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선수 쳐 버렸어.”
제대로 상대방을 탐색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깃발을 꽂아버린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틀어져 버렸다.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곤 있지만 그것의 정체가 단발적인 것일지, 장기적인 관심일지도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런데 이 남자는 너무 제 의도대로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강해보인다.
뭐든지 자신이 지배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듯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나 역시 상대방을 지배 해야만 성에 차는 타입이라 이거지.”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초식남과 같은 외양을 갖고 있음에도 의외로 전혀 다른 성향을 보여주고 있는 남자.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하면 무조건 여자도 좋아해야만 한다. 자신이 확신하고 있으면 그 여자는 확실히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해 버리는. AtoZ에서 몇 단계를 건너뛰고 Z 단계로 돌입해버리는 타입.
‘와…….이거 곤란한데?’
남자의 저돌적인 성향이 반갑지 않다. 호감이 가는 순간마저도 컷 다운 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김이 새 버린다.
“아니, 내가 먼저 다가갈 때까지 가만 있어줄 순 없는 거야? 아무리 초식 계열이 아니라도 초식 계열인 척 할 수는 있는 거잖아.”
일하다 말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만큼 지금 마음은 싱숭생숭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으으. 그 남잘 앞으로 어떻게 보냐고.”
그는 시간제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로 시간이 넘쳐나는 듯 보였다.
병원 건물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고 개인병원이라도 종합병원과 마찬가지로 꽤 넓은 건물이라 병원 직원들끼리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복도는 두 개로 나뉘어 있어서 껄끄러운 사람과 만나기 싫을 땐, 암묵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택해 돌아가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내가 지금 그를 껄끄러워 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아는 척 집요하게 말을 걸어온다.
“굿모닝. 잘 잤어요?”
“히-익-! 아, 네.”
아침만 하더라도 동동거리는 걸음으로 남자를 피해서 돌아가는데 그 뒤를 발정 난 암컷 개 따라가는 수컷 개 마냥 집요하게 쫓아오지 않았던가.
“어디 가요?”
“저, 바쁘니까. 일 보세요.”
“난 안 바쁜데.”
“그건…….”
‘그건 당신 사정이고.’
“아무튼 전 바빠요.”
이 정도 싸늘한 대답이 나왔으면 빈정 상해서라도 한동안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남자이련만. 이 남자는 보통 범주의 남자와 다른 사람인지, 계속해서 웃으며 뒤를 졸졸 쫓아온다.
심지어 아까 점심엔 사회복지 실에 난입해서 몰래 비벼먹던 남의 비빔밥까지 훔쳐 먹었다.
그것도 내가 입 댄 수저로.
“으으.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돼! 어떻게 내가 먹던 숟가락으로…….”
‘하지만 밥 먹을 때 모습은 좀 좋았어. 왕창 입에 몰아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는 게, 잘생기고 힘 좋은 머슴 같은 포스잖아.’
“아, 아니지!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훠이~ 훠~어~이~”
심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