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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지로
작가 : 참마도
작품등록일 : 2016.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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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
작성일 : 16-07-20     조회 : 821     추천 : 0     분량 : 10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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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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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륙의 겨울은 혹독했다. 두터운 솜옷으로 몇 겹이나 둘러싸도 한기는 계속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겨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달랑 짐승 가죽 한 장만 걸친 사람이 있었다.

 그런 그의 주위에는 삼사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친구 관계는 아닌 듯 그들의 눈은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육 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에 두 손에는 묵빛 수투를 낀 채 치렁한 흑발을 차디찬 겨울바람에 날리며 한 손에 미첨도를 든 그는 발목까지 파묻힌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하얀색의 눈이 아닌 붉은색의 눈이 깔려 있었다. 그 붉은 눈을 만든 것은 발밑의 명군 복색을 한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갑자기 사내의 전면으로 인마가 갈라지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이 무리의 인솔자인 듯한 그는 두꺼운 양의 가죽을 서너 겹 겹쳐 둘러 입고 머리에는 양쪽으로 흰 털을 길게 늘어뜨린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나 그다지 길지 않은 것으로 봐서 지도자 급의 신분은 아닌 듯했다.

 “흐흐흐… 드디어 네놈도 이곳에서 죽는구나. 그동안 네놈의 손에 죽은 부족민을 생각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기필코 네놈은 나 마노토의 손에 죽는다. 바로 지금!”

 마노토라고 이름을 밝힌 중년인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창병들이 뒤로 십여 장 가량 물러났다.

 중앙에 포위된 인영은 그나마 쓰고 있던 짐승 가죽마저 벗어 던졌다.

 체온 유지도 좋지만 지금은 우선 목숨이 급했기에 거치적거리는 것을 벗은 것인데 드러난 그의 몸은 참으로 우람했다.

 전신의 근육은 인간이 부풀릴 수 있는 최대한도로 부풀어 있어 마치 찌르면 터질 듯했다.

 그 두꺼운 왼팔 전체를 둘러싼 묵빛 갑주, 그리고 수투를 낀 손에 쥐어진 팔 척의 미첨도. 스무 살의 건장한 청년이 된 무정이었다.

 “말이 많은 놈이군.”

 한쪽 얼굴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무정이 거칠게 말을 뱉자 마노토의 눈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한족 놈들… 곧 죽어도 큰소리구나! 기마대 돌격!”

 피를 토하듯 외치는 소리에 주위의 땅거죽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적장 마노토의 뒤쪽으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무정의 눈이 좁아졌다. 좁아진 그의 눈에 수십 기의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그는 팔 척의 미첨도를 어깨 뒤쪽으로 쳐들었다.

 두두두두두!

 만도를 치켜들며 달려오던 기마병들이 넉 장 정도의 간격으로 두 줄로 갈라지면서 적장을 스치듯 지나치자 무정은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신형을 날리며 미첨도를 휘둘렀다.

 쩌엉!

 첫 번째 격돌이 시작되었다. 적병의 만도와 수급이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중병기의 이점과 말을 타지 않아서 자유로운 방향 전환을 무기 삼아 간발의 차이를 노린 일격이었지만 무정의 손에 끝없는 저림이 느껴졌다.

 기마의 힘은 대단하다. 말의 속도와 그 위의 병사가 휘두르는 칼은 정확히 맞으면 아름드리나무도 두 쪽이 나는 힘이었기에 무정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한데 몇 마리의 기마가 그의 옆을 그냥 스쳐 지나가더니 그와 함께 오고 있는 기마의 전형이 변했다.

 뒤쪽에서 오는 말들이 방향을 틀어 무정을 향해 일렬로 빽빽하게 늘어서는 것이 보였다.

 옆으로 피해봤자 둘러싼 창병들과 드잡이질하다가 되돌아온 기마병에게 당하는 전형적인 여진족의 전술이었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달렸다.

 달려오는 말 앞에 이르는 순간 그는 다시 공중으로 신형을 솟구치면서 양손에 쥔 미첨도를 벼락같이 아래에서 위로 긁듯 쳐 올렸다.

 까강!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말 탄 병사는 땅 위로 떨어졌지만 무정은 손의 감촉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급히 착지하면서 미첨도를 바라본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의당 있어야 할 미첨도의 도신이 보이지 않았다.

 미첨도가 부서진 것이다. 워낙 추운 탓에 금속 재질의 미첨도가 얼어 있다 충격에 그만 부서진 것이었다.

 저들의 검이야 검집에서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겠지만 몇 시진째 쫓기는 무정에게는 미첨도가 어는지 어쩌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낭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마대는 계속 달려오고 있었고 이미 칠여 장 밖에 선두의 기마대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루만 남은 미첨도를 힘껏 던졌다.

 파라라라랑!

 끼히히힝!

 공중에서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미첨도 자루는 달려오는 말의 앞다리 사이에 정확히 끼워졌다. 말 다리가 꺾이면서 말의 목도 지면과 닿으며 부러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마병도 무사하지 못했다. 공중에 퉁겨져 날아가면서도 이를 악물고 전방을 바라본 그의 눈에 무정의 오른 다리가 휘둘러지는 것이 보였다.

 빠각!

 강력한 무정의 각법에 기마병은 왼쪽으로 방향이 조금 꺾여 날아갔다. 이미 생명은 꺼졌을 것이기에 무정은 신경을 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형이 또 바뀌었다. 이제 뒤쪽에서 돌아오는 기마병과 앞쪽에서 오는 기마병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

 암담했다. 이젠 무기도 없이 싸워야 했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넣어 투환침(投丸針)을 꺼냈다. 오 촌 가량의 투환침 몇 개가 그의 손에 쥐어졌지만 솔직히 별 소용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앞뒤로 달려오는 말들을 향해 제자리에서 신형을 한 바퀴 돌리며 뿌리듯 날렸다.

 히히히힝!

 두 필의 말에 두세 개의 투환침이 적중했지만 바로 튕겨 나갔다. 독이라도 발랐으면 나았겠지만 무정은 왠지 독만큼은 사용하기 싫었다.

 어쨌든 투환침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두 필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고 뒤에 오던 말들도 연쇄적으로 방향이 엇갈리고 있었다.

 무정은 눈을 빛내며 오른쪽으로 달렸다. 거기에는 아까 죽은 말이 쓰러져 있었고 그 옆으로 떨어진 미첨도 자루가 비죽이 보였다.

 맨손보다는 그 자루라도 쥐어야 했다.

 히힝!

 갑자기 달려 나가는 무정의 옆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정의 눈이 그쪽을 향했다.

 제어가 안 된 말이 폭주하며 날뛰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공중으로 신형을 날렸다.

 터엉!

 “커흑!”

 스치듯이 무정의 발끝에 말이 채였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그는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회전하며 땅으로 떨어져 갔다.

 퍼억!

 무정은 자신의 등이 물컹한 물체와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몸이 그다지 상한 것 같지 않기에 급히 신형을 세운 그는 등 쪽을 바라보았다.

 천운으로 아까 죽인 말 위에 떨어져 내린 것을 안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만일 차갑게 얼어붙은 맨땅에 부딪쳤다면 아무리 눈이 쌓여 있다고 해도 십중팔구 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부러진 미첨도의 자루를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모로 누워 있는 말 밑에 무언가 천에 싸여 깔려 있는 길쭉한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끌리는 느낌에 그는 말 뒤로 신형을 날려 자루인 듯한 그것을 잡아당겼다.

 “야압!”

 무정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말의 무게 때문인지 잘 빠지지가 않았다.

 이윽고 말의 시체를 들썩거리자 무엇인가 긴 것이 어느 정도 빠져나오다가 어디에 걸렸는지 더 이상 빠지지 않았다.

 이미 주위의 기마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고 더 이상은 시간이 없었다. 무정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았다.

 두두둑!

 말에 매어져 있던 가죽 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양팔의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지면서 자루를 둘러싼 천도 찢어지기 시작했다.

 쩌어엉!

 맑은 소리와 함께 무정의 손이 하늘로 들려졌다. 그는 뒤로 넘어갈 듯한 신형을 겨우 멈추고는 눈을 돌려 손끝으로 향했다.

 “…….”

 거대한 도였다. 약 칠 척 이십 촌의 길이에 도신의 폭은 육 촌이 약간 넘었고 도신의 길이만 사 척이 넘을 것 같았다.

 도신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살짝 휘어져 있는 것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찌르는 용도로는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았지만 한쪽의 날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서 있었고 백철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묵광이 서려 있었다. 참마도(斬馬刀)였다.

 언젠가 무정은 책에서 그 무기를 보았는데 무겁고 사용하기가 난해하여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였다. 그는 참마도를 거머쥐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마노토는 귀밑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저 참마도는 어제 습격한 마을 대장간에서 뺏은 것이다.

 은은한 묵광과 쩌렁쩌렁한 도명이 예사롭지가 않은 물건이어서 그걸 한 기마병에게 주고 보관하게 했는데 하필 그놈이 죽으면서 저 괴물 같은 놈에게 뺏겨 버린 것이다.

 “뭣들 하는게야! 당장 저놈을 찢어 죽이란 말이다!”

 마노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제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무정은 참마도의 무게를 가늠했다. 근 삼십여 근에 가까웠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가 쓰던 미첨도는 사십여 근 정도였으니 오히려 가벼워진 무기를 그는 한 손으로 비를 쓸듯 휘둘렀다.

 “이 정도라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무기였다. 무정은 전신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참마도의 도신에 묵빛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정은 몇 년 전부터 자신의 몸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조금은 괜찮지만 사용할 만하게 힘을 올리면 무기들이 부서져 나가 버렸다. 그래서 아까 미첨도에 함부로 묵기를 일으켜 사용할 수 없었다.

 두두두두!

 다시금 기마 부대의 돌격이 시작되고 어느새 삼 장 정도 안으로 들어왔다.

 무정은 참마도를 어깨 뒤로 힘껏 젖혔다가 허리를 틀며 묵빛 기류를 뿌렸다. 마치 모래가 뿌려진 듯 검은 기류들은 원호를 그리며 대기 중으로 사라져 갔다.

 파아앗!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피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정은 놀랐다. 아니, 기마병 전체도, 둘러싼 장창병도, 적장 마노토도 놀랐다.

 앞뒤로 달려오던 두 필의 말은 기수들과 함께 무정의 어깨 높이에서 잘려져 나갔는데 도는 닿지도 않았다. 이상한 기류에 양단되어 버렸다.

 무정은 참마도의 도신을 보았다. 멀쩡했다.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징징 울어대고 있었는데 단언코 처음이었다. 이런 병기를 손에 넣어본 적은…….

 “대단하구나. 이제 내게도… 친구란 놈이 생긴 것인가?”

 조용히 도신을 쓰다듬으며 무정은 중얼거렸다. 가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병기를 마치 친구처럼 소중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자신도 그럴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무정이었기에 그는 손으로 연신 참마도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초우(初友)… 그게 좋겠다, 내 첫 친우. 평생 함께할 수 있기를…….”

 미소를 띠며 무정은 다시 초우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수십이든 수백이든 수천이든 이젠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진하디진한 살소(殺笑)였다.

 묵빛 기류를 머금은 초우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잔혹한 풍경의 시작이었다. 한차례 눈이 오려는지 회색 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

 

 “헉… 헉……”

 털모자에 매달린 늘어진 흰 털 뭉치가 마구 휘날렸다.

 그가 탄 말은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죽어라고 채찍질을 해대는 기수는 마노토였다. 그 뒤로 십여 기의 기마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마노토님, 진정하십시오! 그놈은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마노토님!”

 뒤에서 소리치던 기마 병사는 마노토가 반응이 없자 속력을 배가했다. 그리곤 마노토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소리쳤다.

 “워워! 워!”

 가까스로 말을 진정시키며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말들도 따라서 속도를 줄였다.

 “이, 이놈, 뭐 하는 짓이냐? 어서 가야한다 빨리……”

 “마노토님!”

 벽력같은 병사의 고함에 마노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순간 그는 그자의 모습을 기억해 내었다.

 두려웠다. 그놈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게 움직이는 놈을 본 적이 없었다. 기마든 창병이든 그 망할 묵빛 기류가 닿을 때마다 두 동강이 났고 그런 그가 자신을 보고 목표를 바꾼 것을 알았을 때 마노토는 말고삐를 당겨 바로 도망쳤다.

 “이대로 가다간 아군 보병들이 못 따라옵니다, 마노토님. 부디 진정을…….”

 간절한 병사의 말에 마노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하얀 설원 위로 까만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남은 장창병들이다.

 창졸간에 그가 고개를 숙이자 말안장에 매어져 있는 궁(弓)이 보였다. 자신들의 부족을 가장 강하게 만들어준 무기…….

 마노토는 눈을 감았다. 진작부터 궁을 사용해야 했었다. 하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일단… 보병을 기다린다. 쉴 만한 곳을… 찾아보도록.”

 “…옛!”

 병사 하나가 높은 지형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멍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그 병사를 지켜보았다. 눈은 병사를 보지만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놈은… 사람이 아니야. 피에 미친… 혈귀(血鬼)… 혈귀야. 무정이란 놈은 혈귀야, 혈귀란 말이다!”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린 마노토의 말에 기마병들은 저마다 얼굴색이 변했다. 오늘 만났던 무정이라는 적의 인솔자인 듯한 놈, 혈귀… 그 말이 정말로 맞는 괴물 같은 놈이었다.

 마노토는 미친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진 그곳에 무정은 있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

 

 마노토가 그렇게 턱을 덜덜 떨며 두려워하고 있을 동안 무정은 자신이 있던 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신형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주위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바탕 미쳐 날뛴 결과치고는 꽤 성공적인 셈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살아있으니까.

 초우를 들고 휘두르기 시작할 때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몸 안쪽 여기저기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고 그렇게 폭발된 힘은 전신의 근육과 핏줄을 통해 몇 배나 강하게 발출되었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초우가 움직이는 대로, 그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휘두르고 권을 날리고 각을 날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도 없었고 온몸의 감각도 없었다. 설원의 삭풍도 이젠 그에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정은 눈을 감고 초우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

 그런 그의 감각에 후방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그라질 것 같은 무정의 정신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추슬러 신형을 돌린 후 억지로 감기는 눈을 뜨자 저만치 새로운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오는 인마들을 지켜보면서 무정은 절망했다. 저 속도면 여행자일 리 없고 아군이든 적군이든 군에 관계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지만 이렇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사이에 인마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크으윽!”

 마지막 힘을 내기 위해 무정은 신형을 꼿꼿이 세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는다면 지금 하늘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막 새로 사귄 친우에게도 이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안력을 집중하며 손을 올리고는 머리 위에 살포시 쌓인 눈을 한 움큼 집어 그대로 안면에 비벼대기 시작했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그나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시 눈에 힘을 주고 그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선봉으로 달려오는 인마에 매달려 있는 깃발이 보였다. 무정의 눈이 커졌다.

 

 明.

 

 붉은 깃발 안에 분명이‘명’이라는 글자가 흰색 글씨로 써 있었다. 아군이었다.

 그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발에 힘이 빠지면서 그의 신형이 휘청이더니 고개가 젖혀지면서 서서히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하늘이 완전히 들어오자 이번에는 온몸으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설원에 신형을 푹 파묻힌 채로 그는 그렇게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친구 초우를 꽉 잡은 채…….

 

 ***

 

 “정신이 드느냐?”

 몽롱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정은 억지로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아 세상이 희미하게 보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각진 얼굴에 강인한 인상, 약간 긴 듯한 수염… 마 대인이었다.

 그는 이제 강주백호소에서 용현천호소의 천호장으로 승급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마 천호의 칭호를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무정에게 대인이라 불리길 원한 그였다.

 그런 아버지 같은 그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무정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우… 욱……!”

 온몸으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마 대인은 무정이 하는 양을 보고 황급히 손을 저었다.

 “움직이지 마라. 네 상세는 엄중하다. 그냥 누워 있거라.”

 굳은 얼굴로 그는 무정을 제지했다.

 무정은 어젯밤 거의 시체가 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구조되어 와 마 대인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는 정말 무정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무리인 줄은 알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귓가로 웅얼거리며 들리는 마 대인의 목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몸이 회복되는 순간부터 너는 백호장의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무정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바로 잡았다. 불과 이 년 전에 십호의 칭호를 받았다. 이리 빨리 백호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존의 백호대에는 소속되지 않는다. 너는 나의 직속으로 소속된 채 대우만 백호장이 될 뿐이다.”

 “그게… 무슨 말씀… 이신지……?”

 무정은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지만 마 대인이 다시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것은 네가 일어난 후에 다시 얘기하자. 그냥 듣기만 해라. 이번에 새로운 부서를 창설하게 되었다.”

 마 대인은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무정에게 그냥 알려만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강호의 낭인들을 고용해 소수의 정예 부대를 창설하기로 했다. 이름은… 그냥 낭인대라 칭하기로 했다. 넌 그 낭인대의 대주가 될 것이다.”

 “…….”

 무정은 생각했다. 강호인들이라……. 가끔 읍내에서나 강호에서 굴러먹던 군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하늘을 날고 땅을 뒤집는 힘을 가진 자들. 하지만 그들의 무공을 본 적은 없었다.

 “낭인대는 나의 직속 부대다. 따라서 앞으로는 나 이외의 사람이 내리는 명령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 알겠느냐?”

 무정은 눈을 감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마 대인의 의도가 느껴졌다.

 이것이었다. 마 대인이 상처도 낫지 않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은 자신이 다쳐서 돌아오는 것을 더는 못 보겠다는 것이었다.

 휘하 직속 부대에 둠으로써 쓸데없는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의도였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도 무정은 가슴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역시 마 대인은 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리 알고 일단은 쉬어라. 이만… 나가보마.”

 말을 마치고 마 대인은 잠시 무정의 오른손을 일별하고는 방을 나섰다.

 무정의 오른손에는 아직도 초우가 쥐어져 있었다. 병사들이 아무리 떼려 해도 무정이 놓지 않았던 것이다.

 흡사 무의식 속에서도 목숨줄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마 대인이 방문을 나서자 무정은 이내 눈을 감고 점차 깊은 수면으로 빠져 들어갔다. 지금은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그의 의식과 상관없이 그의 몸은 스스로 그렇게 조용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 대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찻잔을 들더니 이리저리 돌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 나타나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다.

 무정은 습격을 받은 마을을 수습하려는 목적으로 십여 명의 군졸과 함께 출병했었다.

 그런 그가 돌아올 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자 좋지 않은 직감에 마 대인은 바로 추적대를 구성해 보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함정이든 우연이든 여진족의 약탈자와 맞부딪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왜 부딪쳤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다. 추적대가 전해온 말들, 그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두려웠습니다. 무 십호를 제외하고는 말이든 사람이든 살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설원을 붉게 물들인 피는 백 장 밖에서도 보일 만큼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상처는 비슷했습니다. 말이든 사람이든 깨끗하게 양단되어 있었습니다. 분명히 단 한 사람의 짓입니다.

 ―무 십호가 한 일인지 아니면 다른 무림의 고수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만일 무 십호가 한 일이라면… 전 너무도 두렵습니다. 중원의 고수라도 그렇게 잔인하게 출수(出手)하지는 않습니다.

 

 마 대인은 눈을 감았다. 무정은 자신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다.

 본가에 잘 있는 친아들보다 무정에게 더욱더 정을 느껴왔기에 무정에게는 마 천호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낯부끄럽게 대인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기는 했지만 딱딱한 천호보다는 훨씬 나았다. 오십을 넘긴 나이. 문득 그는 무정을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하나 마 대인은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무정을 믿었다. 한 명의 살귀(殺鬼)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창밖을 보니 다시 폭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 대인은 모든 것이 이대로 묻혀 버렸으면 했다. 저 하얀 눈의 깨끗함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간절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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