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시 시작하자.
민혁의 차로 다정히 팔장 낀 체 걸어가는 두 사람. 차 문 열고 지수를 태운 후 운전석에 앉은 민혁은 차에 시동을 걸고는 다정히 지수를 바라본다.
“장소가 좀 멀어요. 차도 막힐 것 같은데 피곤하면 눈 좀 붙여요.”
민혁의 말에 슬그머니 지수 얼굴에 피어오르는 하품. 아침부터 종종 거리더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하아.. 그래도 되요? 솔직히 졸려요...”
“오늘 병원일로 더 신경 써서 그럴 거예요. 잠시라도 눈 좀 붙여요. 피곤한데 나 때문에 눈 부릅뜨고 있으면 내가 더 불편해요. 자요 좀... ”
“그럴까요? 그럼 다 오면 깨워 주세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걱정 마십시요.”
지수 눈 감고 의자에 기댄다. 민혁 그런 지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웃는다.
지수 잠을 방해 하지 않게 볼륨을 조절한 민혁의 차는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북한강을 따라 핸들을 잡고 있는 민혁의 표정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옆자리의 지수 상태를 세심히 신경쓰며 운전하는 민혁.
어느 새 한적한 시골 별장 진입로로 진입하는 민혁의 차. 민혁은 차를 세우고 시동 끄며 말없이 옆자리에 앉은 지수를 바라본다.
엔진이 멈추고 차의 진동이 멈추자 느낌이 이상한 듯 잠에서 깬 지수. 눈을 들어 주변을 살핀다.
“도착했어요? 도착했으면 깨우지...”
“방금요. 더 자도 되는데.”
민혁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준다.
"내려요."
열린 차 문으로 내리 지수.
“어디예요. 어? 여긴?”
밖의 풍경을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에게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에 그랬었죠.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 하겠다고.그래서 이제부턴 진짜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내리시죠, 아가씨.”
“어머님이 기다리실 텐데요.”
걱정스런 어투로 대답하는 지수.
“어머님께 말씀도 안들이고 일을 벌였을까요? 걱정 말고 들어가요. 다 허락 받았으니까.”
두 사람 현관 입구까지 다정히 허리에 손 두르고 걸어간다. 현관문 앞에 멈추어 서서는 민혁 지수를 바라본다.
“잠시만요.”
“ ... ”
지수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안으로 안아 올리는 자신의 행동에 지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민혁씨!!”
“문이나 열지. 나 힘들어. 빨리 안 열면 지수씨 떨어뜨릴지 몰라요.”
지수 손을 내밀어 현관문을 열고는 부끄러워 민혁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는다.
거실로 들어가는 동안 손을 민혁 목둘레에 두른 지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거실 테이블엔 와인병과 와인 잔이 초와 같이 셋팅 되어 있고, 벽난로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간접 조명이 쏘아진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촛불이 장식되어있다. 지수를 조심스레 내려주며 그녀의 표정을 살핀다.
“이..이게... 이걸 언제 다....”
지수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흐르고 그런 지수의 뺨을 다정스레 닦아주는 민혁.
“울지 마. 울라고 한 거 아니야. 난 웃으라고, 감동 정도는 받아줄거 생각하고 한 거지 이러면 속상해.”
“기쁨의 눈물이 라는 것도 있잖아요. 이걸 직접 다 했어요?”
주변의 둘러보며 휘둥그레지는 지수를 보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마음에 안 들어요?”
설마 아니겠지? 내가 얼마나 공들인 건데.
“으음.. 아뇨. 너무 예뻐요.”
다행이다. 좋아하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배고프죠? 우리 이제 밥 먹자구요.”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민혁과 지수가 식사를 마친다.
“잘 못 먹네. 맛 별로였나?”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자 금세 따스한 미소가 되돌아온다.
“나. 민혁씨 손님 아니에요. 그러지 마요. 아침부터 긴장 했더니 그런 가 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자꾸 쓰이네 신경. 참...그리고 ”
힘들게 자신이 입을 열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가 바라 본다.
“저기.. 이주 뒤에 회사 창립 7주년 파티가 있을 예정이야. 이번에는 당신도 꼭 참석해 줬으면 하는데?”
“...?”
역시나 내말에 당황하는 그녀.
“내 병도 다 나았잖아요. 이번엔 나와 꼭 같이 가 줘요. 그럴 수 있죠?”
“네? 그게....”
“지수씨 그런 자리 싫어하는 거 아는데 이젠 알릴 때도 됐어요 언제까지 내 옆자리 비워둘 수 없어요. 회사도 자리 잡았고.. 경제계에서 내 결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여전히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아직도 여전히 당신은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가? 대체 언제까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감추려 하는 걸까?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질타는 내가 막아 줄 수 있는데 아직도 당신은 세상이 두려운 건가? 왜? 그를 아직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여전히 일등 신랑감인 거 알아요? 5살짜리 애 아빠를 계속 총각으로 남겨 둘 거예요? 알려질 거라면 이번에 알려지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더 이상 비밀로 할 순 없어요.”
한참을 고민하던 표정이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민혁씨 뜻이 그렇다면...”
“여전히 내 아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불편해요? 아직도 인거에요?”
“아.. 아니예요. 그럴 리가. 불편한 게 아니고.. 언론으로부터 아직 자유로울 수 없잖아요. 혹여 라도 민혁씨나 아버님 회사에 저 때문에 피해가면.”
“절대 그럴 일 없어요. 나나 아버지가 그렇게 허투로 회사 키웠다고 생각해요? 내가 그렇게 안 만들어요. 나 못 믿어요?”
“아뇨. 믿죠. 세상에서 내가 제일 믿는 사람이죠.”
왜 그녀의 미소가 이렇게 서글프게 느껴지는 거지? 분명 날 보고 웃고 있는데 그 미소가 슬퍼 보인다.
“다만 항상 세상은 내가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걸 늘 빼앗아 갔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행복해 하면 무언가를 빼앗아 갈까봐 무서워요. 민혁씨.. 난 지금 또다시 그럴까봐 두려워요.”
“이번엔 내가 함께 있잖아요. 내가 지켜줄게. 세상 그 어느 것에게서라도. 한번 믿어 봐요. 알았죠?”
“네. 그럴게요. ”
“그리고 이거.”
조심스럽게 그녀 앞으로 상자를 내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수.
“뭐예요?”
“커플링.”
“커플링이요?”
케이스를 여니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 두개가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그동안 항암 치료 받느라 반지도 못 끼고 지냈잖아요. 이제부턴 끼려고요. 같은 모양으로 맞췄어요. 결혼반지는 크다고 잘 안 끼잖아요.”
아무 반지도 안 끼워져 있는 왼손을 그녀에게 내 보이며 난 진심을 다해 말했다.
결혼 계약 7년. 그녀와 나의 결혼 계약은 이제 끝나간다. 우리는 이 계약을 연장 시킬 것인지 아니면 종료를 시킬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나는 지금 그 결정을 내리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지금 내 말이 프러포즈라는 것을 그녀는 알까?
“반지... 끼워 줄래요?”
“ ... ”
“아직도 불편해?”
“아뇨.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애써 담담히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혁을 보는 순간, 아니 어쩌면 아까 민혁이 자신을 품에 안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다. 마치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첫 사랑을 시작하는 십대처럼. 지금 내미는 이 반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더더욱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럼 끼워줘요, 반지.”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반지를 빤히 바라보는 지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민혁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쿵쾅거림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붉게 달아오르는 두 뺨.
“아. 네.”
민혁에게 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이 사정없이 떨린다.
지수의 손이 왜 저리 떨리는 거지. 혼란스런 마음을. 이 결혼을 끝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는 것일까? 지수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지수에게 다가가 반지를 한손에 들고 나머지 손을 잡으니 내 손을 타고 그녀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자. 지수씨도.”
고개를 숙인 체 반지에만 온 신경을 두고 있는 민혁을 보고 있는 지수의 마음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왜이래. 민혁씨야. 네 남편이라구 정신 차려, 윤지수. 네 나이가 몇인데 십대처럼 남편을 향해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니.’
자신의 반응이 너무나 어이없는 지수는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민혁을 바라보고 있다.
“됐다. 이제 윤지수는 내꺼예요. 어디 도망갈 생각 말아요.”
쿵!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보는 민혁을 보는 순간 지수의 심장이 내려 앉는다.
“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지수야. 어디 가지 말고 그렇게 웃으며 아프지도 말고 내 옆에만 있어 줘.
“이 반지의 의미. 뭔 줄 알죠?”
“ 네.”
혹시 모른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내 마음에 답해 주듯이 지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결혼기간 7년에 동의 한적 없어요. 언제나 민혁씨 옆에 있겠다고 했어요. 완치 되고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그때는 떠난다고 했지만 .”
“난 나뿐 아니라 지수씨 역시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럼 내가 사랑 보다는 편한 사람이 , 의지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더 좋다고 했던 말도 기억해요? ”
“하죠.”
“난 아직도 민혁씨가 세상에서 제일 의지되고 편한 존재예요.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
하아. 의지... 편안한 존재... 난 아직도 그 정도 밖에는. 아니 그 것만이라도 감사해야 하나. 마음 속은 복잡했지만 지금 난 내앞에 있는 지수의 얼굴만이... 그중 특히 앵두같이 터질것만 같은 그녀의 입술만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는 정지하고 감정만이 살아있는 것 같다.
지수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움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난 지금 프로포즈를 했고. 그리고 우린 지금 아무도 없는 우리 둘만 있는 별장에 와 있어요. 단 둘이. 아무도 없는 곳에.”
두 눈이 동그레지며 나를 보는 지수. 그런 그녀를 향해 서서히 고개를 숙여 다가간다.
“우린 지금 신혼여행 와 있는 거..라구... 요”
말을 흐리며 그녀의 입술을 살짝 건드리자 그녀는 움찔 거리며 두 눈을 감는다. 그런 그녀의 입안으로 내 혀가 들어가고 그 뒤의 기억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16. 우리는 어떻게 될까?
침대 주변으로 흩어진 옷들이 보이고 침대 위에 민혁은 지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지수는 그런 자신의 손길을 느끼면서 눈을 감고 있다.
“지수씨 우리 내일 인터라켄 가요.”
갑작스런 내말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지수.
“네? 인터라켄이요? 스위스를 !내일 !가자 구요? 이렇게 갑자기요?”
“네. 비행기 표부터 다 준비 해 놨어요. 우리 내일 아침 바로 공항으로 가면 되요. 처음 신혼여행 하루 보내는 것으로 끝내게 해서 얼마나 미안했는데. 이건 예전부터 계획했던 거예요. 가서 승마도 하고 호수도 보고 그러고 와요.”
“그때 신혼여행이 뭐가 어때서요? ”
“항암 치료 직전이라 이곳에서 보냈잖아요. 하아.. 이번 여행 잡으려고 사무실 일정 엄청 힘들게 소화 했어요. 설마 안 간다는 말 하지 않을 거죠?”
“아... 그래서 지난 몇 주 동안 매. 일. 밤늦게 들어오고 나는 아는 체도 안 한거군요... 난 또 내가 싫어진 줄 알았죠.”
삐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며 말하는 지수를 보고 있자니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깨어 나려 한다. 애써 그 감정을 누르며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하.하.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내가 지수씨를 싫어한다고요?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
“아니라구요? 알았어요. 이번엔 믿어 줄께요.”
“믿어 주는 게 아니라 믿어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는 자신을 보며 까르르 미소 지으며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
“알았어요.”
내 품안에서 느껴지는 지수의 체온.
“아... 진짜 좋다. 이렇게 윤지수 안고 있으니까.”
“피.”
“어 ? 정말이라니까.”
“알았어요.... 믿는다구요.”
내 말을 자장가 삼아 서서히 잠에 빠지는 지수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 듬는 내게 느껴진다.
‘이렇게라도 널 잡고 싶어 하는 날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내 눈에 들어 온다.
지수야. 나 어떻게 해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