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흑색 아기고양이
더위가 한창 무르익은 6월 말의 서울. 일기예보에도 없던 난데없는 소나기로 인해 오르막길만 타던 더위가 주춤 가라앉은 어느 저녁 날.
대학생인 별은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강의실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야, 유 별. 우산 씌워준다니까?”
그녀의 옆에서는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는 같은 과 동기,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태준이 그녀 옆에 선 채로 계속해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빗소리가 이 자식 목소리에 묻히잖아...’
별의 짜증은 이미 극에 달했다. 태준의 존재만으로 그녀의 몸과 마음은 이미 불편한 상태였다.
별은 태준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투자하는 시선, 에너지, 시간 그 모든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난 비 그치면 갈거야. 너 먼저 가.”
“무슨 고집이야. 데려다준다고. 아직도 화난거야?”
아직도? 화? 군대에 간 남자친구가 첫 휴가를 나오자마자 클럽에서 여자를 꼬셔 모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지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화가 났냔다.
별은 기가 찼다. 화도, 질투도, 뭣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의 안중 밖의 존재였다.
“내가 화 날 일이 뭐가 있겠니. 그런데 네가 계속 옆에서 시끄럽게 굴면 정말 화가 날 것 같거든? 그러니 이제 좀 가줄래.”
“미안하다고 했잖아. 너 언제까지 이럴거야.”
별은 대꾸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막무가내인 저 인간을 상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면 곧 사라지겠지.'
그렇게 혼자 떠들기를 한참 후, 열심히 열을 내던 태준은 별의 바람대로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 좀 가려나, 싶었던 그 때. 태준은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그녀를 뒤에서 와락 안아버렸다.
별과 태준이 연인이던 시절, 두 사람이 싸울때면 마지막엔 태준이 별을 꼭 안아주며 화해를 청하곤 했다.
별은 그런 태준이 좋았다. 그래서 항상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지.
갑작스럽고 철없는 태준의 행동에 화가 난 별은, 벌떡 일어나 있는 힘 껏 그를 뒤로 밀어냈다.
뒤로 확 밀려난 태준이 휘청 하고 중심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섰다.
별은 씩씩거리며 그에게 의자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태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태준의 기억상)순종적이던 그녀가 이다지도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난 널 그리워 한 적 없고, 너와 다시 엮이고 싶지도 않아.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스토커라고 신고해 버리기 전에."
별은 말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의자를 던져버리고 싶었던 충동을 참은 것은 매우 잘 한 일이었다.
별의 순한 성격 상, 자신이 해를 입힌 상대에겐 (미안한 마음에)더이상 화를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별의 성격을 잘 아는 태준이라면,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별은 참 잘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저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미움이나 원망, 혹은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직까지도 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는 태준의 그 자신감이 아니꼬웠다.
그렇게 쉽게 바람을 핀 이유도, 그 자신감 때문이었을테니.
별은 '버려지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굳이 저 인간이 자신을 또 버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
별은 차가운 빗 속을 헤치며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소나기는 이미 끝물이었다. 별이 집으로 출발한지 3분이 채 되지 않아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자 별이 발걸음의 속도를 낮췄다.
터벅 터벅 힘 없이 걷던 그녀의 발걸음이 집 근처의 좁다란 골목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때, 어디선가 불어온 신기한 향내를 실은 바람이 별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별이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방금 그건 뭐지?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진한 향수냄새? 처음 맡는 향이었는데...’
별의 코가 방금 전 그 향을 다시 맡기 위해 공기 속을 킁킁거렸다.
향기를 쫓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던 별이 전구가 나간 듯 깜빡거리는 한 가로등 앞에 멈춰섰다.
“미야옹...”
별의 발밑에서 나는 소리였다. 불빛이 너무도 희미해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뻔한 검은색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비에 젖은 채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별이 고양이를 향해 쭈그려 앉았다. 그녀가 찾던 신기한 향기가, 이 작은 고양이에게서부터 나온 것 일거라고 별은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처음 맡았을 때처럼 강하진 않았지만, 이 고양이는 분명 아까 그 신기한 향기를 몸에 품고 있었다.
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양이를 바라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서 젖은 고양이를 살며시 집어 들어 품에 안았다.
잔뜩 젖어있는 그 작은 몸뚱아리는 불덩이 같이 뜨거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체온을 느끼자 마자, 별은 이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별이 몸을 일으키자, 고양이가 앞발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놓아달라는 모양새였다.
“안 돼. 열이 이렇게 많이 나는걸. 계속 이렇게 있으면 위험해.”
별이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출발하며 말했다. 이미 많이 지쳤는지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바둥거리기만 하는 고양이가 안쓰러웠다.
아무리 바둥거려도 자신을 내려놓지 않자, 고양이는 이내 저항을 포기했다.
그리곤 어느 샌가 별의 팔에 기대어 가쁜 숨만 쌕쌕 내쉬고 있었다. 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한 별은 수건과 드라이기를 꺼내어 고양이의 털을 말렸다. 숱이 꽤나 풍성해서, 뽀송뽀송하게 말리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따뜻한 바람이 기분 좋았는지, 고양이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이따금씩 큰 눈을 깜박거리며 별을 쳐다보다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곤 했다.
‘밝은데서 보니 정말 귀엽네...’
털을 다 말리고 난 후, 별은 본격적으로 고양이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젖어있을 때도 그랬지만, 말려놓고 나니 털이 정말 새까만 (그리고 윤기 나는)흑색이었다.
처음 별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그 시원한 향기도 은은히 돌았다.
그리고 두 눈은 밝은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인데, 마치 찬란한 별이 총총 박힌 듯 반짝거렸다.
“너 눈이 정말 예쁘구나.”
별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 순간, 고양이가 움찔하고 놀라더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방을 빙빙 돌다가 숨을만한 곳을 찾지 못한 고양이는 현관 앞으로 달려가 문에 두 앞발을 짚고 서서 울기 시작했다.
“문 열어달라는 거야? 안 돼. 너 열이 많이 난단 말이야. 만지지 않을게, 따뜻한데 들어와서 앉아있어. 응?”
별은 문득 고양이와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하지만 그런 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양이가 조심스레 방으로 다시 들어와 방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을 알아듣는 건가, 신기한 생각에 별은 한마디를 더 던져보았다.
“거긴 차가워. 이리와. 가운데로. 정말 안 만질게.”
......
미동도 없었다. 고양이는 그 예쁜 눈을 끔뻑거리며 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동물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본인이 비에 젖어 축축하게 늘어진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막상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걸리적거리는 법. 별은 티셔츠와 바지를 당장에 벗어버렸다.
속옷만 입은 채,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목욕을 하러 들어가는 길.
별은 고양이가 앉아있던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양이는 여전히 처음 그 자세 그대로 꼿꼿히 별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시선만은 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그 시선은 별이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너도 같이 씻을래?”
별이 욕실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제스쳐를 해보였다. 고양이는 눈을 천천히 두 번 깜빡거리더니, 휙 하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뭐야, 거절당한건가? 별은 괜히 머쓱해졌다.
하지만 핑크색 입욕제를 풀어 넣은 따뜻한 욕조물에 몸을 담그니, 그런 괜한 감정들은 눈녹듯 사라졌다.
근처 더 좋은 옵션의 원룸들을 다 마다하고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욕조가 있는 화장실.
물론 인적이 드물다는 것도 한몫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길. 고양이가 앉아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별의 눈에 고양이가 포착된 장소는 방의 정 중앙, 목욕 전 별이 와서 앉으라고 했던 그 자리였다.
별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약간 무섭기도 했다. 별 것 아닌 일에 과민반응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전 날 시험 준비로 밤을 꼬박 새운 바람에, 별은 언제라도 눕자마자 잠들 수 있는 상태였다.
별은 느릿느릿 고양이가 누운 자리 바로 옆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침대가 따로 있었지만 왠지 오늘은 고양이 바로 옆에서 잠들고 싶었다.
불을 끄고 고양이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별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회색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게 “잘 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스르륵 하고 눈동자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별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시원한 파란색의 향기가 별이 잠에 빠지는 내내 그 주위를 맴돌았다.
*****
잠에서 깬 별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식탁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생수병을 찾았다.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맥주 한 잔을 원샷한 듯 ‘캬’하는 효과음을 내고 나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에 햇빛이 가득하다 못해 벌써 날씨가 다시 푹푹 찌는걸 보니 이미 점심시간은 지난 듯 보였다.
고양이도 더웠는지, 어느새 다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별이 고양이에게 인사를 던지자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귀찮은 듯 다시 엎드렸다.
별은 작고 오목한 그릇을 찾아 마시던 물을 덜어 고양이 앞에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물이니까 마셔. 나 이제 할 일 할거니까, 필요한게 생기면 나 불러야한다?”
별은 그대로 싱크대로 가 밀린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늘은 방학 첫날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쉬어야지. 고양이는 오늘까지만 쉬게 두고 열이 내린 것 같으면 내일쯤 보내줄까.’
이런 저런 생각과 함께 설거지가 대강 마무리되어 마른 행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닦을 쯤, 별은 흘끗하고 고양이의 동태를 살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고양이는 별의 시선이 한참 느껴지지 않은 후에야 슬슬 자세를 고쳐 잡는 듯 했다.
관찰당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어느새 슬금슬금 물그릇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캬악!”
물을 마시던 고양이가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놀란 별이 고양이게 달려가 그 앞에 앉았다.
고양이는 경계하는 듯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리 저리 산만하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안아주면 진정되지 않을까, 별은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고양이를 들쳐 안아들었다.
저항이 심했지만 별은 계속해서 고양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세 번 쯤 토닥였을까, 별안간 고양이가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쓰러지듯 별의 팔 위에 걸터 누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양이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고양이가 무거워지다니?
당황한 별이 고양이를 거의 던지다시피 자신의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계속해서 무거워 지고 있었다. 아니, 무게만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덩치가 커지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별은 계속해서 몸이 변화하고 있는 고양이를 무릎에 방치한 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공포감에 몸이 굳어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었다.
간신히 양 팔을 뒤로 짚어 자신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미 한참을 커져 별의 무릎을 삐져나가, 사실 이젠 무릎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 무릎에 살짝 걸친 모양새가 된 그 고양이는, 더 이상 고양이의 형상이 아니었다.
둥근 계란형의 머리가 생기고, 팔 다리가 길어지고, 윤기나던 그 흑색의 털은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고, 별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고양이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색이 살짝 가미된 별 박힌 회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 안에 뭘 넣은 거지?”
그 아름다운 회색의 눈이, 경계의 눈빛을 번뜩이며 낮은 목소리로 별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