와이프로 존재하기만을 바랬던 사람이 이제와서...
“우리 같이 떠나자.”
“뭐라구요?”
너무나 쉽고 간단한 말을 하고 있다는, 무슨 문제 있는 거냐는 표정의 남자. 이 사람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뭐지 이 알 수 없는 괴리감은?
“엄마 피해서 살자. 이혼은 서류상일 뿐 그곳에서 같이 살다가 엄마 마음 풀리면 다시 한국 들어오면 돼. 우리 그렇게 하자. 그게 싫으면 미국가서 다시 혼인신고 해도 되고. 거기까지는 엄마가 모르실거야. 지수 너도 내가 싫어서 이혼하잔 거 아니였잖아. 우리 잠시만 소나기 피해 있자. 나 너랑 진심으로 이혼 할 생각으로 도장찍은 거 아냐."
지수는 어이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이혼이 그저 엄마를 속이기 위한 장난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저 남자. 대체 난 이 사람에 대해 뭘 알고 지냈던 거지?
“앞으로는 내가 다 알아서 잘할게. 나만 믿고 따라와 줘. 응?”
“하... 기막혀. 청혼할 때도 당신 그랬어. 잘할 거라고 . 당신이 알아서 다 할테니까 당신만 믿으라고. 그 결과가 이거야.”
“이번엔 내가 다...”
“아니. 당신은 똑같을 거야. 지금도 이 상황을 그저 단순히 모면하기 위해서 버린 일쯤으로 취급하는 것 보면 변함 없을거야. 어머님이 미국 주소 알고 찾아 와서 난리치시면 또 어머님 치마폭 속으로 숨을 거야. 나 혼자 소나기 다 맞게 하고.”
“이번엔 다를 거야. 나를 믿어봐. 나 없이 한국에서 뭐하고 먹고 살려고? 위자료도 엄마가 주지 못하게 해서 한푼도 못줬는데. 미리 경고 하지만 방송일 다신 힘들 거야. 엄마가 다 막으실 테니까. 당신과 계약할 소속사 어디도 없을 거야. 방송계에서 엄마 기획사 힘 무시할 수 있는곳 없어. 자기 품을 떠난 사람을 엄마가 용서한 거 못 봤으니까. 그럼 어떻게 살려고?”
“ 당신...? 지금 나 협박해?”
“엄마 성격 알잖아. 방송가에 다시는 발 못 디딜 거야.”
“어떻게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어. 타인의 삶을 자신들이 좌지우지 하다니. 당신들이 사는 세상에선 그런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나랑 미국가자. 가면 앞으로 겪을 경제적 어려움 다 해결 될 거야. 그리고 엄마와의 사이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 될 거야.. 시간이 약이라잖아. 시간 지나면 엄마도 화 푸시고 당신 용서하실 거야”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정말 따로 없군.
“용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왜 어머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건데? 당신 진짜 어머님을 모르는 구나. 그렇게 쉽게 마무리 지으실 분이었으면 일을 이렇게 만들지도 않으셨어. 어머님은 오로지 내가.. 나 윤지수가 당신 며느리라는 사실이 마음에 안드시는 거야. 그걸 용납 못하시겠단 거라고. ”
“일주일 후에 출발이야. 제발 심사숙고 해줘.”
다급히 자신의 두 손을 잡는 재영의 손. 예전엔 이 손에서 따뜻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아무 느낌도 받을 수 가 없다. 억지로 잡힌 두 손을 빼내며 재영의 눈을 바라 봤지만 그 눈안 어디에서도 배려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손안에 있는 장난감을 뺐기기 싫어하는 아이의 눈빛. 저 눈빛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니...
“며칠이 지난다 해도 내 뜻엔 변함없어. 그 불구덩이에 다신 안 들어 가. 왜냐고? 이젠 사랑을 믿지 않거든.”
“내 앞에서만 그렇게 말하고 내가 아닌 서 민혁에게 다시 가려는 건 아니고? 엄마 말처럼 서민혁이 그리워서 내곁을 떠난다고 하는거야? 그래?”
마치 땡깡 부리는 아이처럼 말도 안되는 말을 쏟아 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진짜 저 사람을 사랑했던건가 하는 마음이 든다.
“당신... 진짜 ..최악이구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남아 있던 정마저 뚝뚝 떨어지게 해 줘서.”
“일주일이야. 일주일만 기다려 줄 수 있어. 그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다시 온다고 사정해도 받아 주지 않을 거야. 지금은 흥분 상태인거 같은데 차분히 생각하면 날 따라 오는 게 맞다고 결론 내려질거야. 기다릴께.”
“아니 . 굶어 죽어도 당신한텐 안가. 겨우 이런 당신을 택한다고 그 고마운 사람에게 상처 줬는데.이제와서야 바보 같이 난 그게 얼마나 모자라고 잔인한 행동이었는지 알게 됐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됐나봐.. 그래 ... 이게 맞을 거야. 그 사람에게 상처주고 나만 행복하면 안됐던 거야. 우리!! 두번 다신.. 보지 말자”
테이블을 박차고 카페를 걸어 나오면서 지난 시간 동안의 자신이 아까워 눈물이 났다.
그래 이건 지난 내 시간이 아까워서 흘리는 눈믈이어야만 한다. 절대 서민혁이란 이름을 들었기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어야 한다. 애써 그리워도 가슴에 묻고 다시는 떠올려서도 생각해서도 안되는 이름이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절대 잊지 말자 윤지수.
넌 그 없이도 잘 살 수 있어. 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잘 살아야만 해. 좀 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며 민혁씨를 떠난 자신이 그 사람이 그립다고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된다.
카페를 벗어나 정신없이 운전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예전 살던 아파트 놀이터에 와 있었다.
늘 그와 촬영이 끝나면 이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곤 했었는데...
그와 함께 앉았던 놀이터 벤치에 다가가 멍하니 앉아 하늘을 바라보니 옆자리가 허전하다.
그가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그때는 몰랐다. 그 사람이 나에게 최고의 의지처였다는 것을.. 재영에 대한 동경을 사랑이라 믿었던 그때는 민혁에 대한 숨 쉬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그 감정을 아무것도 아니라 치부 했었다.
그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며 매정하게 돌아 섰는데. 하긴 나에게 의지되는 존재. 날 위해 주는 사람은 이젠 사치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신은 늘 나에게 이렇게 잔인했다. 어려움 모르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서 아빠가 충격으로 돌아가시게 하더니 여배우로 자리 잡고 결혼도 해서 행복한 모습 엄마에게 보여 드릴 수 있겠다 했더니 잔인하게도 엄마를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지금... 난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고 달려가 안기고 싶은 사람에게 갈 수가 없다.
며칠 전 이혼 얘기를 말해주려 만난 그 사람은 너무나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그런 그에게서 나에 대한 마음은 단 한조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기대고 숨 쉴곳이 필요해서 찾아 갔던 것 뿐이었는데....
더 이상 그 사람은 나 윤지수의 남자 서 민혁이 아니었다. 난 내 최고의 친구 서민혁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6.그들의 멈춘 시간
특실 안 침대 옆 창가에 환자복을 입은 민혁이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지수의 이혼 기사 페이지가 펼쳐 있고 민혁의 손안엔 핸드폰이 들려 있다. 지수의 이혼기사로 도배가 되어있는 뉴스란을 보다 답답한 마음에 민혁은 무엇에라도 끌리듯이 사진 한 장을 열어 바라본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지수와 자신이 보인다.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사진이네. 그나마 이거라도 없었으면...”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병실 문이 열리며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닦달을 한 보람이 있다. 두시간만에 돌아오다니. 날 위해 엄청 돌아 다녔을 최실장님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반가운건 어쩔 수 없다.
“그래. 알아 봤어요?”
“서류 접수가 맞는 모양입니다.”
긴장한 목소리의 대답이 순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진짜로? 설마? 증권가의 찌라시가 아니고 정식 기사란 말인가?
“2개월 밖에 안됐는데? .... 이유는 ?”
“변호사 말로는 성격 차이라고 하는데...”
“그거야 듣기 좋으라고 한 포장이고. 정확한 이유요?”
“죄송합니다. 그것까지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하는 최실장이 무슨 잘못이 있나. 본인들에게 직접 묻지 않는 바에야 항상 발표되는 말이 진실인 것을.
“그럼 그 날 내게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건데.”
저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속안에서 나 아닌 다른 모습이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한다. 한번도 내뱉어 본적이 없는 욕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자제하고 있다.
“겨우.. 겨우 이러자고 그 난리를 치고 데려 간 거야?”
“진정하십시오. 흥분은 몸에 안 좋습니다.”
악물은 입술 사이로 격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며 민혁의 상체가 흔들리자 재익은 재빨리 민혁을 부축했다. 언제부터 열이 오르고 있었는지 민혁의 몸이 뜨겁다. 아마 자신이 나간 이후 쭉 계속 윤지수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아는 주인이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원망도 이어 졌으리라. 그녀 곁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의 어린 주인은.
"누우십시요. 열이 또 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서 머무르고 있는지 알아봐줘요.”
“네. 알겠습니다”
영 마음에 안들어 죽겠단 표정이다. 저 형은 늘 그랬다. 내가 지수일에 마음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내가 치료를 거부 하는 것도.
“친정 엄마도 안계신데 대체 어디서 지내고 있는 거야...”
억지로 침대에 눕히자 가뿐숨을 몰아쉬며 터져 나오는 첫마디다. 그녀 걱정보다 자신을 먼저 걱정하지. 지금 자신이 누굴 걱정 할 상황이 되느냐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이 허공중에 흩어질 잔소리일 뿐이겠지. 내 말이 어디 들리는 상황이겠냐고.
“그렇게 걱정 되면 그 날 잡지 그러셨습니까?”
그 날 잡지 그랬느냐고? 그녀가 날 찾아 온 그날? 지수가 온 게 언제였더라. 얼마 안 된 일이 분명한데 병이 심해지고 부터는 기억력도 함께 흐려지고 있나보다. 이러다 마지막 날에는 지수라는 이름조차 까먹는 것은 아닐까? 설마 아니겠지. 몸이 아프니 헛생각만 늘어나나 보다.
지수가 날 만나자고 한날은 가을이 무척 깊어가는 어느 날, 내 병을 알고 난지 얼마 안 된 어느 가을날의 하루였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카페 안에 마주 앉은 지수는 안 본 사이 너무나 말라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혀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곤 망설이듯 입을 연 지수.
“? ”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기사로 알게 될 테니까.”
계속 하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힘들게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저 이혼해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 뭐라고요?”
“그렇게 됐어요.”
“왜요?”
“어쩌다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라고요.”
내 머리는 정지가 되고 내 앞에 있는 그녀만이 보였다 . 이혼? 이혼이라구? 그녀를 바라보니 무언가 어떤 말이라도 내가 해주길 바라는 그런 표정이었다. 내 마음은 어서 그녀를 잡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고 . 하지만 내가 여기서 그녀를 잡으면 안 되는 거겠지?
“다시 잘 생각해봐요. 사람 다 거기서 거기인거예요. 애들도 아니고 맞추면서 살아가야죠.”
냉정하게 뿌리치듯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제 3자에게 충고하듯 그렇게 내뱉었다.
내 말에 당황한 빛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지수.
“다시 합치자고 하면 지는 척 들어 가 줘요. 배우가 아니고 부인이잖아요.”
빙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 봤다.
“힘겨루기도 너무 심하면 안 돼요. 알았죠?"
그렇게 마치 그녀에게 아무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이 냉담하게 말했었다.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는 내 몸을 훑어보니 씁쓸한 어조가 튀어 나온다.
“이 몸으로 지수를 잡으라고요?”
“도련님...”
“그렇게 안타까워 할 필요 없어요. 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니까.”
병실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 온다.
“CT 찍으러 가실 시간이에요.”
“아 네.”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에게 대답하는 최실장.
“뭐야. 치료 안 받겠다는데 무슨 검사? 선생님께 말 안 했어요? 그래서 지금 나 퇴원 안 시키는 거예요?”
“고열은 잡고 나가셔야 합니다. 염증 생겼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사모님 쓰러지시는 거 보고 싶으십니까? 어제도 밤새 못 주무셨다고 김 비서가 전해 왔습니다.”
“하아.... 설마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한 건 아니죠?”
재익은 병실안에 마련 된 휠체어를 잡곤 민혁을 보며 위협하듯 말한다.
“아직까지는 말씀 안 드렸지만 이번에 그냥 나가시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았어요. 가요 가.”
투덜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휠체어에 앉는 민혁을 보며 재익은 피식 웃곤 휠체어를 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