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결혼 계약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병실 안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재익이 보인다.
제길. 저 형은 어쩌자고 사실대로 지수에게 다 말했냔 말이다. 그 속내가 뻔히 보이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지수가 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달라질 수도 없는데....
민혁은 지수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지금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일단은 오늘은 보내야 한다. 여지를 남기지 말고.
“날 살리겠다고? 어떻게? 머리 제외하고 암세포가 온 몸에 다 전이 되서 수술도 안 된다는데 뭘 어떻게?”
“선생님이 항암 치료는 가능하다고 하셨다면서요. 혈액암이라도 완치율 높은 암에 속한다고.. 뭐든지 할 거야.”
“벌써 4기야. 난 젊어서 진행 속도도 빨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구. 또 그 사이에 의미 없이 고통 받는 건 당신이 아니고 나 서민혁이야.”
“왜 의미가 없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그 기회조차 얻지 못 한다구요. 돈이 없어서 당신이 거부하는 항암 치료. 시작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예요?”
“그래서 낫게 되면 ? 내 옆에 있겠단 소리가 무슨 소리인 줄은 알지? 난 내 사람이 아닌 사람 옆에 두는 사람 아닌거 잘 알지?"
엄포를 놓듯 차가운 어조로 말을 하자 지수는 잠시 기가 죽었다. 마음속에선 이 순간을 잡으라는 이게 내게 남겨진 마지막 기회라는 악마와 그녀를 위한다면 꼭 포기시켜야 한다는 천사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와이프 뿐이야. 당신이 하는 소리는 내 부인으로 있겠다는 소리야. 그래도 상관없다고? 내가 나으면 평생 내 아내로 살아야 하는데도? 당신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온 사람이야.”
“상관없어요.”
“사랑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며? 근데 사랑 없는 결혼을 하겠다고? 왜? 내가 당신에게 베픈 은혜가 그렇게 크고 감사했나?”
“이젠 사랑 따위 안 믿어.”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큰소리로 한다는 말이 사랑 따윈 안 믿는다구?
“....”
“나 당신 좋아해요. 그냥 좋아하는 맘으로 옆에 있음 안 돼는 거예요?”
헐. 지난 3개월 동안 대체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사랑에 목숨 걸고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보겠다던 그녀가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사랑을 안 믿는 단다. 가만히 두 눈을 바라봤다.
“그건 당신 맘이고. 만약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아.. 그. 그땐.. 건강해져서 다른 여자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땐 떠날 께요. 아무 말 없이.
그때까지는 당신 옆에서 당신 돌보게 해 줘요. 지난 신인 시절 당신이 내 옆에서 날 돌봐주고 응원해 주고 그래서 살 수 있는 용기를 줬듯이 이제 내가 당신에 해 줄 수 있게 해줘요.”
“.....”
“제발...”
“좋아. "
내 대답만을 기다리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 툭 터져나온 소리. 이. 이게 아닌데. 이럼 안되는데.
" 10년. 아니 딱 7년만 일단 함께 살아 보자.”
“7..7년이요?”
“그래. 만일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왜 싫어? 못하겠어?"
“아뇨. 해요. 해. 그리고 반드시 살아 있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거야. 근데 왜 꼭 7년이예요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 듯 당신 역시 모르는 거 아닌가? 한번 시험 삼아 살아 보자고.”
“난 아니예요. 이제 사랑 따위는.”
“세상일에 장담은 없는 거야.”
“ ... ”
“만약 그 사이에 내가 죽는다면 당신은 미망인으로써 권리는 누리게 해 주지.”
“그런 거 바라는 거 아니.”
“계약은 계약이니까. 진짜 사랑 없는 결혼 자신 있어? 난 사랑은 없지만 계약기간 동안은 아내로서의 모든 역할 확실히 요구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하고.”
“아. 아뇨, 해요.”
“언론 공개는 최대한 막아 보겠지만 장담 못해. 그리고 우리가 계약 관계인거는 우리와 최실장님만 알고 부모님조차 진실은 모르시게 할거야 그 어디에도 이사실 발설하면 .”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당황스러워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의연하려고 하는 저 표정.
예전의 지수를 보는 듯하다. 결혼하기 전 밝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나던 나의 뮤즈를.
“7년이 되기 전까진 당신과 나 완벽한 부부야. 완벽한 부부라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지? 난 그렇게 할 거야. 할 수 있겠어?”
“네!!”
“그럼 최 실장님 편에 계약서 보낼 테니 확인하고 싸인 해. 일은 그 이후에 진행하는 걸로 하지.”
“난, 지금이라도.”
“하루. 단 하루라도 생각해 봐. 내일 서류 보낼게.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후회 안 해요.”
“인생에 후회는 늘 함께 해. 장담하지 마.”
지수가 가고 혼자 병실에 남은 민혁은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 건지 어의가 없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기간 동안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고 또 섣부른 희망으로 맘 조리실 부모님을 뵙기 싫어 치료를 거부 했었다. 항암제가 의외로 맞아 4기인 자신이 완치 될 수도 있다는 교수님의 치료 설득을 거부하며 버티고 있었는데.
지수의 단 한마디 내 옆에 있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덜컥 일을 저질러 버리다니.
스르륵. 돌아보니 재익이 들어서고 있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심히 묻는다.
“잘 데려다 줬어요?”
“왜 그러셨습니까?”
“어? 안 반가운 목소리네? 치료 안 받는다고 성화 부릴 땐 언제고. 덕분에 받잖아요, 치료. 그러라고 지수한테 다 말해준거 아니예요? 실장님 덕분에 이게 뭐예요. 스타일 다 구기게."
“도련님이 그 분보다 더 힘드실 겁니다.”
담담히 귓가에 들리는 소리. 매정한 인간. 꼭 초를쳐요.
“알아요. 그리고 살가능성이 죽을 가능성보다 훨씬 희박한 것도 알고.
그래도 힘들어 하는 그 사람 보는 것 보다는 이게 나아요. 몰랐으면 모를까 지수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재익의 시선이 느껴진다.
“지수. 위자료도 못 받았다면서요. 내가 가고나면 엄마 성격에 지수 혼자 힘들게 살게 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도련님.”
“그렇게 보지 말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라도 지수 보고 갈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해요. 나 가고나면 힘들지 않게 잘 돌봐 줘요 . 그거 하나만 부탁해요. 내가 믿을 사람이 실장님 밖에 없네요.”
“그렇다고 계약 결혼이라니요?”
“다시는 사랑 안한다잖아요. 자신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날 앞에 두고도. 그게 지수를 편하게 해 주는 거예요. 여기.. 간단히 적어 봤어요. 여기에 맞춰서 서류 꾸며서 싸인 받고 공증 해 둬요. 유산 상속 건은 지수 모르게.”
내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 슥 훑어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다.
“도련님? 이건 ?”
“나 죽고 나면 다 소용 없는 돈 이예요. 지수에게 주든 사회에 기부하든 엄마 아버진 아무 말 안하실 거예요. 그 외에는 지수가 추가하고 싶은 거 있다면 들어 주고.”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대답 듣고 나니 마음 놓이네. 얼굴 펴요. 나 지금 당장 안 죽어요. 지수가 살리겠다잖아요. 혹시 알아요? 기적이 일어날지. 그만 가보세요. 너무 늦었어요. 저 이만 잘께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한참이 지나도 형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낮은 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그래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훗. 역시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나 아직 잠 안 들었거든요. 그렇게 혼자말 해도 다 들린다구요.
10. 7년 후
눈이 소복히 쌓인 산 . 벚꽃이 활짝 핀 가로수길. 물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이 물든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은 어느 새 자신의 주변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곤 한다. 민혁과 지수가 계약 결혼을 한지 어느 새 7년. 그사이 이둘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지수의 지극정성 어린 간호 덕분이었는지 민혁은 4차례에 걸친 항암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담당 교수에게 관해 판정을 받았고 5년째 추적 치료 중이었다. 그리고 항암 치료 직전에 급하게 혼인 신고를 하고 냉동 보관한 정자를 가지고 지수는 묵묵히 힘든 인공 수정 과정을 버텨냈고 둘 사이에는 어느새 5살 아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민혁의 완치 판정을 위해 병원으로 가는 날이다. .
도우미들의 움직임이 분주한 주방. 거실 가운데 소파에는 은서가 앉아 신문을 보고 있고 안방 문과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널찍이 보인다. 지금 이집안 어디에서도 7년 전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층에서 지수가 훈이와 함께 아래로 내려오고 은서가 내려오는 두 모자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본다.
“우리 훈이 유치원 가는 구나.”
“네 할머니. 잘 다녀오겠습니다.”
90도로 폴더 접듯 배꼽 인사를 하는 훈이를 바라보는 은서의 눈에서는 꿀이 떨어진다. 훈이를 보던 은서는 옆에선 지수를 닥달하기 시작한다.
“너 왜 이러고 있어. 훈이는 김 비서 보고 데리고 가라고 하고 넌 얼른 나갈 준비해.”
“아직 시간 있어요. 훈이 버스 태우고 준비해도 돼요.”
“오 기사 금방 올 거야.”
“지금부터 준비하다가는 저 떨려서 진료 시간까지 저 못 버텨요 어머니.”
지수의 두 손을 꼭 잡는 은서의 두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넌 들...”
무슨 정신으로 훈이를 보내고 오기사 차를 타고 병원으로 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지도 자신의 손을 꼭 감싸 안아 주는 민혁의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알았다.
걱정 말라는 듯 검사실로 들어간 민혁을 기다리는 복도에서의 십 여분이 마치 몇 십년은 되는 것 같았다.
책상위에 모니터가 놓여있는 진료실 안에서 의사와 마주보고 있는 이 순간도 입술이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 꼭 잡은 두 손은 땀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모니터를 유심히 쳐다보는 교수님을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럼 어디 볼까요? 관해 판정 후 5년이 지났는데.... 긴장 되시죠?”
민혁과 지수 서로 두 손을 맞잡으며 의사의 말에 집중한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축하드립니다. 완치 되셨네요. 암세포 재발견 소견 없으십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이 다 정상입니다. MRI, PET, 혈액 검사 등 모든 검사에서 정상판독 입니다. 1년 마다 정기 검진만 계속 잘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정말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둘이 서로 마주보며 기뻐 웃는 두 사람을 보며 의사 선생님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지난 시간 동안 환자 본인도 본인이지만 부인께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집에서 지속적으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