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스러운 듯 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함께 주는 기와지붕 없는 사각형의 나무 건물.
짙은 고동색으로 고풍스럽게 잘 짜여진 벽면.
‘어서오세요'라는 황금색 글씨가 쓰여진 검은 팻말이 걸려있는 널찍한 통유리 문.
문 안쪽에는, 적은 수지만,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
별과 찬성은 고즈넉한 매력을 풍기는 아담한 창덕궁 찻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 찻집의 풍경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깜짝 놀란 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땐, 나무로 된 벽과 테이블, 손님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홀 안에 별과 찬성이 덩그라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인계 기사단 서울지부의 내부에 도착했다.
“2급 무사 왕실호위대장, 찬성이다. 지부의 관리자를 만나러 왔다.”
갑작스런 배경 변환에 겁을 집어먹은 별과 달리, 찬성은 예사스러운 듯 차분하게 허공에 대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건물 내부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수상할 정도였다.
찬성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같은 공간 내에 다수의 이인이 있다. 그런데 왜 주변이 이리도 조용한거지?
찬성은 입구에서부터 조금씩 전진하며 주위를 살폈다. 복도나, 문을 찾아서.
별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그의 뒷모습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근원을 알 수 없는 역한 냄새가 별의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심하진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나쁜 냄새였다.
불안해진 별은 찬성에 뒤에 바짝 붙으려 발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바닥에 찰싹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손도 발도 몸의 어느 부분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별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굉장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직 위험한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아직이 현실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별이 보이지 않는 힘에 묶여있는 동안, 찬성은 한 걸음 씩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찬성을 불러 세워야만 했다.
움직여라 제발! 하지만 아무리 힘을 강하게 들여도 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소리라도, 신음이라도, 숨소리라도...
별은 찬성을 불러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힘만 빠질 뿐이었다.
‘돌아봐요, 제발...’
별을 묶어둔 기분 나쁜 힘 때문인지, 그녀는 급격히 지쳐버렸다.
몸이 움직여지기만 한다면 당장에 바닥에 쓰러져버릴 것 만 같았다.
무서웠다.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별의 눈엔 어느새 투명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기에, 눈물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별의 두 눈 가득히 차올랐다.
그리곤 이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툭, 툭.
몸이 굳어버리던 그 순간, 별의 고개가 살짝 아래를 향하고 있었던 덕분에, 눈물은 별의 양 볼이 아닌 건물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극심한 적막 속에서 울린 눈물소리를 눈치 챈 찬성이 그제야 몸을 돌렸다.
“별? 왜 그러고 서있지?”
그때까지도 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찬성이 물었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별의 대답을 기다리던 찬성은, 그녀가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음을 알아챘다.
이상하다 느끼던 바로 그 때, 희미한 은색의 빛이 별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을 찬성이 뒤늦게 발견했다.
아차.
함정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나.
...무진. 곧 무진이 올 것이다. 그가 오기 전에 이 근방을 벗어나야만 한다.
찬성은 별을 향해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으나 이미 찬성 또한 결박당한 후였다.
결박의 강도나 기운으로 보아, 무진의 힘은 아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방심하여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순간적으로 속박당하기까지...
그것도 이런 조무래기들에게 말이지.
‘...건방진 것 들.’
별은 찬성의 눈이 태준을 제압할 때처럼 핏빛으로 물들어 작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찬성은 다량의 기운을 모아 아주 짧은 찰나에 강하게 밖으로 터트렸다.
푸른 빛이 찬성 주위에서부터 회오리치며 퍼져나갔고, 파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찬성을 결박하고 있던 은색의 기운들이 부서져 흩어졌다.
찬성은 그대로 별에게로 달렸다.
그는 굳어있는 별을 온 몸으로 조심스레 껴안았다.
그리고 행여 별이 다칠까, 빛을 에둘러 그녀를 보호한 후, 그녀를 결박하고 있는 기운을 천천히 벗겨냈다.
파스스스스...
별의 온 몸에서 무언가 바스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별은 힘없이 찬성의 위로 쓰러졌다. 그는 그런 그녀를 두 팔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찬성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려 하자, 찬성과 출구 사이를 은색의 빛무리가 겹겹이 가로막았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볼 참인 모양이었다.
아마, 그가 그러라고 시켰을 테지.
“아서라. 너희 힘만으론 날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의 말이 맞았다.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인들은, 찬성의 경고에 살짝 동요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찬성을 순순히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랬다간......
“내가 너희들의 기운을 기억하겠다. 나와, 이 여자를 위험하게 만든 죄인으로서.”
찬성의 마지막 경고가 끝남과 동시에 찬성의 푸른색 빛이 맹렬한 기세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엔, 부서진 벽의 잔재만이 남아있을 뿐, 찬성과 인간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찬성은 기운이 바닥났음에도, 멀어져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별을 안은 채 무작정 뛰었다.
바닥을 넘어서, 찬성은 이미 가용기운보다 훨씬 넘치는 양의 기운을 사용한 후였다.
힘이 ‘봉인’되었다가 회복이 막 시작된, 즉 아직 힘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강제적인 힘의 사용은, 굉장히 위험한 부작용을 동반했다.
힘의 총량의 소실(消失).
그 소실량이 0일지, 100일지는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었다.
이인에게 있어 힘의 총량이란 곧 수명을 의미했다.
이인들 중에서도 천성적으로 힘을 타고나야지만 얻을 수 있는 직책인 무사(武士).
그 중에서도 각 부대의 대장급인 2급 무사인 찬성이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찬성은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이 안고 있는 '이 여자의 생명'을 고작 '자신의 힘의 일부'따위와 교환할 수 있었던 것에 그는 감사하고 있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정도면 됐으려나 싶어 뛰던 것을 멈추고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을 차린 별이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은가.”
별은 찬성에게 내려달라고 한 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그와 마주섰다.
그녀의 얼굴엔 흐르고 흘러 그 자리에 선명히 말라버린 눈물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괜한 일을 겪게 했군. 화가 많이 났을 테지. 자신을 그런 위험 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니.
하지만 앞으로도 별은 찬성과 함께 다녀야만 했다.
무진의 분파가 별의 존재를 알아버렸으니, 별은 이제 찬성보다 더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찬성과 함께 다니는 것이, 그나마 그녀가 ‘덜’위험해질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 아마도 당분간 혹은 꽤 오랜 기간, 그녀가 ‘안’위험해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찬성은 이런 사실들을 눈 앞에 서있는 이 가엾은 여자에게 전달할 염치가 없었다.
“그건 제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땀이 많이 나요.”
하지만 이 지나치게 이타적인 여인은, 화를 내거나, 이 어이없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는커녕 땀에 젖은 찬성의 이마를 그 가녀린 손으로 걱정스레 짚어냈다.
“열이 많이 나요... 어떡해. 병원, 아니, 그냥 집으로 가요. 집에 가서 쉬어요.”
별은 창덕궁으로 왔을 때처럼 찬성의 팔을 잡고 이끌어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찬성의 다리는 그 자리에 박힌 기둥이 된 것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촉촉해진 회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별을 지긋이 응시했다.
“왜 화를 내지 않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는거냐.”
“제가 왜 찬성에게 화가 나야해요...? 찬성이 저를 구해준걸요.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요. 감사인사가 늦었네요. 정말 고마워요, 구해주셔서.”
별은 진심이었다.
어떤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인지도 모르는 그 어두운 곳, 그 차가운 공포 속에서 그녀를 구해준 것은 찬성이었다.
오히려 별은 자신 때문에 쉽게 풀릴 일이 꼬여버렸다며,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생각 없이 찻집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바보같이.
“하... 나 때문에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팔 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의 위험이 아니라, 목숨이 위험했단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비슷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데...!”
“제가 선택한 일이예요. 찬성 때문이 아니죠.”
도리어 본인이 분통해하고 있는 찬성의 말을 별이 단호히 끊었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지부에서 탈출하던 찬성이, 그녀를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데 많은 힘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호하는데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는 일을 더욱 쉽게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이란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온 몸에 비오듯 땀을 흘리며 나를 안고 뛰어다닐 일도 없었을테지.
역시 인간과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며, 이젠 네 도움은 필요 없다며, 당장에 별을 버리고 혼자 길을 나선다 해도, 별은 그를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귀환석을 찾는 것을 돕겠다고 했고, 제가 제 발로 찻집에 따라 들어갔어요. 위험을 선택한건 저고, 찬성은 그 위험에서 저를 본인의 힘을 들여가며 구해준걸요.”
“...그럼 도대체 왜 나를 돕겠다는 선택을 한거지?”
“그야 찬성이 귀환석을 찾으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덕분에 귀환석을 쉽게 찾았다 치면, 무슨 이득이 돌아오지?”
“음, 찬성이 더 빠르고 편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겠죠.”
“나 말고 너, 그대에게 말이다. 무슨 이익을 위해 나를 돕는 선택을 했느냔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찬성이 별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런 찬성의 물음을, 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돕고 싶은 사람을 돕는 것에 꼭 이득이나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걸까.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전 그저 찬성을 돕고 싶었을 뿐이에요. 돕고 싶다는 제 소망을 이루었으니 그 자체로 이득이라면 이득이죠.”
“남을 돕는 과정에서 본인이 막심한 손해를 입게 된다 하여도?”
“돕겠다는 선택을 제가 한 것이라면, 손해를 본다 해도 그 책임은 제가 져야죠.”
별은 단호했다. 찬성을 만나기 아주 오래 전 부터, 별은 그런 사람이었다.
찬성은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 이어, 그녀의 생각을 바꿀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답답한 인간. 하지만 참 신기한 심성이다. 참 예쁜 마음씨다. 나만 알고 싶을 정도로.
참, 지켜주고픈 여인이다.
“좋다, 그 말대로라면 난 위험에서 그대를 건져 나온 그대의 은인이라, 이거군.”
“네. 그 은혜는 꼭 갚고 싶어요."
...갚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지.
"아, 혼자 다니셔도 괜찮아요. 오늘 일을 보니, 그쪽이 찬성씨에겐 더 ‘이득’일 것 같네요.”
별은 전혀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었지만, 말투가 비꼬는 듯 나간 것 같아 아차하며 찬성의 눈치를 살폈다.
오랜만에 찬성의 눈썹이 잔뜩 치켜진 것을 보아, 기분이 상당히 나쁜 듯 했다.
은혜를 갚겠다고 해놓고, 3초 만에 무슨 말실수람. 유별 바보. 멍청이.
“정말 은혜를 갚고 싶다면, 우선 그런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네... 죄송해요. 비꼬려던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따라다니면, 또 짐이 될 것 같아서...”
“그러니 하는 말이다. 내게 그대의 존재는 득이면 득이지 단 한 톨도 실이 아니니, 그런 생각을 아예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별이 처음 찬성이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변하던 날의 그 토끼눈을 하고 찬성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그마저도, 찬성에겐 귀엽게 보였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지 찬성 자신도 알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밝고 호기심 많은 별의 모습은 찬성을 기분 좋게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세상만사에 이타적인 별의 행동은 찬성을 욕심나게 했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세상 모든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 이였으면 좋겠다... 하는 욕심.
......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녀를 지키고 싶다. 아니, 지킬 것이다.
“내가 부탁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찬성이 조용히 묻자, 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찬성은 작게 파인 그의 보조개에 자신의 입 꼬리가 닿을 만큼 크게 씩 웃으며 한 손을 별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