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최혜선이라고 합니다."
혜선이 활짝 웃으며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진탁입니다."
날이 바짝 선 하얀 가운에 적혀져 있는 이름을 쳐다본 혜선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탁한의원..."
"네. 맞아요."
잘 만져진 포마드헤어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한 남자가 혜선의 말에 호응을 하며 웃어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원장. 고진탁] 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원장은 얘. 나는 페이닥터."
고진탁과 정반대의 이미지. 갈색의 베이비펌을 한, 얼핏보면 20대 초반의 대학생쯤으로 보일 남자가 혜선에게 은근슬쩍 말을 놓으며 껄렁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
언제봤다고 반말인지 혜선의 미간이 미묘하게 꿈틀거렸지만 정신을 차리곤 있는 힘껏 안면근육을 좌우로 잡아 당기며 활짝 웃어보았다. 면접장에서 인상을 찌푸리면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혜선은 강남 노른자 한복판에 있는 [진탁한의원]에 면접을 보러와있었다.
간략하고 형식적인 자기소개를 마치고 앞에 있는 두 명의 남자는 아무말없이 혜선의 이력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조용한 진료실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혜선의 온 신경도 종이를 넘기는 손으로 향해 있었다.
고진탁원장의 손이 마지막으로 넘겼을때 혜선은 심호흡을 하며 그를 응시했다.
"경력이 대단하시네요."
"아.. 네.."
역시. 라는 생각이 들어 혜선은 긴장에 올라가 있던 어깨를 툭하고 내려뜨렸다.
혜선이 면접을 보는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회사에서 나온지 벌써 3개월차, 이제 더이상 놀고 먹고 할 여력이 되질 않았다. 벌써 이력서를 넣고 이곳저곳 연락을 받아 면접을 보는것도 수십번이었다. 하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다. 그도 그럴것이 다들 처음엔 혜선의 화려한 이력서에 혹해서 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유명 대기업에 그리고 핵심부서라는 마케팅부서에서 일을 했다는 이력만으로도 혜선은 어찌보면 과대평가가 되었던 모양인지 번번히 면접에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은 뻔했다.
"왜 그만 두셨어요?"
바로 퇴사의 이유였다.
올것이 왔구나. 라는 기분으로 혜선은 크게 한숨을 내 뱉곤 대답을 하려했다. 하지만,
"그만두긴. 짤렸으니까 그렇지."
"켁, 콜록. 콜록."
혜선 대신 베이비펌의 페이닥터란 남자가 대신해 대답을 해주었다.
틀린말은 아니였지만 사람의 면전 앞에서 그런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갑작스런 상황에 혜선은 숨을 잘못 들여삼켜 사래가 걸려 연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서 진정을 했으면 좋았건만 꽤 당황을 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고진탁은 옆에 있는 그의 팔을 주먹으로 툭 하고 내려쳤다.
"야."
"뭐?"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냥 고개를 들고 대꾸를 한 페이닥터는 다시 조용히 혜선의 이력서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행동에 되려 할 말을 잃은 고진탁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 대신 사과했다.
"미안해요. 얘가 오늘따라 왜이러는지.."
"괜찮아요. 크흠, 사실인걸요."
이제 좀 진정이 됬는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고 말한 혜선은 시뻘건 얼굴을 식히려는 듯 연신 부채질을 해대며 입을 열었다.
"계약직이였어요. 정직원 전환이 되질 못했구요."
"아.."
어쩜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대답이 있을까, 마주친 두눈에 고진탁과 혜선은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연신 부채질을 하는 손이 무례해 보이는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정적에 감싸였다. 혜선은 두 눈을 찔끔 감아보았다. 또 떨어지는 걸까?
그때, 그런 공기를 깨듯 그 페이닥터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여긴 왜 지원한겁니까?"
"네?"
"지원 동기 말입니다."
"그야.."
갑작스러운,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에 혜선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랄까, 원장이 물어보면 모를까 저 껄렁한 페이닥터가 물어보는게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그러지 않았는가? 짤려서 그런거라고 말이다.
"내가 택시기사 하자고 했었는데."
섭섭한 듯 손에 턱을 괴며 입술을 삐죽인 페이닥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기억안나?"
".....네."
"내가 정직원 시켜 준다고 했었는데."
혜선의 시선이 저절로 그의 왼쪽 가슴으로 향했다.
[Dr.정진탁]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누구..."
"핑크택시 기억안나?"
"핑크택시?"
"응."
"그 핑크택시?"
"응. 그 핑크택시."
"그 변태??"
"변태?"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벌떡 일어나며 손가락질을 하는 혜선의 모습에 정진탁의 미간이 보기좋게 찌푸려졌다.
"좀 앉지?"
"그 명함주고 간 변태 맞죠?"
"저게 어디다 대고 변태래."
혜선의 거듭되는 변태발언에 정진탁은 얼굴은 인상을 쓰고 있었고 고진탁의 얼굴은 약간 혐오감을 담아냈다.
"너 무슨짓 했냐?"
"하긴 뭘해. 오해야."
그 표정을 눈치 챘는지 오해라며 해명을 하려던 찰나 무릎을 살짝 덮는 치마를 필사적으로 내리며 진탁을 힐끔거리는 혜선의 모습이 보였다.
어이가 없어진 정진탁은 하, 하고 짧은 헛웃음을 내 뱉었다.
"그 쪽 내 취향아니니까 애꿎은 치마 그만 괴롭혀요."
마주친 두 눈에 점입가경으로 혜선은 이젠 양팔로 엑스자를 만들며 상체를 가리고있었다.
"어딜 봐요?"
"어딜보긴. 최혜선씨 보지."
지적질 하기도 지겨운지 정진탁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위로 휙 집어 던졌고 옆에 있는 고진탁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그 여자."
한숨을 쉬듯 내뱉는 말에 피로감이 묻어져 나왔다.
"니가 말한 여자가 한두명이야?"
"한두명이 아니였어?"
고진탁의 말에 혜선의 목소리가 한옥타브 더 올라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뭐래. 저 여자는.
"정진탁."
"그 택시녀."
귀에 익은 호칭이었다. 언젠가 정진탁이 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뭐땜에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고진탁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자 정진탁은 헛구역질을 하며 입 앞에 손으로 무언가 나오는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러자 고진탁은 알겠다는 듯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며 혜선을 쳐다보았다.
"그떄 그 크리스마스 오바이트..."
지난 크리스마스, 잘자고 있는 자신을 불러내 억지로 낚시에 끌려나가 밤새도록 누군가를 쳐절하게 저주하듯 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좋은게 좋은거라며 둥굴게 살던 녀석이 누군가를 그렇게 욕했던것은 처음본거라 누군가 했더니만 앞에 앉아 있는 혜선이었다니.
바락바락 소리지를때는 언제고 원초적인 단어에 창피한듯 입을 다물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혜선의 정수리를 쳐다보던 고진탁은 이내 싱긋하고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인연인가보네요. 이 녀석이랑."
"인연은 개뿔."
비아냥거리는 정진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재미있는 인연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욕해놓고 정진탁이 자신의 회사로 스카웃을 했다는 것도 놀라웠고 이렇게 면접까지 보러오다니 말이다. 물론 정진탁이 생각한 장소는 아니였지만 말이다.
혜선의 이력서를 다시금 눈으로 훑어내린 고진탁은 아쉬운 한숨을 내 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저는 자리를 비켜줘야 할것 같네요."
"네?"
"두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저..저기!!"
테이블을 돌아 터벅터벅 긴다리로 자신을 지나가는 고진탁의 팔을 혜선은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가지마세요."
"아.. 저런.."
마주친 두 눈이 꼭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장화신은 고양이 같아 측은함 맘이 들었지만 진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힘이 잔뜩 들어간 혜선의 손등을 큰 손으로 덮었다.
그리곤 난감한 웃음을 짓곤 혜선의 손등을 토닥토닥 보듬어 주었다.
"괜찮아요. 말은 저래도 정이 많은 녀석이에요."
"제발.."
"정은 개뿔."
가지말라는 애타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고진탁은 다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쉽긴했지만 정진탁이 찜한 사람이었다.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녀석이 고른 사람이니 여기서 자신이 개입을 했다간 큰 코 다칠수도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저기!"
"저도 저녀석이 무서워서요."
"그럼 저는요.."
"괜찮아요. 잡아 먹진 않을거에요. 다음에 또 봐요. 최혜선씨."
꽉 붙잡은 두 주먹을 매정하게 뿌리친 고진탁은 뒤도 안돌아보고 문 밖으로 나갔고 쾅 하는 문소리와 함께 조용해진 면접실은 이제 혜선과 정진탁과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앉아요."
등 뒤로 들리는 싸늘한 그의 말에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혜선은 의자에 앉았고 진탁과 마주 보게 되었다.
혜선은 울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벌컥 열고 이 병원 건물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잡아 먹을 듯이 쳐다보는 진탁이 쫓아와 해코지를 할것 만 같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그녀의 작은 머리를 돌아다녔다.
"왜 연락안했습니까?"
고진탁이 나간 후 오랜시간 혜선을 노려보던 정진탁이 입을 열자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그녀의 두 주먹에 별안간 힘이 불끈 들어갔다.
"택시기사 할 생각이 없어서요."
"오호.."
혜선의 말이 꽤 놀라운지 진탁이 작게 웃어 보았다. 웃고 있지만 그의 눈의 꽤 많이 매서웠다.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아까 떨리는 다리를 보았는데 지금 마주보고 있는 혜선의 얼굴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 힘들어감에 살짝 흔들리는 동공을 진탁이 놓칠리가 없었다.
그리고 진탁의 예상대로 지기 싫어 쎄게나갔지만 혜선의 속마음은 후회로 가득했다. 역시나 후환이 두려웠다.
"또 무시하네."
쎄게나가도 사람을 가리면서 해야 하는 법.
그녀의 머릿속이 제 손바닥에 있는냥 진탁은 왼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리고 혜선을 처다보지도 않은 채 오른손으론 빙그르 볼펜을 돌렸다.
"여기도 얼마나 고르고 골랐을까. 그치?"
"네?"
"대기업 다녔다고 눈은 저 하늘위에 있어서. 월급이 그나마 괜찮으니까 온거지?"
세상관심없고 나른한 얼굴로 진탁은 혜선에게 직설적인 말을 내 뱉었다.
"그럼 안되나요?"
"내가 언제 안된다고 했나?"
악의적이었지만 악의적이 아닌 화법이었다.
"난 지원동기 이딴거 왜 있나 싶어. 안그래?"
".............."
"돈벌러 왔습니다. 월급 많이 주니까 왔습니다. 라고 쓰지도 못하게 하면서 말이야. 안그래?"
진탁도 자기 나름대로 수를 쓰고 있는것이었다. 혜선은 그의 농간에 걸려든것 뿐.
미묘하게 뒤틀려 가는 표정에 그는 활짝 웃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택시기사 하자."
덕분에 혜선과 진탁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다.
마주 친 두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심지어 그의 눈동자에 비추는 자신이 보일 정도로 말이다.
"싫어요."
눈을 피하며 혜선이 고개를 돌렸다.
"왜? 쪽팔려서?"
진탁의 말에 혜선의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려졌다. 바로 앞에 있을 줄 알았던 진탁이 언제 몸을 뒤로 뻈는지 저 멀리 의자에 등을 지내곤 멀어져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당황스러움에 물들었다. 그갸 계속해서 정곡을 찔러오기 때문이었다.
"맞구만."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까전부터 하는 진탁의 말이 모조리 혜선의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혜선은 헷갈려왔다.
"그 쪽이 싫어요."
"나도 너 싫어."
사람이 지나치게 솔직한건지, 아니면 사람을 철저하게 자신의 발밑으로 깔아 뭉게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말이다.
얼핏 보면 같은 맥락의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솔직한것과 무시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막말로 어느 부모가 딸자식이 택시기사 한다면 좋아하겠어요?"
"그럼 거꾸로 부모가 택시하면 넌 싫어할꺼야?"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에 혜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밀린 의자가 갸우뚱 거리더니만 큰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꽤 큰 소리에 진탁의 두 눈이 꾹 하고 감겼다 띄어졌다. 혜선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꽤 화가 난듯 싶었다.
그의 예상대로 혜선은 화가 나있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치사하게 부모님 공격이라니.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꼭 자신이 최악의 딸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
서 있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진탁은 다시 손에 턱을 괴며 영혼없이 말했다.
"이기적이네. 역시 재수없어."
그 말에 혜선은 꺠달았다. 이사람은 솔직한게 아니라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자극하며 그 반응을 즐기고 있는 변태였다.
입술을 깨물어본 그녀는 쿵쾅 발소리를 내며 진탁의 앞으로 다가갔고 손바닥으로 쾅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깜짝이야."
놀랐다는 표현을 했지만 진탁의 눈은 나른하기 짝이없었다.
"왜 자꾸 저보고 하라는거에요?"
"그냥."
덕분에 다시 가까워진 얼굴에 서로의 눈동자가 서로를 담아내고 있었다.
"최혜선씨가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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