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알을 집어 들었지만, 손에서 빠져나간 것은 두 알이였다.
꽈광!
폭음에 땅이 흔들렸다. 피어나는 검은 연막탄
'굉음탄 그리고 착연탄'
군부에서나 얻을 수 있는 물건 들이었다.
사제품을 만들어 뒷골목으로 유통하는 녀석들이 있긴 했지만, 불발일 확률이 높았고, 한 끝으로 목숨을 칼날 위에 세우는 북궁진 그가 쓰기에는 구하기 힘들어도 확실한 당가의 낙인이 박힌 군부 물건을 선호했다.
굉음탄의 엄청난 소리. 그리고 착연탄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가 적혈쌍검을 에워쌌다.
"대체... 이게..."
감각을 통째로 삼키는 두 폭약에 적혈쌍검은 뒷걸음질 쳤다.
북궁진의 눈에 굉음탄 때문인지 놀라 시선을 둘 줄 모르는 유석인이 들어왔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다.
하지만 이 곳은 북경의 버려진 그림자. 원한과 정의감 따위로 살고 죽고 하는 합리적인 공간이 아니였기에 북궁진의 손속엔 망설임 하나 없었다.
북궁진의 흑검이 허공을 갈랐다.
스걱
유석인 역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내리치려는 생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유석인은 느렸고 북궁진은 빨랐다.
츄아악.
그 간단한 차이 때문에 유석인은 목에서 피분수를 뿜고 있었고, 북궁진은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유석인의 핏발 선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 북궁진을 흘겨봤다.
"개..새.. "
욕설을 채 뱉기도 전에 피거품이 입에서 뿜어져 나왔고, 북궁진은 검은 자위가 위로 돌아간 유석인의 눈가를 흘겨보며 그대로 내달렸다.
"어딜!"
들려오는 고함.
적혈쌍검의 목소리였다.
[ 팔문교살화(八門攪殺華)! ]
성난 외침을 타고, 착연탄의 검은 연기를 뚫고 무언가 날아왔다.
여덟 줄기의 핏빛 꽃잎은 하나 모여 꽃을 이루듯 부드럽게 날아왔지만, 실려 있는 기세는 살육 그 자체의 흉흉함을 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감각을 되찾은 듯한 적혈쌍검의 모습에 북궁진은 몸을 돌려 그대로 흑검을 뻗었다.
까강! 까가강!
팔문교살화의 여덟 꽃잎을 하나 하나 찔러냈다. 내공 한 줌 쓰지 않고, 흑검의 위세만을 빌린 수 였다. 상쇄되지 못한 진득한 내기가 흑검을 타고 북궁진의 속을 진탕시켰다.
목 뒤 깊은 곳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내공을 쓰기엔 흑검의 상태가 좋지 않아.'
굳어진 핏덩이들이 떨어져 나간 흑검의 맑은 검신에서 요사스런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흑검이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품에 들어 있는 마지막 세 번째 폭약이 손에 잡혔다.
'안일했다. 안일했어.'
사실 지금 같은 상황은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일이였다. 꽤 잘 나가는 패거리가 무림 고수를 초빙해서 위세를 늘리는 건 흔히 하는 일들이었으니까. 좀 더 준비를 하고, 조사를 했었다면 지금처럼 핏물을 흘리며 도망가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품 속의 폭약처럼 위험한 것을 쓰는 일도 없었을테지.'
증오로 뒤덮여 떠나온 스승의 옛 말이 기억 났다.
[ 죽이려면 죽을 각오를 하고 뛰어들어라. ]
그래서 북궁진은 세 번째 폭약을 꺼내들었다.
정확히 맞출 생각은 없었다. 핏물에서 빠져 나올 운명은 아니였지만, 필요 이상의 죽음은 언제나 화를 불러왔다.
"핫!"
던졌다. 연기를 빠져나온 적혈쌍검은 때 마침 북궁진이 뻗어낸 왼손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폭약?'
생각을 다 마치기 전 북궁진의 손을 떠난 폭약의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 그의 발 근처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적혈쌍검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진짜다.'
양 손에 들린 쌍검을 교차하고 빠르게 뒤로 발을 빼는 적혈쌍검. 그리고 그런 쌍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북궁진은 있는 힘껏 앞으로 내달렸다.
"제에길!"
콰과광!
땅이 터져나갔다. 작은 검은색 구슬과 부딪힌 땅거죽은 찢어 발겨지며 비명을 토했고, 위협이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한 폭약의 위력을 떨치며 허공을 울렸다.
다행히 뒤로 발을 뺀 탓에 사지가 잘려나가는 일은 피했지만, 그 충격파 만큼은 고스란히 적혈쌍검의 전신으로 쏟아지며 들이쳤다.
콰과과!
세차게 쏟아지는 흙과 열기의 파도에 밀려 붕 뜬 적혈쌍검은 날아가, 근처에 있던 짚단 위로 풀쩍하고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듯 움직임은 없었고, 북궁진은 그대로 장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충격파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북궁진의 등 역시 성하지 못했다. 유석인 패거리에게 크게 베인 등의 상처가 타들어가듯 아파왔지만, 일단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나야 했다.
갈 곳은 하나 뿐이였다. 근처에 있는 건가촌의 비밀 닭집. 요리를 지지리도 못해 인기가 없어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는 닭요리집으로 북궁진은 방향을 정했다.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위태로워보였다.
"이 녀석 또 여서 이러고 있네."
"그러게. 깨워서 보낼까?"
"아서라. 또 그러다가 건할아버님한테 된통 깨져. 사서 머리 깨질 일 있냐."
"하긴 그것도 글타."
북적거리는 두 사내의 목소리에 북궁진은 잠에서 일어났다.
어제 밤 다친 몸을 이끌고 도착해 대충 상처를 씻어낸 뒤 그대로 기절해 쓰러지듯 잠이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투덜 거리는 두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턱 하고 닫히는 소리에 북궁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건가의 영역에 속한 닭요리집이긴 했지만, 북궁진 그가 모든 건가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몸은 아니였다. 그저 운이 좋아 할아버님의 이쁨을 받는 낭인 새끼. 이 정도로 생각하고 투덜 거리는 사람도 많았고, 건가촌의 꽃인 건수향이 남몰래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질투로 뻣뻣히 구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였다.
젊은 건가촌 사람들 중 가장 인기 많은 건우간 그리고, 건가촌 사람들의 정신적 주인인 건 할아범의 영향 탓에 대놓고 욕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북궁진도 꽤나 눈칫밥을 먹고 사는 낭인이였기에 대충 돌아가는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소독을 덜해서 그런 건지 어제 당한 상처가 욱씬거렸다. 아무래도 괜찮은 고약이라도 발라야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품 속을 뒤적였다.
"은 두 냥."
꽤나 꿍쳐놨던 돈이 살짝 아까운 느낌은 들었지만, 북궁진은 콧잔등을 살며시 올려치고 은 한 냥을 살며시 침상에 올려 놓았다. 액수가 과하긴 했지만, 잔돈을 들고 다니지 않는 그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뻔뻔한 성격이였다면, 모르겠지만, 날카로운 그의 칼끝과는 다르게 꽤나 이런 면에 있어서 셈이 어두운 편이었다.
창문을 열고 슬쩍 빠져나간 낮의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덥군."
등의 상처가 대낮의 열 때문인지 다시 욱씬 거리기 시작했고, 애써 웃옷을 둘러 상처를 감춘 북궁진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허씨 약방이였다.
허씨 약방은 여러모로 애매한 곳이었다. 기이한 약을 판다던가, 무공을 익혔다던가 등이 아니라, 약방이 위치한 곳이 애매했다.
허씨 약방 자체의 약품의 질은 상당한 편이였다. 뭐 사천 지방에서 꽤나 잘 나가던 약방을 하고 있었는데, 무림인들 등쌀에 짜증이 나 북경까지 옮겨와 장사를 하는 거라고 했다.
전 아내가 사천 당가 출신이여서 그런지, 확실히 약들은 효과가 좋았다. 다만 가격이 비쌌다. 그것이 허씨 약방의 애매한 점이었다.
보통은 지역에 따라서 가격 수준이 오르내리는 법이였다. 가난한 곳엔 저렴한 상점들이, 부유한 북경 중심가에는 부르는 것이 값인 상점들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였지만, 허씨 약방은 가난한 북경 외곽지역에 있는 약방 치고는 가격이 센 편이였다.
어지간한 상처에 바르는 고약이나 간단한 시술도 기본이 은 1냥은 가져가야 비빌 수 있는 고가의 약품만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물건이 좋으면 잘 팔리지!'
가끔 약방의 위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허씨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신기하게도 상술에 대해 제반 지식이 거의 없는 듯 보이는 허씨였지만, 장사 자체는 괜찮게 되는 편이였다. 약의 성능이 좋아, 중병처럼 보이는 질병 같은 것도 곧잘 낫게 해주기 때문에 어찌보면 싸게 먹히는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종종 있곤 했다.
돈은 남지만, 얼굴을 떳떳하게 들고 다니기엔 칼침을 맞는 범죄자들이나, 북궁진 그와 같은 청부 낭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편이였다.
허씨 약방 근처에 온듯 약재 냄새가 풀풀 풍겨났다. 덕분에 길을 외우지 않아도 허씨 약방은 찾기 쉬운 편이였다. 온갖 악취가 나는 골목들이 즐비한 북경 외곽에서 약재 냄새를 풍기는 곳은 허씨 약방 뿐이였으니까.
"간만이군."
꼬장꼬장하게 수염을 꼬고 있던 허씨가 북궁진을 보며 말했다.
"꽤 몸이 튼튼해서 잘 못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칼 휘두르고 다니는 시끄러운 무림인이라 그런지, 오긴 하는 구만."
"무림인이라고 하기엔 거창합니다."
은 1냥을 스윽 내밀면서 북궁진이 말했다.
"상처에 바르는 고약 그거 하나만 주십쇼."
북궁진의 말에 찬장을 뒤적거리던 허씨는 북궁진의 손에 덕지 덕지 묻어 있는 먼지와 피딱지를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흥. 들어오기나해. 그 더러워 보이는 손으로 약을 바를 생각을 하다니."
자주 이런 편이였다. 허씨 역시 손해보는 장사는 잘 안하는 편이였지만, 북궁진에게 있어서는 후한 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씨는 늘 불쌍해보여서 라는 대답으로 일관하곤 했다.
"거기 앉아."
약재통들이 즐비한 약방 내부의 작은 침상을 가르키며 말했다. 침을 놓을 때 쓰는 침상인듯 침상 옆에는 침 바구니가 하나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웃통 까고, 앉아 있어! 데운 물 좀 갖고 올테니."
홀로 웃옷을 벗고 앉아 있는 북궁진은 묘하게 편한 느낌이 들었다. 편한 느낌 보다는 어디선가 경험했던 듯한 기시감이 맞았다. 아마 옛 생각이 나서 일지도 몰랐다.
그 때도 이렇게 수 많은 약재들로 둘러 쌓인 곳에서 스승과 사형 그리고 그 셋이서 있었으니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둘이었지만, 그 때는 그리 더렵혀 지지 않은 추억이었다.
"자! 등을 돌려봐!"
김이 올라오는 물 바구니에 헝겊 하나를 축 걸친 허씨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격은 은자 한 냥. 알지?"
"예. 한 두번도 아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흥!"
데운 물로 적션 헝겊이 그의 등짝에 길게 난 상처를 스윽 훔쳐 내려갔다.
"아따따!"
"쉿!"
치료할 때 입을 여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허씨 영감 다웠다.
굳어 있던 피딱지들이 떨어져 나가고, 짓무르던 상처에서 피가 다시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상처가 화끈하며 달아올랐고, 벌겋게 올라온 상흔을 보며 허씨는 혀를 찼다.
"치료할 줄 모르면, 다치질 말던가, 아니면 소독이라도 좀 하던가."
"그러면 허씨 영감님 장사 안되는 것 아닙니까?"
"네 녀석 하나 없다고 해서 장사 망할거였으면 진작에 망했다."
허씨 노인의 가벼운 핀잔에 북궁진은 피식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한 번도 질 생각이 없는 노인이였다.
얼추 닦아 낸 상처 위를 독한 화주를 살짝 발른 허씨 노인은 작은 검은 죽통에서 풀색 연고를 꺼내들었다.
"원래 있던 검은 약보다 더 좋은거다. 운 좋은 줄 알아. 그 약이 다 팔려서 어쩔 수 없이 이걸로 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영감님."
연고가 발리자, 상처가 쓰라려 왔다. 더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찡그리자, 마치 앞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양, 허씨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려왔다.
"덩치 큰 칼잡이 놈이 이걸로 죽을 상 하기는."
치료를 마치고 일어선 허씨를 따라 북궁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라린 것도 잠시였는지, 서서히 가라앉는 듯 괜찮아졌고, 허씨가 주는 하얀 새 천으로 등을 가로 질러 상처를 동여 맸다.
웃옷을 다시 걸치고 나가려는 북궁진의 귓가에 허씨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남은 약은 안가져가고?"
"거. 은 3냥짜리 비싼 연고인거 알고 있습니다. 검은 연고가 동날리도 없는데 반 통정도발라주신거 아니 그냥 가겠습니다."
"에잉. 등신 같은 놈!"
휘리릭 하며 날아오는 연고 죽통. 이크 하며 고개를 옆으로 피해 집어든 북궁진의 어벙벙해하는 표정을 보며 허씨 노인이 입가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주는 대로 쳐 받아. 귀찮게 하지 말고. 네 녀석한테 그거 준다고 해서 망할 리도 없는 약방이다. 하여간 돈도 없는 놈이 있는 척은."
탁!
소리내며 문을 닫는 허씨 노인을 보며, 북궁진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또 불길하게 운수가 좋은 것 같단 말이야."
의미 없이 주절거리며 북궁진은 그대로 건가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건씨 할아범은 이미 대충 유석인이 죽었는지 아닌지 듣고 알았겠지만, 나중에 떨어질 불호령이 겁나기도 했고, 든든하게 뭣 좀 먹을 요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