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탁과의 아침식사는 여러모로 완벽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진 외모와는 다르게 입맛은 매우 수더분해보였다. 그가 혜선에게 맛있다며 자부하며 데려간 곳은 어느 한 가정백반식집. 시골 어느 시장 한 구석에 있을 법한 허름하고 늙은 미닫이 문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맛집은 정말 맛집이었는지 아침부터 꽉 차있는 테이블에 구수한 된장국, 제철에 나오는 채소로 주를 이룬 반찬들은 혜선에 입맛에 딱이었다.
물론,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먹어서 이게 코로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몰랐지만 말이다.
"아, 배부르다."
"저두요."
"배 나온것 봐요."
능숙하게 한손으로 운전을 하며 고진탁은 말과는 다르게 쏙 들어간 배를 만지작거렸고 정말 심각한듯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혜선은 풋하곤 웃음을 내뱉었다.
"맛있었죠."
"네. 정말 맛있었어요."
"다행이네요. 입맛에 맞아서."
자신을 향해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고진탁의 얼굴에 혜선은 수줍은듯 작게 웃어보이곤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한모금 마셔보았다.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 할 수가 있을까.
이런 소소한 웃음이 오늘은 멈추질 않았다. 몇시간전 까지만 해도 바닥에 떨어진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뭐가 어찌됐던 지금 혜선은 매너 좋은 그의 에스코트에 하늘을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자신이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만에 느끼는 설레임인지 사이드 미러로 슬쩍 보이는 자신의 양 볼이 예쁜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맘에 들었다.
"오늘 쉬는 날이에요?"
"네."
"아, 좋겠다."
"토요일이면 병원 쉬지 않아요?"
"오전진료는 하죠."
"아, 그렇구나."
"혜선씨는 쉴때 뭐하세요?"
"아, 저는 밀린 드라마보거나 집에서 그냥 뒹굴거려요."
"저도요. 요새 미드보느라 밤새서.."
"저도요! 뭐 보세요?"
도란도란.
이 상황을 가장 아기자기 하고 예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이것뿐일것이다. 남자랑 이렇게 드라이브하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한게 언제였던가, 새삼 다가오는 감격에 혜선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죄송해요, 전화가 왔네요."
갑작스럽게 울리는 고진탁의 전화 벨소리에 혜선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도란도란 주고 받는 이야기가 끊켜서 그런게 아니였다. 그런것 쯤이야 백만번 이해해줄 수 있는 아량있는 여자였다. 그녀의 표정이 이토록 안좋아진 이유는 바로 그의 핸드폰에 뜬 익숙한 이름 석자였다.
"작은 진탁이네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진탁의 존재를. 고진탁과 정진탁의 관게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와 혜선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에는 그 놈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잠시만요."
"네."
혜선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하여튼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었다.
고진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에 있는 통화버튼을 눌렀고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는 덕에 그와 작은진탁, 큰진탁과 작은진탁의 통화를 듣게되었다.
"어. 왜."
"어디야?"
"출근하고 있지."
"누가 바지 사장아니랄까봐, 눈 빠지게 바쁜 토요일 오전에 지각을해?"
지각이라는 말에 고진탁의 눈이 저절로 시계로 향했다.
오전 11시10분. 명백한 지각이었다.
"뭐야? 왜 아무말도 안해?"
"잠깐 시계 좀 보느라고."
"여지껏 몇신지도 모르고 농땡이를 치고다니는거야?"
혜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진탁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곤란해 하는건 아닐까? 그의 지각의 원인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과는 다르게 고진탁은 가소롭다는듯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내가 이러려고 돈 주고 너를 쓰는거 아니겠어?"
"확 그만둬버리는 수가 있어."
"좋을데로."
"죽여버린다 진짜."
혜선의 눈이 동그랗게 띄여졌다.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잔뜩 내려간 눈썹이 보일 줄 알았다. 정말 거침없이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말투는 정말로 죽일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고진탁은 평온 그 자체, 익숙한 일이라는듯 무심하게 그의 말에 툭툭 대꾸를 했다. 아침에 마냥 상냥했던 그 모습과는 상반대는 모습이었다.
"입 조심해. 귀하신 분 옆에 있으니까."
"귀하신 분?"
혹시 자신을 말하는 것일까? 웃음기가 가득 담겨져있는 그와 두 눈을 마주했다.
"그럼."
고진탁은 혜선을 향해 찡끗 살짝 윙크를 해보였다. 그리곤 소리없이 입을 뻥긋거렸다. '신경쓰지마요' 라고 하는것 같았다.
"아주 매우?"
"여자야?"
"어."
"이뻐?"
"아주 이쁘지."
혜선이 볼을 깔짝이며 긁어보았다.
내가 미쳤나? 후광이 비추는 듯 눈부신 고진탁의 입이 슬로우모션을 걸어 놓은듯했다.
손가락에 닿은 고운 피부가 뜨겁게 느껴졌다.
"데이트야?"
"네가 전화를 안했으면 완벽한 모닝데이트였지."
"........."
"여보세요?"
"재수없어."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를 담은듯한 말투로 재수없다라고 말하는 정진탁의 말에 고진탁은 기분좋은 웃음을 지어보았다
"금방가."
"얼른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는지 뚜뚜 소리가 들려오자 고진탁은 소리내어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진짜 얄밉지 않아요?"
"네?"
"지가 페이닥터면 단가? 맨날 협박질이에요."
험담아닌 험담을 하고 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꼭 귀여운 남동생의 투정을 듣는 형의 모습이었다.
"귀엽다니까."
"아.. 그래요?"
반면, 혼잣말을 하듯 읊조린 그의 말에 혜선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귀엽기는 개뿔, 두번만 귀여웠다면 사람죽이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혜선이 힐끔힐끔 고진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연신 정진탁과 있었던 이야기를 푸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금 쪼그라드는 어깨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잊고 있었던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걱정마요. 진탁이한테 이야기 안해요."
이 둘은 동업자며 오래된 친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정진탁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신나게 그를 욕하던 모습을 정진탁에게 들켰다는 것을 말이다.
"네?"
훅 들어온 펀치에 뜨끔한 혜선은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아..하하. 뭘요?"
지금이라도 내려달라고 할까? 라는 생각이 그녀의 작은 머리속을 가득 메웠다.
"글쎄요 뭘까요?"
고진탁 또한 똑같이 딴청을 피우며 장난끼 넘치는 얼굴로 혜선에게 웃어보았다. 그 얼굴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주위를 살피자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주위에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능숙한 고진탁의 손이 핸들을 틀고 어느 건물 주차장으로 향하자 혜선은 두눈을 찔끔감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려달라고 그에게 말하려는 순간, 이미 늦었다는듯 네비게이션에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들려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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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신분?"
"귀하지."
"예뻐?"
"미인이시잖아 혜선씨."
"개뿔."
당당한 걸음으로 병원입구까지 왔건만 그 문을 지키며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정진탁의 모습에 혜선은 자기도 모르게 고진탁의 뒤로 슬쩍 숨었다.
"어쭈 숨어?"
하지만 저 멀리 실루엣이 보일떄부터 혜선만을 지켜보고 있던 정진탁의 눈에 그 모습이 안걸릴레야 안걸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올것이 왔구나 라는 생각에 혜선은 두눈을 찔끔 감아 보곤 고진탁의 뒤에서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말 이마가 무릎이 닿을 정도로 아주 예의바르게 90도로 굽히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름 밝게 인사를 해보았건만, 정진탁의 표정은 정말 뭐 씹은 듯 어둡기만했고 저절로 혜선의 어깨가 움추려 들었다. 왜 항상 정진탁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걸까.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여기가 집이야?"
"아, 저기.."
아까 신나게 욕을 하며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던 모습은 도대체 어딜간건지. 지금은 잔뜩 쭈구러진 모습에 고개를 푹숙이고 있는 혜선의 모습에 고진탁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발짝 움직여 혜선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내 귀하신 손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마."
평소 간호사나 가끔 찾아오는 기사님들께 말하는거 보면 살갑기 짝이 없더니, 왜이리 그녀를 몰아 붙히는지. 그러고 보니 혜선을 처음봤을때도 이랬었다.
슬쩍 정진탁을 노려보았다.
"귀하시긴 개뿔."
고진탁의 그 눈을 보았는지 정진탁은 어이가 없는듯 콧방귀를 끼곤 휙, 몸을 돌려 병원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리 둘이 밥먹고 와서 삐졌어?"
"아, 꺼져."
손을 들어 저리 가라는듯 휙휙 저어본 정진탁은 자신의 진료실로 향하는 듯 했으나 이내 발길을 돌려 접수 데스크로 향했다.
"김간호사님."
"네. 선생님."
정진탁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고진탁에게로, 아니 고진탁의 뒤에 있는 혜선을 가르켰다.
"저기 귀하신 분 진료비 제 앞으로 달아 놓으세요."
그의 말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고진탁의 미간이 보기좋게 찌푸려졌다.
"왜 내 손님 진료비를 네가 내?"
"내 직원이야."
"내 손님이야."
"억울하면 사장 하던가."
"네가 뺏어간거거든 혜선씨?"
"뭐래."
"너만 아니였음 혜선씨 우리 직원이었어."
"내가 먼저 일하자고 했거든?"
"거절한거 아니야?"
"아니거든~"
어린 애 싸움 같은 유치한 대화에 듣고 있던 혜선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건만 정진탁과 고진탁, 큰진탁과 작은진탁은 나름 진지했다.
한참을 서로 노려보던 두사람은 합이라도 맞춘듯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획 하니 돌려버렸고 고진탁은 일부러 더 혜선에게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츤데레 같으니라고. 안그래요 혜선씨?"
"네? 아.. 네."
고진탁의 말에 정진탁의 눈치를 살피며 혜선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츤데레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귀여운 외래어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밑바탕에 깔고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었다. 쾅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 정진탁의 진료실의 문이 꼭 그와 자신과의 관계같아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너무 맘상해 하지 마요.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저래요."
"과연 그럴까요.."
전혀 위로가 되질 않았다.
위로하듯 자신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고진탁의 손길에 바짝 올라갔던 승모근의 근육이 스르르 풀리는 듯 느껴졌지만 왠지모르게 그 손길이 짜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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