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높이 걸려 한참 정오를 달려가는 와중에도 건가촌 근처는 조용하기만 했다. 건가촌에게 있어서 이런 남다른 고요함은 오히려 일상이 멀쩡하게 돌아간다는 증거였다. 주로 건가촌 사람들이 맡는 일들이 청부업이나, 정보 수집 그리고 술장사가 거의 대부분이였다.
그렇게 밤일을 하고나면 다들 늦은 정오쯤에나 점심을 먹으려 일어나는 것이 보통 대부분이였다. 그래서 이런 고요함이 되려 북궁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아!"
살짝 들리는 가녀린 목소리.
누군가 해서 고개를 돌린 북궁진의 눈가에 험하디 험한 건가촌과 그닥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몸에 청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긴 생머리를 머리 위로 틀어올린 그녀는 길죽한 장대로 머리를 고정시키고 있었고, 점심을 위해서 오전 장을 봐왔는지, 꽤 이것 저것 잔뜩 들어 있는 바구니를 양손 가득 들고 있었다.
"아!"
북궁진 역시 그 자리에 멈칫 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순정파는 아니였지만, 그의 인생에 여자를 만난 것은 과거 한 번, 그것도 오랜 기간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쑥맥인지라 마침 꺼낼 말을 찾지 못해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그런 북궁진을 본 여자가 살며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했다.
"어디 다녀오시나봐요. 북궁진 오라버니."
"어. 어제 나갔던 일이 깔끔하게 끝나지 못해서 허씨 약방을 잠깐 들렸다가 오는 일이야."
"약방에는 어쩐 일로..."
부드럽게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북궁진은 머쓱하게 콧등을 긁으며 말했다.
"등에 칼침을 맞는 바람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침까지 그 바깥 쪽에 있는 건가 닭집에서 자다가 치료 받고 오는 길이다."
"등에 칼을 맞으셨다구요?"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살며시 내려놓은 그 여자는 총총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디 한 번 보여주세요. 대체 얼마나 다치셨길래."
여자의 눈에 몸을 가로 질러 물물 맨 하얀 천이 보였고, 좀처럼 찡그러진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이만 저만 걱정하는 것이 아닌 그 모습에 북궁진이 되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중상이였으면, 이렇게 두 발로 걸어오지 못했겠지. 걱정 안해도 된다니까."
"아. 그래도..."
턱.
북궁진은 여자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런 북궁진을 빤히 바라보던 여자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오라버니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죠. 하지만 너무 다치고 다니지 마세요. 우간 오라버니나 건가촌 사람들이 다치고 돌아오는 것만 해도 아찔하단 말이에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장바구니를 다시 들어올리는 여자. 북궁진은 그런 그녀 옆으로 다가가 대신 장바구니를 양 손에 뺏어들며 말했다.
"알았다. 수향아. 노력해볼게."
"부탁드려요. 진 오라버니."
건수향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앞서 걸었고, 그런 수향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북궁진은 느릿하게 뒤를 따랐다.
수향의 말로는 할아버님이 기다린다고 하셨기에 그 길로 바로 건씨 할아범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왔습니다."
"들어와!"
카랑카랑한 목소리. 평소보다 날카로운 걸 보아하니 임무를 깔끔하게 성공시키지 못했던 것이 다 귀에 들어간듯 싶었다.
끼이익.
여전히 그윽한 향내로 가득 찬 방이였고, 호화스런 침구의 장막 너머로 건씨 할아범은 일어나 앉아 있었다. 맞은 편의 팔걸이 의자를 손으로 가르키며 건씨 할아범이 말했다.
"앉게."
이글거리는 시선에 진땀을 흘리며 북궁진이 자리에 앉자, 건씨 할아범이 반투명한 장막 너머로 물었다.
"그래. 사지가 떨어지진 않았고?"
"예. 등에 칼침을 맞긴 했습니다만, 깊게 찍힌 것은 아닌 것 같고, 허씨 약방 약으로 치료는 했습니다."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구만."
후우 하는 건씨 할아범의 한숨이 들려왔다.
"어쩌자고 그리 무모하게 작업에 들어갔나 그래? 자네처럼 신중한 사람이 말이야."
"죄송합니다."
"내가 자네 부모도 아니고, 죄송할 것 없네만, 이 바닥에서는 무공의 달인이라고 해도 쉽게 죽는 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자네가 너무 이상하리만치 일을 서둘러 했다는게 걸려서 그러네. 그 자리에서 폭약을 써야 할만한 상황이였다는게 영..."
침상 근처 머리 맡에 놓여있던 작은 찻잔을 홀짝인 건씨 할아범은 말을 이어갔다.
"적혈쌍검이 고수이긴 하지만서도, 자네가 감당하지 못할 사람은 아닐 텐데. 어째서 폭약을 썼나 그게 궁금했네. 사전에 산공독이라도 당했던 건가?"
내공을 모으지 못하게 흐트러 뜨리는 산공독이라면, 건씨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갔다.
건씨는 북궁진의 진신 실력은 아니여도, 가장 근접한 힘을 엿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적혈쌍검을 상대로 폭약을 3발이나 터쳐야 할 정도로 위급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게 아니라."
북궁진이 허리 춤의 검은 칼집을 툭툭 치며 말했다.
"요 놈이 문제였습니다."
"사혈봉인(死血封印)이 깨졌는가?"
건씨의 시선이 칼집에 닿았다. 착 가라앉은 그 눈빛에 북궁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부 깨진 것은 아니고, 몇 조각 금이 가서 파편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허어. 그랬다면 어쩔 수 없구만. 그런 상황이라면 폭약 뿐이 방법이 없었겠구만."
"그랬습니다."
"조만간 다시 메꿔야겠구만."
홀짝. 건씨 할아범이 남은 찻잔을 비웠다.
"예. 아마 다시 그 동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건씨 할아범이였다.
"유석인은 죽긴 했다더군. 혹여 자네가 제대로 확인을 안했을까 얘기하는 걸세."
"다행이군요. 의뢰는 성사시키긴 했으니. 적혈쌍검은 어떻게 됬답니까?"
"뭐 별로 다치진 않은 모양일세. 잔 상처나 멍은 좀 들었어도 사지가 날아가고 그런 일은 없었다더군. 재밌는 녀석인 것 같더구만. 보통 같으면 자네를 찾아서 복수하려 들어겠지만서도, 일단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소리를 들었다네."
"고향... 으로요?"
"그래. 무공을 배운 곳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복수를 해봤자 남는 것도 없을 것 같고, 자네 보고 잡아봤자 손해만 남는 독벌레 같을 거라며 혀를 차고 떠났다고 하더군."
"하하. 아예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그 말에 북궁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건씨 할아범은 가볍게 조소를 머금고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천만에. 그 녀석이 벌레인게지. 진짜 고수였다면, 자네가 검을 쓰는 것만 보고서도 알았을 걸세.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 녀석들 처럼 말이지."
"제가 검을 쓰는 것을 보고 재밌다곤 하더군요. 아예 맹탕은 아닌듯 싶었습니다. 초식에 실린 내공 수위도 묵직한 것이 손이 떨리고 속이 진탕될 정도였으니."
"호. 사파 치고는 꽤 정통으로 배운 셈이구만."
"저도 그게 좀 놀라웠습니다."
그 뒤로 별 다른 대화는 없었다. 뒷처리 라던지, 허씨 약방에 대한 건씨 할아범의 투덜거림을 조금 들은 뒤, 가벼운 축객령을 들은 북궁진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북궁진은 밖으로 나섰다.
"오라버니!"
밖으로 나간 문 앞에는 건수향이 서 있었고, 건수향의 품에는 이런 저런 찬이 담겨 있는 바구니 하나가 안겨 있었다.
"혹시 식사... 하셨나요?"
"아직."
"그럼 이거..."
부끄러운듯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건네는 바구니. 신세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것을 도로 내미는 것이 더 큰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북궁진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급히 총총 걸음으로 자리를 피하려는 수향을 보며 북궁진이 물었다.
"넌 먹었니?"
먹었을리가 없었다. 바구니 속에 들어 있는 찬들을 보아하니, 건가촌의 점심 준비를 하느라 만들었던 자주 보이곤 하는 찬과 밥이였다. 한 두명도 아닌 건가촌의 식사를 서 넛되는 여자끼리 뭉쳐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뇨. 아직..."
"그럼 같이 먹자꾸나. 이리와."
건씨 할아범의 집 근처에 있는 널따란 탁상의 의자에 앉으며 북궁진이 손짓해보였다. 그 손짓에 건수향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 있을 때, 건씨 할아범의 칼칼한 목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다.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몸도 살점 하나 없는 녀석이 원...거서 하릴 일 없이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부를 때 가서 먹어!"
건씨 할아범의 불호령에 수향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앉았고, 그 모습에 북궁진은 피식하고 웃었다.
바구니 속의 고기 반찬을 수향 쪽으로 밀어주며 북궁진은 말했다.
"어서 먹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아!.. 네.."
뜻밖의 남녀의 식사는 그럴싸한 뒷배경을 담고 시작되었고, 별 다른 말은 서로 주고 받지 않았지만, 우걱우걱 먹어치우는 북궁진도, 그런 북궁진을 힐끗 바라보며 찬을 집어먹는 건수향도 기분 좋은 점심이였다.
건가촌의 한가로운 나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