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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반려(伴侶)
작가 : 미로
작품등록일 : 201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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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와줘, 도와줘요...
작성일 : 17-06-15     조회 : 304     추천 : 1     분량 : 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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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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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 모두 잠든 깊은 밤.

 

 침대머리의 시계는 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 시계소리만 간간히 흐르는 고요한 별의 방 안으로, 은색의 한기(寒氣)가 소리 없이 흘러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주변의 온도에, 별이 잠에서 깼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잤던가? 별은 덮고 있던 면 이불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좌우로 뒤척였다.

 

 

 “찾았다...”

 

 

 소름끼치도록 거친 목소리가 한기 속에서 들려왔다. 찬성이 자고 있던 방향이었다.

 

 별은 깜짝 놀라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으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희미한 은색 빛이 방 안을 흘러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번쩍. 붉은 눈동자가 별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별은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찬성...?”

 

 

 그녀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찬성을 불렀다.

 

 눈동자는 말없이 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별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자신 앞에 선 사람의 형태가 얼핏 보이게 될 때 쯤.

 

 앞에 선 누군가의 손과 소매가 사라락 하고 별에 얼굴을 스쳐 내려갔다. 위에서, 아래로.

 

 별은 자신이 앉은 그 자리가 그대로 늪으로 변해, 조금씩 가라앉는 듯한 환각에 빠졌다.

 

 다리가 가라앉고, 허리, 그리고 가슴... 별은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도와줘, 도와줘요...’

 

 

 별은 계속해서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지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늪의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갔다.

 

 차오른 늪이 별의 입을 덮었다. 코, 그리고 눈을 덮고.

 

 어느새 별은 머리카락 한 올도 남김없이 늪 안에 잠기고 말았다.

 

 ......

 

 답답해, 숨이 막혀, 나가고 싶어. 구해줘요... 찬성......

 

 

 “별?”

 

 

 별이 눈을 떴다.

 

 하얀 천장, 작년에 달아둔 모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 내 방이다.

 

 그리고 침대 맡에 앉아 내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는 이 사람.

 

 정말 나를 구해줬다.

 

 그의 손에선 첫 만남에서 그랬듯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악몽으로 인해 한껏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편안해졌다.

 

 

 “굉장히 나쁜 꿈을 꿨나보군.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가면서도 한참을 깨지도 못한걸 보면.”

 

 “네, 굉-장히. 나쁘다기 보단 이상한 꿈이었어요.”

 

 

 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늪 밑으로 빨려 들어가던 그 끈적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어떤 꿈이었길래?”

 

 “늪에 빠지는 꿈이었어요. 마치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쑥 빨려 들어가는데... 어, 근데 늪엔 왜 빠졌더라. 그 전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별은 꿈의 내용을 전부 기억해보려 했지만, 모든 꿈이 그렇듯, 첫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라앉는 느낌을 무서워하나 보군.”

 

 “그걸 안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나요? 정말로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니까요.”

 

 “알았다, 참고하지. 슬슬 일어나서 준비하는게 좋겠군.”

 

 

 이런걸 참고해서 어디 쓰겠다는건지.

 

 별에겐 그런 자잘한걸 따져 물을 시간이 없었다.

 

 별이 악몽에 빠져 헤매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오전 열한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두 사람은 어젯 밤, '내일 오전 열시 쯤 출발하자' 라고 계획을 세웠었다.

 

 

 *****

 

 

 “지금 어디 가는거예요?”

 

 

 말 없이 한참 찬성을 따라 걷던 별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혔다.

 

 걷는 것은 좋아했다. 체력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그렇게 덥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처 없이 걷기만 하기엔 너무 지루했다.

 

 목적지라도 알아야 계속 따라 걷던 말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궁(古宮). 고궁이 늘어선 곳에 작은 찻집이 있었다.”

 

 “고궁...? 기와로 덮힌 옛날 궁전 말하는거죠?”

 

 “그래. 아름답더군. 이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있다.”

 

 

 걷던 길을 쭉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고궁이라고...?

 

 별은 머릿속으로 서울의 지도를 그려 보았다.

 

 ...창덕궁. 두 사람이 서 있는 길의 끝엔, 아름다운 고궁인 창덕궁이 있다.

 

 찬성이 말한 방향은 정확했다.

 

 문제는 지금 두 사람이 서있는 곳에서부터 창덕궁까지 걸어가려면 지금까지의 속도로 두시간을 족히 걸어야 한다는 것.

 

 

 “창덕궁까지 이렇게 걸어서 왔다갔다 한 거예요...?”

 

 

 찬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 취급하지 말라더니... 세상에 이런 비효율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도대체 이인계는 어떤 곳이기에 이 남자는 왕복 네 시간을 걸어 다니는걸 이리도 당연하게 여기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와요.”

 

 

 별은 찬성의 팔을 잡아 끌며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이 아니다.”

 

 “알아요, 잠자코 따라와요. 찬성이 생각하는 그 장소에 데려다 줄테니.”

 

 

 찬성은 살짝 못미더운 눈치였지만 마지못해 별을 따라 걸었다.

 

 1분쯤 걷자 두 사람이 걷던 골목이 대로와 만나며 끝났다.

 

 그리고 대로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두 사람 앞에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별은 그대로 찬성을 이끌고 역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하(地下)로 내려가는 건가...?’

 

 

 찬성은 지하도로 내려가는 계단을 코앞에 두고 멈춰 섰다.

 

 별이 왜 자신을 지하실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는지 의아했다.

 

 이인계에서의 ‘지하’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감옥과 고문실... 아무리 좋게 사용해 봐야 (금지된)실험실 정도였다.

 

 

 “안내려오고 왜 서있어요?”

 

 “왜 지하로 들어가는 거지? 저 안엔... 뭐가 있는 거지.”

 

 “지하철을 타려구요. 아, 이인계엔 지하철 전철 이런게 없나요?”

 

 

 찬성은 긴장 반, 분노 반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 없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차는 알죠?”

 

 

 별은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을 가리켰다.

 

 찬성은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이인들도 대부분 자기 소유의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대중교통'이라는 것은 이인계에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단어였다.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다란 자동차가 있는데, 그걸 우린 전철 혹은 지하철 이라고 불러요. 그걸 타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 겁먹지 말고 내려와요.”

 

 

 별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찬성은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참 힘들었다.

 

 

 “정 내려가기 싫으면 그냥 다른 방법으로 갈까요?”

 

 

 찬성은 고개를 좌우로 짧게 저었다. 유난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러고 있는 듯 했지만.

 

 인간계에선 지하가 그닥 위험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별이 자신을 위험하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는 것은 찬성의 의식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찬성보다 두 계단 밑에 서있던 별은, 보다 못해 찬성과 같은 층계로 올라가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그와 몸을 밀착시켜 단단히 팔짱을 꼈다.

 

 

 “자, 이제 같이 내려가요. 왜 지하를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우린 차를 타러 가는 것 뿐이예요. 괜찮아요. 같이 있잖아요.”

 

 

 찬성은 별의 힘을 빌려 느린 속도로 한걸음, 한걸음 지하로 내려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하’로 내려갔던 그 날도, 누군가에게 팔짱이 끼워진 채였다.

 

 찬성이 고양이의 모습으로 봉인되어 인간계로 추방당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인생을 통틀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찬성의 유일한 단 하루.

 

 

 “자, 다 내려왔어요. 별거 없죠?”

 

 

 실로 그랬다. 찬성이 알고 있는 ’지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주변은 지상 못지않게 밝았으며, 그 안은 이리 저리 이동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별은 찬성을 데리고 일회용 카드를 발급받아, 지하철 탑승 장소로 한층 더 내려갔다.

 

 그제서야 긴장이 조금 풀린 찬성이

 

 

 “겁 먹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라며 중얼중얼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네네 그러시겠죠, 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별은 그가 지하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강한사람’ 이라고만 생각했던 찬성이 그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뭔가 떠올리기 조차 힘든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으레 짐작할 뿐.

 

 찬성은 전철에 올라탄 후에도 한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쾌적하군. 빠르고. 전철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자신을 흘끗흘끗 쳐다보며 꺄르륵 거리는 저 인간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저들은 왜 나를 보고 소곤거리는 거지?”

 

 “음... 잘생겼으니까요?”

 

 

 별은 얘기가 나온 김에 옆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항상 예쁘다고 생각한 눈이 아니고서라도, 찬성의 이목구비는 부분 부분이 모두 준수했다.

 

 좌우로 나란히 앉은 상태에서 올려다보니, 그의 잘 뻗은 턱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소년상이라기 보단 호남형에 가까운 인상. 살짝 날카로운 매력을 갖춘 호남형 이었다.

 

 여자라면 누구라도 지나가며 한번 쯤 쳐다볼 만한 외모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군.”

 

 

 찬성은 너무도 쉽게 별의 대답에 수긍했다.

 

 

 “너무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녜요? 혹시 이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외모가 뛰어나다던가?”

 

 

 그렇다면 이 사람과 꼭 친해져야지.

 

 별은 순간적으로 수려한 미남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찬성과 친해진다고 다른 이인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이인들도 외향은 천차만별이다. 개중에서 내가 뛰어난 편인거지.”

 

 

 ...재수 없다.

 

 자신이 잘생긴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찬성을 보며, 별은 하마터면 저 말을 입 밖으로 낼 뻔 했다.

 

 보통 ‘난 잘생기지 않았다’며 겸손한척이라도 하지 않나? 원빈조차도 그렇게 하던데.

 

 이인이라 다른 건가? 별은 혼란스러웠다.

 

 찬성은 표정이 썩 좋지 않은 별에게 가까이 다가가, 별의 귓가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라고 작게 속삭였다.

 

 꼭 이 이인과 친해지고 말거다.

 

 별은 쓴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꼭 격 없이 친해져서 이 잘생긴 면상에 대고 ‘재수 없어.’라고 말해주고 말테다.

 

 

 *****

 

 

 3호선 안국역에 내려 도보로 약 5분.

 

 두 사람은 창덕궁 앞에 도착했다.

 

 

 “여기 맞아요? 느껴지나요, 그... 기운?”

 

 “그래.”

 

 

 찬성이 조용히 대답했다.

 

 한 사람이 아니다. 여러명의 이인의 기운.

 

 그것도 꽤 높은 수준의 기운이 이 근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계에 이정도 규모의 무단이탈자 집단이 숨어있을 리는 만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한 찬성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폈다.

 

 곧, 왕께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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