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병원 옥상으로 도망쳐 왔다. 뛰어 올라오는 동안 누군가 뒤쫓는 기척을 느끼진 않았지만, 차마 널따란 옥상 가운데에 서서 있을 순 없어서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물탱크 뒤편으로 숨어들며 아까의 부끄러웠던 일들에 자책한다.
“나는 왜 그 남자 팔을 빤히 쳐다봤을까? 병원에선 그래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데.”
기껏 옥상까지 어찌어찌 도망오긴 했는데, 이번엔 여름 방학이 끼어 있어서 자원봉사자들이 유난히 많은 시즌이고, 방금 전까지 날 비난했던 여학생은 방학 때마다 유난히 병원에 자주 들르는 자원봉사자 중에 하나였다.
‘하필 그 애한테 그런 표정을 들킬 건 뭐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순 없지만 무지 노골적이고 추한 표정일 거라고 여겨져서 몹시 부끄러웠다.
“왜 그랬을까? 쳐다보려면 밖에 나가서 그러지. 왜 하필 직장에서 그랬을까?”
턱-!
갑자기 나타난 그.
‘아, 맞다! 이 남자. 여기다 컵을 말린다고 했는데. 바보같이 여기로 도망 와 버리냐?’
자책하는 동안엔 아무도 날 찾아내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아무래도 너무 큰 바람이었나보다. 이 남자가 날 방해하는 걸 보면.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는데 그가 눈이 사라질 정도로 싱긋 웃으며 내 옆으로 쭈그려 앉는다. 말 걸지 않기를 바랐지만 역시, 그런 기대조차 말라는 듯이 말을 거는 그.
얄밉다.
“여기서 넋 빼고 뭐해요?”
“네? 뭐라고요?”
남자에게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데 그는 여전히 싱긋, 싱긋 웃으며 묻는다.
“아까부터 그러더니, 아직도 넋이 나가있네. 정신이 안 나요?”
“······.”
그가 멍한 내 얼굴위로 손을 흔들다 말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거세게 볼을 꼬집어버린다.
“아야!”
‘남의 볼은 왜 꼬집고 난리······.’
“그쪽 볼 아니거든요?”
“이제 정신이 나는 중?”
즐거운 듯 웃음 섞인 그의 말을 들으니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다.
‘말을 말아야지.’
“좀 나네요.”
“그럼, 이제 차 한 잔 마셔요.”
“······.”
“이제 간접 키스 한다고 뭐라 그럴 사람 없는데. 아직도 눈치 보여요?”
딸꾹.
“예?”
남자의 능글맞은 말투에 딸꾹질이 튀어나오며 또다시 당혹감이 든다.
‘이 남자, 이미 알고서 괴롭히려고······.’
“당신. 되게 귀엽고 단순한 거 알아요?”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난처한 일을 피해 도망 쳤으면, 당신을 난처하게 만든 사람을 피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잖아요.”
남자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나, 난!”
“오히려 날 따라 온 꼴이 되어버렸어.”
“사람 심란하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죠?”
“어쩐지 날 좀 심하게 핥더라니.”
‘이 남자가 왜 갑자기 이렇게 느끼하게 굴지?’
“내, 내가 언제요?”
당혹감에 얼굴이 심하게 익어간다. 그는 이런 내 모습을 모르는 척 할 마음이 없는 듯 가벼운 말투로 묻는다.
묻지 말아줬으면 싶은 말들만 내뱉으면서.
“아니라고요?”
“······.”
“거봐요. 할 말 없죠? 이제 보니 도망 친 것도 핑계야. 사실은 그새 내가 보고 싶어진 거지. 사람들이 추궁하니까. 옳다구나. 옥상으로 돌격~ 솔직한 여자라 더 맘에 들어.”
“아니거든요? 아주 업그레이드 도끼병 나셨어요.”
“아니라고?”
“네.”
“난 우리가 헌혈원에서부터 운명적으로 끌렸다고 느꼈는데. 정말 아니었어요?”
‘이젠 하다, 하다, 운명 드립까지.’
“대체 어느 시대 사람이에요? 아저씨 같아.”
“나이로만 보면 아저씨는 맞죠.”
“흥!”
“마흔이 가까워 오는 나이니까.”
“마흔이요?”
“정확히 말하자면 서른일곱.”
“나이 안 물어봤거든요?”
“궁금해 하는 것 같아서.”
“아니거든요?”
“아니라고요?”
“아.니.에.요.”
“그럼 아까의 핥는 시선은······.”
“착각이거든요?”
“아님, 혹시······.내 몸을 노리고?”
“아으~~ 아니거든요?”
그가 자꾸만 놀리듯이 말한다.
나는 어느새 빨라지기 시작한 심장의 떨림을 제어하기 위해 이렇게 애가 타는데······. 그는 이 상황이 재밌고 좋은가보다.
‘난 장난이 아니라고.’
“진짜 아니에요.”
결국 구시렁거리는 구차한 나만 남아버린다. 정말 짜증스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