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전우구 그에게서 받은 문서를 확인하기 위해서 늘 그가 묵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떠돌이 낭인들 혹은 범죄자들이 득실 거리곤 하는 숙소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그렇게 안전한 숙소는 그곳 뿐이였다.
" 건씨 할아범에게 물어나 볼까. "
여러 채의 집이 언덕보다 조금 가파른 등성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곳. 그 이름 모를 군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일전객은 다시 천천히 그 군락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집촌의 입구에는 다 낡은 팻말이 끼익 거리며 서 있었고, 그 나무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 건가촌 ]
원래 건가촌이라는 곳은 없었다. 보통은 토박이들이 자리해서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살다가 성씨촌을 만들고 바글바글 사람수가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지만, 건가촌은 달랐다. 건가촌을 만든 사람은 지금의 건씨 할아범. 건주였다. 실제로 본명을 부르기 보다는 건씨 할아범이라고 다들 부르곤 하는데, 그 건씨 할아범은 원래 암흑가의 인물이였다고 했다. 건씨 할아범이 끌고 다니던 암흑가의 조직에서 위치를 인정받고 은퇴하고 나서 든 생각이 '가족 밖에 없다' 라는 것이여서, 사실상 치외법권에 가까운 건가촌을 만들었다. 건씨가 원래부터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북경과 인근 마을이나 도시에 갈 곳없는 건씨들을 계속해서 모은 탓에 지금은 상당한 규모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별 다를 것 없는 성씨 촌이였지만, 문제는 건씨 할아범의 성향에 있었다. 치외법권이나 다름 없고 인근 관아부터 상층부까지 적잖은 뇌물을 받아 먹은 터라, 건가촌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해선 관아에서 사람이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형식상의 움직임 뿐이였다.
그렇게 독립적인 치외법권을 형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자연스레 건가 촌의 건장한 남자들은 건씨 할아범의 독한 성격과 뒷골목의 싸움법들을 배워 범죄자들이나 어지간한 무림인들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성씨촌의 특성상 원한이 깊고 복수는 반드시 하는 법이라, 건씨 일가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북경 골목에서 밥 제대로 먹기 힘들다 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건가촌의 위세는 대단했다.
" 어이.. 왔는가 ? "
일전객이 들어서자 마자, 근처에 닭을 잡고 있던 한 건장한 사내가 반갑다는 듯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닭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다가왔다.
덩치는 상당했고, 살도 꽤나 많이 찐 체형이였는데, 그저 물살은 아닌지 군데군데 박혀 있는 근육들이 얼핏 보였다.
" 예. 닭잡으십니까? "
" 그럼! 요번에 숙박한다고 온 새끼가 닭을 갖고 와서 하루 봐달라 해서 퉁치기로 했지. 엥간하면 그대로 목을 따버렸을 건데, 닭이 꽤나 실해서.. "
" 크긴 큽니다 그래 ? "
뒤를 살짝 보자, 방금 잘려 아직은 따뜻할 닭의 몸통은 한 눈에 봐도 꽤나 큼직하니 값이 꽤 나갈 것처럼 보였다.
" 이 정도면 맛도 꽤 날 정도로 큰 놈이지. 그리고 또 나 건우간이 닭 손질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니 미리 좀 다듬는 중이야. "
사람도 회쳐버리는 실력에 닭이 뭐가 대수겠냐만, 실제로 닭 뿐만 아니라, 고깃덩이 손질에는 기가 막힌 칼 솜씨를 갖고 있어서, 건우간은 건가촌 내에서 도축 담당을 맡고 있기도 했다. 그의 칼 솜씨를 볼 때마다 일전객은 무공을 배웠어도 크게 됬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할 정도로, 경험에서 습득한 그의 칼솜씨는 상당했다.
" 우간 형님의 칼 솜씨가 대단하긴 하죠. 할아버님은 계십니까? "
" 아참 내 정신 좀 봐라. 할아버님이 자네를 찾는다는 걸 깜빡 말을 못했네 그래. "
" 미리 알고 계신겁니까? "
" 그럼! 자네가 유석인인가 뭔가 하는 새끼 청부 받는다고 할 때부터 바로 건가촌으로 소식이 들어왔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닌감? "
건가촌의 대단한 점이기도 했다. 의뢰를 받고, 전우구의 집을 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할아버님의 귀까지 그 소식이 들려왔다는 것은 건가촌의 정보망이 뒷골목이나 북경 외곽을 꽉 틀어잡고 있다는 이야기 이기도 했다.
" 하하.. 역시 조금 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
" 에이.. 할아버님이 자네를 얼마나 아끼는데 혼내봤자 칼자국 낼까? 얼른 가보기나 하게. 내가 말했다는거 잊지 말고! "
" 예. 형님. "
말이 끝나자마자 일전객은 빠른 보폭으로 길게 늘어선 집들 사이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건씨 할아범은 그에겐 좋은 조언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겐 무서운 인물이였다. 건우간이 부탁하듯 이야기 한것도 그런 맥락이였다. 유난히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것이 일전객 그 였기에 저렇게 일전객의 입에 몇 번 오르내리면 나중에 혼날 일도 그냥 눈감아주곤 했다.
일전객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건가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집 한채 였다.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채 였는데, 주변에 작은 밭도 있고 한 것이 홀로 전원생활을 하는 듯한 한가로움도 갖고 있었다.
똑똑.
"들어오게."
숨을 가다듬은 일전객에 살짝 문을 두드렸고, 문 안에서는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 할아버님."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난한 다른 집들처럼 가구 몇 점 없는 단촐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살짝 코를 찌르는 향내. 향내는 좋았지만, 향 자체가 강해서 그런지 절로 코가 찡그러졌다.
"여 앉게나."
그 담백한 실내와는 다르게 홀로 호화스런 침대가 한 켠에 놓여 있었고, 침대에 새하얀 천이 드리워져 장막이 쳐져 있었고, 장막 뒤에는 노인 하나가 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예."
그 노인이 가르키는 침대 앞 의자 하나에 다가가 슬쩍 앉으며 일전객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디 몸은 아프신 곳 없으십니까?"
"홀홀...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일세. 허나 아직은 그렇게 심하게 아픈 곳은 없구만 그래."
칼칼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말투에 일전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다행입니다. 어르신."
"왜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는가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금은 날서있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장막 뒤의 건씨 할아범. 성난 듯한 건씨 할아범의 말투에 일전객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노인네가 거기서 거절당하고 나중에 보자고 했으면 아마 뒷 골목 양아치 놈들한테 칼밥을 먹고 죽었을 겁니다."
"뒈지건 말건. 함정이면 어떻게 할려고 그런건가! 쿨럭 쿨럭!"
목소리를 높이기 무섭게 터져나오는 기침소리에 서둘러 일전객은 주전자의 물을 물잔에 따라 서둘러 건넸다. 꿀럭이는 소리와 함께 잔 속의 물을 들이킨 건씨 할아범은 잠깐 한숨을 내뱉었고,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네 이름이 꽤나 알려지고 있어.. 조심을 좀 하게나. 아직은 북경 흑사수 같이 이름이 나진 않았어도, 자네 실력은 이미 그 넷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순식간이란 말일세.."
인색한 건씨 할아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칭찬에 걱정을 늘어 놓는 말을 듣자 일전객은 두건 속에서 빙긋하며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시는 건 할아버님이신 것 같습니다. 하하."
"제에기... 공치사는..다른 사람들은 자네의 진면목을 모르니까 그렇지. 눈 앞에 보석 더미를 두고서 애지중지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니까 말일세. "
"보석 더미 씩이나 허허.."
"암.. 보석 더미이구 말구. 내 뒷골목에서 칼밥 먹고 근 삼십년을 살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였네. 자네 정도면 보석이라고 할 수 있다네. 다들 눈깔에 대못을 박고 다니는 지 몰라봐서 그렇지."
이런 저런 덕담이나 분위기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간 뒤, 건씨 할아범은 장막 속에서 손을 뻗어 내밀었다. 살짝 위 아래로 흔드는 것이 무언가를 달라는 손짓 같았다. 그 손짓에 일전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품 속에 넣었던 전우구에게서 받은 정보 종이 뭉텅이를 건넸다.
"내 그 돼지 같은 새끼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서도.. 정보의 질은 좋구먼 그래..."
한동안 묵묵하게 종이 꾸러미를 읽어 내린 건씨 할아범의 솔직한 감상평이였다. 종이 꾸러미를 다시 가지런하게 추려 돌려주면서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집에서 튀김만 먹는 새끼가 어떻게 우리 건씨 일족도 잘 모르는 것들을 그리 잘 알지? 나름 우리도 한다고 하는데 말이야..."
"건가촌의 정보력이야 이 쪽에선 높이 쳐주지 않습니까. "
"아니아니.. 종류가 좀 다르다고나 할까. 우리는 풍문이나 시정잡배들 입에서 나오는 정보가 많아서 동향을 빠르게 본다면, 그 전우구 튀김 돼지새끼는 관아에 아는 사람이 있거나 고위 관료들과 관계가 없다면 알기 힘든 것들이 나오니까 그렇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일전객은 피식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 사람 안지 좀 되었지만, 그것만큼은 저도 의문입니다. "
"그렇지? 자네가 봐도 그렇지? 묘한 뚱땡일세.. "
대충 일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났는지 서서히 일어날 채비를 하려는 일전객에게 건씨 할아범은 말을 걸었다.
"오늘 뭐 따로 할 것이 있는가?"
"이제 들어가서 이것들 보면서 죽일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
"허허.. 젊은 사내가 여자를 만나볼 생각은 없구? "
"그리 고프진 않은가 봅니다. 좋은 처자 있으면 소개라도 시켜주십시요. 나중에라도 꼭 만나보게. "
일전객의 말에 건씨 할아범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 내가 손녀를 소개 시켜줬지 않는가? "
손녀라니 건씨 할아범의 손녀인 건수향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손녀라면 향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래 우리 향아.. 그 정도면 예쁘지 않은가? 맘에 안 드는 구석이라두? "
"향아 정도면 차고 넘칩니다. "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수향은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고, 삭박한 건가촌에서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 건씨 할아범이 건가촌에서 가장 아끼는 아이이자,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였다.
"내 입장에서는 둘이 혼인을 해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
"나이 차이가 열 손가락을 넘습니다. 어르신. 허허.. "
완곡하게 거절하고 자리를 벗어나는 일전객을 건씨 할아범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평소 건씨 할아범 집에서 나올 때는 주눅들어 힘이 빠진 상태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일전객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근처 우물가에서 물을 푸던 날렵한 인상의 사내가 뒤에서 기다리던 건가촌 사람에게 물었다.
"여서 묵은지 좀 되었는데, 나오는 사람 족족 초상치르더만, 저 남자는 볼 때마다 멀쩡하네. 왜 그런지 압니까? "
"뭐 건가촌 사람이 아니니까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알려 줌세. 건가촌 주인 그러니까 건씨 할아버님이 과거에 지독한 놈들한테 쫓겼던 모양이야. 그래서 죽을 고비를 연달아 넘기고 정말 위험해 졌을 때, 저 사내에게 의뢰를 맡겼던 모양이더군. 보수는 고기만두 한 접시. 그래서 저기 가는 저 사람이 건씨 할아버님 목숨을 구해서 지금의 건가촌을 지으신 걸세. 건씨 할아버님은 그래서 그런지 저자에게 껌뻑 죽지. 뭐 건가촌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거나 다름 없으니 우리 건가촌 사람들도 좋아라 하고 말이야. "
"헤에... 그런 일이.. "
질문을 던졌던 사내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하고 내리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뒤에서 기다리던 건가촌 남자가 면박을 주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빨리 물이나 퍼서 비키게. 대체 얼마나 물을 쓰려고 그러는 건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을 한 귀로 흘려 넘기며, 일전객은 자신의 숙소이자, 건씨 할아버지가 통 크게 내어준 작은 집 한 채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딱히 잠겨 있지 않아도,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건가촌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기에 도둑이 들거나 어지러운 것은 하나 없이 나올 때 그 모양 그대로 였다.
"음?"
비어 있어야 할 집 안에서 뭔가 짭조름하고 맛있는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고, 그 냄새의 방향에 고개를 돌린 일전객의 눈에 탁자 위 작은 그릇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그릇을 살짝 잡아보니 아직은 따뜻했다. 아마 자신이 건씨 할아범 집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 놔두고 간 모양이였다. 그릇을 살짝 들어 덮혀 있던 천을 벗겨내었다. 그릇 안에는 고기와 감자 그리고 채소 몇 가지가 들어간 조림이 들어 있었고, 포실포실해 보이는 것이 튀김을 몇 개 집어 먹은 후였기에 시장하진 않았지만 군침을 돌게 했다.
"쪽지인가?"
그릇을 들어 올리자 그제서야 보이는 작은 쪽지. 접은 모양새가 가지런하고 단려한 것이 여성스러웠고, 쪽지에서 작은 풋내도 솔솔 풍겨져 나왔다.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쪽지를 펼치자, 예쁜 글씨체는 아니였지만, 노력한듯 보이는 조금은 삐뚤 빼뚤한 글씨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온다고 하시기에 만들어봤어요. 북궁진 오라버니.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수향 ]
"냄새는 좋군."
아직은 따뜻한 고기 감자 조림 그릇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던져넣자, 적절하게 간이 배어 있는 것이 맛이 썩 괜찮았다.
"맛있게 잘 했구만 그래."
품 안의 종이 뭉치를 침상 위에 던져넣고, 풀썩하고 끄트머리에 걸터 앉은 일전객, 아니 북궁진은 먹던 고기 감자 조림을 다 먹고 나서야 전우구가 건네 줬던 문서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