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자식!!"
[깡]
쇠와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자 야구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지가 사장이면 다야?"
[깡]
다시한번 날라오는 공을 혜선이 있는 힘껏 배트로 요령있게 공을 맞추며 하늘로 올려보냈다.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주제에!"
[휘익]
이번엔 힘이 넘이 들어갔는지 헛스윙을 해 경쾌한 소리 대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살살 기어주니까 내가 진짜 등신같지? 엉?"
[깡]
혜선앞에 모니터 속 빨간색의 아날로그 숫자가 1에서 0으로 바뀌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인적이 하나도 없는 어느 주택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야구 배팅장.
이렇게 이른시간에 문을 여는곳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런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씩씩거리며 동전을 집어 넣는 혜선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죽여버려. 짜증나. 그지같은 새끼."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쓱 하고 딱아내곤 계속해서 입으로 욕을 하고 있는 혜선은 아까 구내 식당안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저 하늘끝까지 바짝 올라간 매서운 눈꼬리를 하고선 연신 격양된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율리의 마음을 흔들고간 그녀는 어딜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정말 그녀의 본 모습.
본디 혜선은 불평불만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물론 대놓고 욕하지는 못하지만 마음맞는 사람과 뒷담화하면서 수다떠는것을 좋아했다. 양심에 찔리지만 어쩌겠는가,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풀어야지.
지갑에 동전주머니를 탈탈털어 머신기에 동전을 집어 넣던 혜선은 갑자기 지갑을 바닥으로 던저버렸다.
"아, 500원 모잘라."
하지만 이내 바로 바닥에 쭈구려 앉으며 지갑을 주웠다. 아까 들어올때 동전교환기가 있었던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선의 지갑엔 파란색의 천원짜리 대신, 초록색의 만원짜리가 달랑 한장 들어있었다.
"아, 진짜 안 풀리네. 안 도와주네."
하아, 혜선이 짜증스럽게 열기로 뜨거운 한숨을 내 뱉었다.
정말 단 한판, 딱 한판만 더 하면 분이 풀릴것 같은데 돈이 모잘랐고 있어도 바꿀 곳이 없었다. 정말 말그대로 아무것도 자기 맘대로 되는게 없는것 같아 이게 뭐라고 울컥 눈물이 날뻔했다.
"가야 하는건가..."
그때 연신 혼잣말을 하며 아쉬운 듯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혜선의 등 뒤로 낯선 손이 다가왔다.
"더 하고 가면 돼죠."
"아, 깜짝이야."
"이런 곳에서 다 보네요?"
그 낯선 손의 주인공은 500원을 머신기 위에 올려주며 살갑게 인사를 건내왔다. 갑작스런 목소리와 손길에 놀란 혜선이 뒤를 돌아보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원장님?"
진탁한의원의 원장 고진탁이었다.
"안녕 혜선씨?"
너무 놀라 어버버거리며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혜선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던 고진탁은 자켓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내주었다.
"아침부터 운동인거에요?"
"네. 뭐.."
"반갑네. 저도 운동하러 왔는데."
"이 아침에요?"
"어제 술을 좀 먹었더니 부어서요. 땀 좀 빼러 왔죠. 혜선씨도 그럴려고 온거 아니에요?"
"뭐..그렇죠."
볼 위로 주르륵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혜선은 어색하게 웃어보았다.
운동이라면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목적으로 들어 온 곳이 아니였다. 씩씩거리며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고 치솟아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들어왔던것이었다.
혹시 들은것일까?
잘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자신이 아는 온갖욕을 다 뱉었던것이 생각이나 자신도 모르게 마주서있는 고진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오늘 아침, 식당에서 율리가 보았던 것과 겹쳐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런 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진탁은 베시시 웃으며 등뒤에 감춰두었던 것을 그녀에게 건냈다.
"여기, 시원한 음료수."
조금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끊이없이 정진탁의 욕을해 저절로 비교가 되었다.
보기만해도 시원해지게 이슬이 맺혀져 있는 캔음료를 받으며 혜선은 작은 감탄을 했다. 서프라이즈처럼 짠 하고 나타나 500원을 준 것도 모잘라 땀딲으라고 손수건에 이젠 음료수였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이름만 같을 뿐이지 전혀 다른 스타일에 저절로 정진탁과 고진탁이 비교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마 정진탁이었으면 혀를 차며 아는척은 커녕 무시하고 갔을 것이었다.
저절로 떠오르는 정진탁에 또 다시 화가 올라오는 듯 혜선이 작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무슨 욕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요?"
"네?"
그의 말에 혜선의 얼굴이 당혹스러음으로 물들었다.
"누구 욕하는거에요?"
"아.. 그게."
"혹시 나?"
"아뇨! 설마요. 제가 원장님 어떻게 안다고."
혹시 들었을까? 오해라도할까 혜선은 손을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그럼 작은진탁이에요?"
"작은 진탁이요?"
"키 큰 나는 큰 진탁, 키가 작은 정진탁은 작은 진탁."
"아..그래서 작은진탁."
"간호사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작은선생님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별명에 혜선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풋 하고 웃어보였다.
별안간 알게된 새로운 정보에 혜선은 자신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보이기도 잠시, 혜선은 다시금 표정을 굳히며 고진탁의 표정을 흘깃 곁눈질로 확인했다.
"아.. 그게.. "
결론은 작은진탁은 정진탁. 정진탁 욕을 하고 있었냐는 것이었다.
정답이었지만 정답이라 말할 수 없어 혜선은 작은 목소리로 아하하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설마 쪼르르 정진탁에게 가서 이르는건 아닐지. 말할 것 같진 않았지만 친한친구의 욕을 듣는다면 기분이 나쁠것 같다는 생각에 혜선의 등 뒤로 뜨겁지 않은,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의 식은 땀줄기가 흘러 내렸다.
하지만 되려 고진탁은 인상은 커녕 약간 울상을 지어보였다.
"근대 생각해보니까 되게 섭섭하네?"
"뭐가요?"
"아까 그랬잖아요. 내가 원장님 어떻게 알고 욕하냐고."
"네?"
왜 그게 섭섭한걸까?
혜선은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원장과 자신은 오늘로 딱 2번째 만나는 거였다. 첫만남도 매정하게 자신을 버리고 나갔기 때문에 잘 알수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섭섭하다니까 사과를 하던 풀어주던 해야 할텐데 이유를 종잡을 수 가 없었다.
"근데 그게 왜.."
"저는 혜선씨 이야기 진탁이 한테 많이 들었는데."
"대표님이 제 이야기를요?"
동그라진 눈으로 자신을 가르키는 헤선의 모습에 고진탁은 강한 긍정을 표현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궁금하잖아요. 그렇게 강렬한 첫만남이 있었는데."
"아.."
그러고보니 정진탁대표와의 처음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잘 대답은 안해주긴 하는데 전 혜선씨 되게 친근하게 느껴지거든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고진탁은 친근하게 말을 하지만 혜선은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좋지 않은 인상일텐데 친근하다고 까지 해주니 혜선은 여러가지 의미로 몸둘바를 몰랐다. 꼼지락 거리며 손가락을 어찌 할바를 모르던 그녀는 머신기 위에 있던 500원을 집었다.
"그건 그렇네. 혜선씨는 날 잘 모르겠네."
고진탁이 작게 아, 감탄을 하곤 팔짱을 꼈다.
"그렇죠. 아무래도."
정말 섭섭한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혜선은 민망해 지는지 만지작 거리던 500원을 머신기에 넣었다.
모니터의 숫자가 0에서 10으로 바뀌었다.
슬그머니 바닥에 있는 야구 배트를 집어 들던 혜선은 갑자기 박수를 치는 고진탁에 굽히던 허리를 그대로 엉거주춤 그 자세로 멈추었다.
"그럼 친해져야겠네."
"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우리 나가서 밥이라도 한끼 먹을까요?"
"밥이요?"
잘모르니까 친해지자. 일리있는 말이었다. 그래 밥. 친해지기에는 뒷담화 만큼 좋은게 같이 밥한끼 먹는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밥이었다.
친해지자며 식사를 권하는 그가 고맙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혜선은 오늘 아침, 별로 먹지 않았지만 억지로 버거운 식사를 하고 온 참이었다.
"먹고왔어요?"
곤란한듯한 모습때문일까 조심스러워진 그의 질문에 혜선은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활짝 웃어보았다.
"아뇨. 안먹었어요."
"잘됐네요."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람인지 잘됐다고 말하는 고진탁의 얼굴엔 진심을 담은 기분좋은 미소가 가득했고 그 모습을 발견한 혜선의 얼굴에도 웃음이 슬쩍 피어올랐다. 왠지 모르게 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 먹으러 갈까요?"
"네."
어차피 이렇게 땀한바가지 쭉 뻈으니 한끼 더 먹는다고 큰일날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괜히 배도 고파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혜선이 엉거주춤 굽혀진 허리를 폈다.
그리고 그 순간 고진탁의 외침과 동시에 혜선의 두 눈이 크게 띄어졌다.
"어, 위험해요."
별안간 진탁이 혜선의 어깨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곤 자신의 품에 넣으며 껴안았고 더 놀랄 틈도 없이 이어 쾅하는 큰소리가 났다.
"깜짝이야. 큰일 날뻔했네요."
"........."
"생각보다 무섭게 날라오네."
아까 혜선이 무심코 집어넣은 500원 덕분에 다시 배팅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걸 생각못하는 사이 혜선에게로 공이 날라고오고 있었다. 그걸 본 고진탁이 재빨리 혜선을 자신의 품으로 당겼고 날라온 공과 철조망이 있는 힘껏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던 것이었다.
간발의 차로 그녀는 그 공을 피할 수가 있었다. 정말 그가 아니였으면 큰일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혜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진탁과는 다르게 혜선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위험한 상황에 놀란것도 있지만 그녀의 몸속 가득 들어온 고진탁의 향수 냄새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놀랐을 혜선의 어깨를 달래듯 토닥이던 고진탁이 그녀를 불렀다.
"혜선씨."
"........"
"어깨 안아파요?"
한사람은 미친듯이 두근거리고 있는 이 타이밍에 조금 우스워보일지 모르겠지만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랄까, 고진탁은 혜선의 어깨를 만지다 유난히 딱딱한 그녀의 어깨를 발견했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
"여기 딱딱한데."
어깨를 토닥거리던 고진탁은 손가락으로 어깨근육 어느지점을 꾹하고 눌러보았고 혜선의 입에선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아야."
귀신같이 아픈 부분만 꾹꾹 눌러대 혜선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리고 자연스래 혜선의 이마가 진탁의 어깨위에 올려졌다.
혜선이 아파하던 말던 연신 어깨근육을 눌러대기도 잠시,
"딱이네."
고진탁은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부딪혀 보이며 경쾌하게 말했다.
"뭐가요?"
"우리 밥먹고 침맞으러 가요."
어깨에 기대고 있던 혜선이 고개를 들었다. 기분탓일까? 혜선의 표정이 조금은 떨떠름 하게 변한것 같았다.
살짝 깬다 그래야 해야하나? 밥먹고 침이나 맞으러 가자니, 분명 색다른 권유이긴 했지만 그가 한의원 원장이라는 것이 새삼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거 그대로 두면 나중에 머리까지 아파와요."
하지만 정말 걱정스러운듯 눈썸을 잔뜩 내리며 말하는, 바로 눈앞의 고진탁의 모습에 혜선은 뭐에 홀린듯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요. 저 이래뵈도 강남에서 유명한 한의사에요. 침 잘놔요."
"네."
"그럼 우리 저거 다 끝날때까지 앉아 있다가 갈까요?"
계속해서 쿵쿵 소리를 내며 철창에 부딪히는 야구공을 가르킨 고진탁은 혜선을 배팅룸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로 데려가 앉혔고 자신도 나란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친절한 고진탁씨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혜선의 손에 들려 있던 음료수를 뺏어 뚜껑을 열어주곤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쫌 아쉽죠. 시원하게 몇번 쳐줘야되는데."
"ㄴ..네."
"아까워도 참아요. 지금 움직이면 위험해요."
빨간색의 아날로그 숫자가 5에서 4로 변했다.
그렇게 숫자가 하나 둘씩 줄어갈때 마다 야구공 부딪히는 소리가 쾅하고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혜선의 심장도 쿵쾅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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