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와 여인 함께 나온 정면에 서 엔터라는 로고 밑에 안내 데스크가 있다. 지수 데스크로 다가가고 여직원 두 사람에게 일어나 웃으며 응대 한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오셨나요?”
“저...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는 지수를 밀치며 함께 내린 여인이 앞으로 나선다.
“이 도희라고 해요. 김 실장님과 약속 되어 있어요. 좀 불러주죠.”
이때 복도 저쪽 끝 방문이 열리고 재익와 서린 함께 걸어 나온다.
서린에게 뭔가 말을 하던 재익이 지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깍듯이 인사를 한다.
“오셨습니까? 오시는데 불편 하지는 않으셨구요?”
“네? 아... 네.”
“내 손님이예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하던 일이나 마저 봐요.”
"네. 이사님. 알겠습니다."
도희가 재익이 깍듯이 대하는 지수를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서린이 잽싸게 도희와 지수 사이에 들어서며 도희의 시야를 가로 막는다.
“어서 오세요, 이도희씨. 생각보다 빨리 도착하셨네요?”
“네..네. 그렇더라구요.”
도희 계속 지수 주변으로 시야가 맴돌자 서린이 도희의 팔을 움켜 잡으며 주위를 끈다.
“도희씨. 제 사무실로 가시죠?”“
“네? 아 네 실장님.”
서린은 도희를 데리고 가며 지수 바라보곤 눈인사를 건네며 지니간다.
서린과 도희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그제야 지수는 마음 놓고 재익에게 인사를 건낼 수 있었다.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자주 못 들려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보고 싶어 하세요. 주말에 한번 들리세요. 좋아하시는 불고기 맛있게 재워 놓고 기다리고 있을 께요,”
“아! 네...”
민망하다는 듯 멋쩍어 하는 재익을 보곤는 환한 미소를 짓는 지수의 모습은 아까 로비에서 보였던 동일 인물이 아니듯 당당해 보였다.
“대표님. 지금 회의 중이시라 못 나오십니다.”
“아. 네 . 바쁘다고 들었어요. 전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지수가 건네는 서류를 바라만 보고 서 있던 재익이 지수 곁으로 다가와 나직히 속삭인다.
“대표님실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보내드리면 제가 혼납니다.”
“실장님.”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수에게 재익의 진지한 어조가 들려왔다.
“대표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저 살려 주십시오. 이번에도 그냥 가시면 저 회사 짤립니다.
“하.하. 설마요.”
“ 가시죠? 금방 끝나실 겁니다.”
“네...”
어절 수 없이 재익에게 이끌려 지수는 회사 복도로 들어선다.
재익과 안으로 들어가던 지수의 눈에 서 엔터의 여러 사무실이 보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의 모습을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던 중 유리창 안으로 회의실 안의 민혁이 보였다.
직원의 말을 듣고 있다가 지수를 발견하곤 눈으로 아는 체 하는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 지수는 체념한 표정으로 재익에게 들고 있던 서류 건네준다.
“이거. 민혁씨 주셔야죠.”
“아. 네. ”
그제서야 지수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은 재익이 어떤 방문 앞에 서며 문을 열어준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저 어디 도망 안 갈께요. 그러니까 가서 편히 일 보세요.”
웃으며 자리를 뜨려는 재익을 뒤로 하고 지수는 민혁 사무실에 들어선다. 아담하고 심플한 별 장식 없이 짙은 오크 색 책상과 책장 그리고 한 쪽에 소파가 놓여 있다.
“차 가져다 드릴 테니 천천히 둘러보십시오.”
“아. 네. 아주 편안히 앉아 있을게요, 얌전히. 그럼 되는 거죠?”
“네. 편안히 계시면 됩니다.”
재익이 서류 들고 나간 뒤 지수는 찬찬히 7년만에 처음으로 들어 와 보는 민혁의 사무실을 둘러 본다.
책상 위에 대표이사 서민혁 이라는 명패가 보이고 무엇엔가 이끌리듯 책상에 다가가 대표명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감회에 젖는 지수.
이때 문 밖에서는 바삐 회의실에서 나온 민혁이 문을 열려다 말고 망설인다.
잠시 문 앞에서 천천히 숨을 고른 민혁이 문 열고 들어오다 책상 앞의 지수 보며 걸음 멈추고 바라본다.
‘당신이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 난 당신에게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지수는 민혁의 등장을 못 알아채고 명패만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 있다.
‘떠난다고 하면 쉽게 보낼 수 있을까?’
먹먹한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보던 민혁의 눈에 7년 전 자신에게 울부짖으며 말을 하던 지수가 떠 올랐다.
“아직.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아니 이젠 대체 사랑이란 게 뭔지조차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는 알아요. 오아라라는 사람이 날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날 자기 아들과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여자라는 거. 내가 그 사람을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거. 그 사람과 있었던 지난 2개월이 나에겐 너무나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다시는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게 해 줘요. 나 너무 힘들어.”
자신이 이젠 자유라는 걸 알게 되면 지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재영의 일을 알면 그녀는 과연... 그러나 이내 자신과 그녀 사이의 훈이가 떠올랐다.
훈이 일이라면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 하는 지수가 자신과 훈이를 놔두고 떠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재영과는 달리 자신과 지수 사이에는 훈이라는 연결 고리가 존재 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에 잠긴 사이 인기척에 돌아보다 지수는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곤 미소 지었다.
“민혁씨.”
그래. 저 미소를 한번 믿어 보자. 날 살리기 위해 온 정성을 다 했던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한번 믿어 보자.
14. 진실은?
민혁의 사무실에서 민혁과 지수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 엔터 회의실에선 준수와 숙정 그리고 직원들이 깊은 고뇌에 잠겨 있었다.
“아니. 갑자기 사망이라니. 왜 이제야 황 작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거예요? 이런 경우도 있어요? 이사님! 황재영 정도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이게 말이 돼요?”
“안되지.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까 나도 지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쪽 에이전시에서는 뭐라고 그러는 건데요?”
“황 작가가 죽기 전 49일의 2차 저작권 권리를 누군가에게 넘긴 모양이야. 자신의 죽음을 공표하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그 담당자가 처리 할 거라고 그렇게만 말하고 있어.”
“그럼 저작권 확보해서 지수 컴백 시킨다는 대표님 계획은요?”
“지금으로써는 올 스톱이야. 방법이 없어.”
“지수 아직 설득조차 못했는데 저작권 확보조차 제동이 걸리면?”
이때 재영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 재익을 향해 숙정이 다급하게 묻는다.
“지수는요?”
“사모님 대표님과 함께 대표님실에 계십니다.”
숙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 쉰다.
“정말 산 넘어 산이네요.”
“그래도 오늘은 회사 안까지 들어오셨잖습니까?”
“회사 창립한지 7년입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서 엔터 사모로 외부 활동을 안 했어요. 오죽하면 이 업계에서는 서 대표 아직 총각인 줄 알아요. 그 정도로 조용히 있던 사람이 다시 나올 결심을 하게 하는 거. 그리고 언론이 호의적이게 하려면... 어떻게든 49일을 확보해야 하는데”
“진짜 고비는 지수를 결심 시키는 일 일거예요. 결혼 후 아직도 결혼 기사 한 줄 안내고 있을 정도로 자신을 철저히 숨기며 대표님 완치와 내조에만 신경 쓰며 살았는데 대중 앞에 다시 나서라고 한다면 말 안들을 거예요.”
“배우로 활동을 하시던 안하시던 대표님이 완치 판정 받은 이 시점에서는 사모님 존재 발표해야 합니다.”
“빙고. 박 과장.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더 이상 시간 끌면 이상한 소문 날 수 있어. 안 이사 어떻게 김실장이랑 둘이 사모님 좀 설득 시킬 수 없을까? 두 사람 말이라면 먹힐 것도 같은데”
“대표님이 일단 자신에게 맡겨 달라십니다.”
준수가 숙정을 닦달하고 있는 순간 아무 말 없이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지켜보던 재익이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이에 재익에게로 돌아가는 준수의 시선.
“언제요?”
“대표님실로 들어가시면서요.”
“그럼 우린 지금까지 뭐 한 겁니까?”
“대표님이 사모님은 자신이 맡을 테니 여러분은 49일 2차 저작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수배해서 어떻게든 컨택하라고 하십니다. 내일까지.”
“내일이요?”
“네. 내일”
회의실에 있던 이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멘붕이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민혁은 지수와의 대화에만 빠져 있었다.
“차 많이 막혔어요? 오느라고 고생했죠?”
“아뇨. 별로요. 근데 회의 벌써 끝났어요?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지수씨가 왔는데. 오래 걸리더라도 빨리 끝내야죠. 대표 권한으로. 그 맛에 대표하는 거지 직원들 눈치 보려면 왜 월급주고 대표해요. 그냥 직원하지. 뭐하고 있었어요?”
“음... 대표실 구경이요.”
“그래, 소감은요?”
기대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혁을 보며 지수는 장난스런 어조로 대꾸한다.
“서 엔터 대표 사무실이 이렇게 생겼었구나.뭐 이런 생각? 대표 사무실이 너무 소박한 거 아니예요?”
“허. 참나.. 너무한 거 알아요? 대표 와이프씩이나 돼서 7년간 한 번도 사무실에 얼굴을 안 보이다니. 그래 놓고 한다는 소리가 소박? 사무실 인테리어 같은 건 아내가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올 일이 뭐 있다구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하는 지수를 보자니 민혁의 마음은 짠해 온다. 아직도 그렇게 조심스러운 걸까? 황재영의 아내에서 자신 서민혁의 아내가 된 것이 아직도 당당하지 못한 걸까? 아직도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인 걸까? 고민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지수는 얼른 말을 돌리려 한다.
“급한 일은 잘 해결 된 거예요?”
“뭐... 그럭저럭. 덕분에 살았어요. 참 저녁은요? 우리 아까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저녁 아직 이죠? 뭐 좀 먹었어요?”
앞부분을 얼버무리며 급하게 질문하는 민혁의 모습에 지수는 미소를 띄며 대답한다.
“하나씩요. 하나씩만 물어요. 당연하죠. 아직 아버님 도착 안하셨는데 어떻게 저녁을...”
“어. 아버지 회의 길어지셔서 아예 거기서 묵으시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오신다고 하셨다는데 연락 못 받았어요?”
“그래요? 어머님 아무 말씀 없으셨는데....”
“나한테 연락 하셨으니 지수씨에게 전달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의자 위에 걸쳐있던 자켓을 집어 들며 민혁은 지수의 손을 잡아 이끈다.
“우리 나가요. 저녁밥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어머니도 지수씨 고생했다고 맛있는 거 사 먹여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럼 어머님 훈이와 혼자 저녁 드시게 돼요, 안돼요.”
“어머님 명령이십니다. 그거 안 들으면 저 불효자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만들래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민혁을 보곤 졌다는 듯이 웃곤 민혁의 팔에 팔짱을 끼는 지수.
“맛있는 거요? 뭐 사줄 건데요?”
“글쎄요...”
민혁은 지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묻는다.
“뭐 먹고 싶어요?”
쿵. 요즘 민혁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 마다 지수의 심장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격하게 요동친다.
“음... 아.. 아무 거나요. 전 민혁씨와 같이 먹는 거라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
“하하 .과찬. 나가시죠. 공주님. 멋진 곳으로 안내 하겠습니다.”
크게 웃으며 사무실 문을 열어 젖히고 자신을 이끄는 민혁에게 끌려 나가는 지수의 두 뺨은 저도 모르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