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함께 먹을 백반을 주문한 후 (남자는 이계의 음식이 인간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별이 물었다.
“이름?”
“네. 서로를 ‘인간씨’, ‘이인씨’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름은 있죠?”
“내 이름은 찬성(燦星)이다.”
“오... 의외로 평범한 이름이네요. 엄청 독특할 줄 알았는데.”
찬성이 오른쪽 눈썹을 높이 추켜올리며 침묵했다.
별은 찬성을 알게 된지 한시간만에 저 표정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음’의 표시라는 것을 터득했다.
“아, 물론 멋진 이름이긴 하죠.”
별이 찬성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찬성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지만, 침묵을 깨기에는 충분한 대처였던 모양이었다.
“우리 이인들에게 있어서 해나, 달, 별의 이름을 받는 것은 큰 영광이다. 아무나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아, 찬성의 성이 별(星)인가봐요?”
“그래.”
“그럼 나랑 이름이 같네요. 나도 이름이 별이에요. 유씨 성에, 한글로 별.”
“...그렇군.”
찬성은 낮은 대답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는 자신이 인간 여자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굉장히 불쾌했다.
치대는 별이 싫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처한 이 상황 자체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고도 피하려는 내색 없이, 오히려 흔쾌히 도와주고자 하는 별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한시간만에 통성명까지 하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이 여자를 저지하기가 힘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장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을 어느 정도는 본인도 수긍하고 있다는, 나아가 가끔은 재밌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찬성씨라고 부를게요."
"아니. '찬성'이면 족하다. 인간의 호칭은 영 어색하군. 씨(氏)라니."
"음, 그럴게요. 그런데...”
책상에 앉아 구글에 ‘악마’, ‘이인’등 이것저것을 검색해보던 별이 의자를 찬성이 있는 쪽으로 돌리며 톡 쏘아 물었다.
“왜 나한테 반말해요?”
“뭐?”
“아, 이인은 나이가 우리보다 훨씬... 많은가? 한...900살?”
찬성의 짙은 눈썹이 또다시 추켜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별이 최근 본 드라마를 떠올리며 뒤늦게 덧붙였다.
“...나이도 인간들과 비슷하다. 외관으로 보이는 그대로다.”
“에이, 그럼 나랑 얼마 차이 안나보이는데요? 전 스물 여섯 살이예요.”
실제로 찬성을 인간이라 치고 보았을 땐, 서른살이 채 안되어 보였다.
거기엔 햇빛을 한번도 보지 않은 듯 한 희고 깨끗한 얼굴빛이 크게 한 몫 했다.
“난...”
“아, 제가 맞춰 볼게요. 한, 스물여덟?”
“아니.”
“그럼, 서른?”
“아니. 서른 셋이다.”
이제 그는 별이 있는 쪽은 보지도 않고,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 볼 수는 없었지만, 별은 찬성의 눈썹이 이마를 뚫고 올라갈 기세로 굳어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엄청 동안이시네요. 어려 보인다는건, 남자한테도 좋은거에요.”
“우리한텐, 아냐. 우리에게 어려 보인다는 것은, 아직 성숙(成熟)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구나. 이인하고 친해지기 참 어렵네요.”
"..."
찬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그 날 하루가 저물어갈 때 까지 계속되었다.
별은 아직 찬성에게 묻고 싶은게 많았다.
하지만 찬성의 침묵이 ‘난 너하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의미라는걸 어렴풋 느끼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
다음날 아침.
둘은 별이 고양이찬성을 처음 발견한 장소로 향했다.
별의 집에서 5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좁은 골목, 유리가 깨진 가로등의 아래.
“여기에요. 여기서 고양이, 아니 찬성이 비를 쫄딱 맞고 이렇게 파르르 떨고 있었죠.”
별은 양 팔을 굽혀 올려 좌우로 떨며 ‘파르르’를 표현했다.
이를 본 찬성은 순간적으로 픽- 하고 웃음을 지었다가, 0.5초만에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주변을 둘러 돌을 찾는데 집중했다.
이인이랑 친해지기 정말 힘드네, 하고 별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웃었으면 웃은거지 다시 정색은 왜 한담.
“날 처음 발견했을 때, 주변에 귀환석이 떨어져 있지 않았던게 확실한가?”
“최소한 이 가로등 불빛 범위 내에서는요. 어두운 시간대여서 100%장담은 못해요. 하지만 주변에 반짝이는 물건은 없었어요.”
두 사람은 그 지점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골목이란 골목은 다 지나다니며 바닥을 훑었지만, 빨간 돌은커녕 빨간색의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빨간 돌이 매달린 목걸이를 골목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갔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만약 누가 주워갔으면 어떻게 해요?”
“괜찮다. 힘이 회복되면 귀환석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추적할 수 있어.”
“본모습으로 돌아온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야 힘이 돌아오는 거예요?”
“그래. 그래서 하루는 쉬고 다음날 나온 것인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찬성은 티끌만한 작은 기운이라도 느껴보려 눈을 감고 주변에 집중했지만, 귀환석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찬성을 구경하고 있는 별의 앞에, 얼룩무늬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길고양이는 담벼락 위를 도도하게 걸으며 별에게 ‘미야옹’하고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야옹아, 안녕!”
마치 아는 고양이인양, 동물을 좋아하는 별의 손이 본능적으로 길고양이에게 향했다.
탁,
그런 별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리며 찬성이 고양이와 별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별과 담벼락의 사이 간격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찬성과 별은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찬성의 큰 키 때문에, 키가 160이 채 되지 않는 별은 고개를 위로 바짝 들어 올려야만 했다.
별을 내려다보는 찬성의 눈, 그 회색의 눈이 햇빛을 받아 더욱 반짝였다.
“눈앞에서 내가 변하는 것을 보고도, 저걸 만지고 싶은 것이냐. 저게 무엇일지 어떻게 알고.”
“고양이잖아요. 치즈색 얼룩에 귀여운 고양이.”
“나도 어제 아침까진 고양이였지... 귀엽진 않았지만.”
꽤 귀여웠어요.
별은 차마 이 말을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설마, 세상 모든 고양이가 이인인건가요?”
“...그렇진 않지. 이인이 고양이로 인간계를 돌아다니는건 매우 드문일이다.”
그럼 만져도 되잖아요, 라고 별이 말하려는 순간 그 길고양이는 담벼락에서 아래로 내려와 저 멀리로 총총 달려가 버렸다.
아쉬웠지만, 찬성에게 말을 붙일 새로운 주제가 생긴 것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저한테 무슨 일 생길까봐 걱정해주신건가요?”
“...”
찬성은 대답이 없었다.
사실 그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내가 저 인간을 걱정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왜 이 인간을 굳이 막아서고 있는가?
“그건 됐고, 찬성은 왜 여기에서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
이 또한 찬성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서로의 눈을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10초쯤 뒤, 찬성이 먼저 별의 눈을 피하며 그녀의 앞을 빠져나갔다.
“1년간 추방당했다. 힘을 봉인당한 채.”
“추방이요? 뭔가... 큰 죄를 저질렀나요?”
“...아니. 나는 죄를 짓지 않았어.”
이것은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이기도 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이 말을 왜 왕께 그대로 고하지 못했던가.
“알아요, 그럴 것 같았어요.”
별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조용히 주변 골목을 한 시간 가량 더 돌았다.
물론 귀환석은 찾을 수 없었다.
*****
정오가 되고, 날이 더워지자 두 사람은 집으로 대피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시작해 날씨가 선선해지는 저녁쯤, 다시 나와 수색을 시작했다.
얼마나 걸어다녔을까.
가로등 불빛 없이는 피하식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밤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귀환석의 행방에 대한 힌트조차 얻지 못했다.
첫 날이니까. 힘이 조금 더 돌아온다면 뭔가 진척이 생기겠지.
두 사람은 애써 긍정적인 마음을 품고 집으로 발을 돌렸다.
“뭐 먹고싶은거 있어요? 요리 해줄게요.”
집 앞 마트가 보이자 별이 물었다.
“가리지 않는다. 그럴 처지도 아니고.”
“싫어하는게 없다고 좋아하는 것 까지 없진 않을 것 같은데요. 좋아하는거 없어요?”
별은 꽤나 끈질긴 면이 있었다.
무언가 답해주지 않으면 집에 가는 내내, 집 안에 들어가서도 같은 내용으로 귀찮게 할 것만 같은 느낌에 찬성은 대답을 않는 것을 포기했다.
“...돼지고기.”
“오~ 저랑 취향이 같으시네요. 오늘은 저녁은 제육볶음으로 하면 되겠어요.”
별은 바로 방향을 틀어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찬성이 작게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마트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산 별은 파, 양파, 마늘 등 온갖 식재료를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난 분명 돼지고기라고 했을 뿐인데, 무슨 채소를 저렇게 많이 사는거지.’
찬성은 별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돼지고기를 요리하는데 저렇게 많은 재료들이 필요했던가?
실제로 단 한번도 스스로 무언가 요리해 본적이 없는 찬성이었다.
게다가 마늘과 양파라니...
“저, 저기.”
“별 이라니까요. 내 이름.”
“그래, 별. 거기 들어있는 양파하고 마늘은 도로 갖다놨으면 하는데.”
가리는 것 없다던 찬성이 식재료를 골라내는 모습에, 그리고 이를 위해 종일 별을 멀리하던 찬성이 별의 이름을 불러준 그 모습에 별은 기분이 좋아졌다.
“가리는 것 없다면서요. 마치 드라큐라 같네요. 마늘하고 양파가 싫다니.”
“그 드라큐라 라는 인간들의 전설도, 우리 이인들의 옛 이야기긴 하지.”
“정말요?!”
앞서서 걷던 별이 홱 하고 뒤돌며 찬성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찬성을 빤히 바라보며,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해 했다.
“드라큐라, 서큐버스, 이 나라에도 구미호라는 전설이 있다지. 그런 대부분의 것들은 다 과거의 이인들의 행적이 와전되어 생긴 전설이다.”
“현재엔... 그런 이인들이 없구요?”
“지금은 인간을 해하는 행위가 금기시 되어있으니 없지. 물론... 인간이나 이인이나, 금기를 행하는 소수는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별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은, 찬성이 자신도 모르게 이인계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뱉어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호기심을 채운 별이 ‘대박, 신기하다’ 등등의 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뒤로 돌아 걸어갔다.
찬성은 ‘그러니 내가 없어도 고양이는 조심해.’ 라고 하며 마늘과 양파가 장바구니에서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