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안에 든 쥐
공포의 수요일이다.
두어 달 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휴가를 내거나 반차를 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으나 그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오전엔 내리 다섯 시간 가까이 외부 교육을 받으러 가서 눈코 뜰 새 없이 교육을 뒤따라가야 했고, 오후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회의로 병원 대회의실의 잡무를 담당하도록 차출 당하여 오후 시간을 몽땅 저당 잡혔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잡무를 밀어버릴까 싶었지만 그것역시 여의치 않았다.
“과장님이 황휘 씨 오시면 부탁 들어주지 말래요. 회의 담당은 꼭 황휘 씨가 해야 한다고.”
하나같이 과장의 지시로 부탁을 들어 줄 수 없다는 말만을 내뱉을 뿐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과장이 누구냐?
바로 내가 이틀 전부터 미친 듯이 피하고 있는 한방과작 남구덕 되시겠다.
아니 왜, 사회복지사가 의사들의 회의에 커피 심부름이며 복사를 담당해야만 하지?
이런 걸 보통은 개인 비서나 사무직원들에게 맡기는 게 아니냔 말이다.
‘난 사회복지사라고~~! 잡무를 담당하는 사무직원이 아니라!!’
이 남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즉에 알아채고 빠져나갈 퇴로를 원천봉쇄 해 버린 것이다.
반차도 못 내고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미룰 수도 없다.
아무리 애써도 이 남자가 주도하는 회의에 잡무를 담당할 수밖에 없도록 완전히 옭아매 버렸다.
주변에선 은근슬쩍 손가락질을 하며 속닥거리고 있다.
뭐라고 하는지도 너무나 잘 들린다.
“황휘 씨가 한방과장의 애인이라더군.”
“그래요? 어머, 얼굴이나 배경이나 좀 딸리지 않아요? 어떻게 남과장님을 꾀어낸 거죠?”
“여자들은 모르는 매력이 있는 법이지.”
“매력이요? 그런 건, 저도 넘치도록 많거든요? 화장도 안 하고 저렇게 밋밋하게 생겨서 애교도 없는 여자가 뭐 좋다고.”
‘그래. 나 애교 없다. 근데 내가 아무한테나 애교 떨고 그러란 법도 없는데 웬 상관?’
내가 이렇게 어이없어 하고 있을 때, 질투로 막말을 하고 있던 여의사님 뒤에 있던 의사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은 말을 내뱉어 주었다.
“황휘 씨가 애교가 있든 말든. 아무한테나 애교 떨고 그러란 법도 없는데 남이 가타부타 상관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옳소!! 뉘신지 모르지만 할배 과장님 브라보~! 짱이십니다요.’
그러자 다른 젊은 과장들이 말릴 때는 툴툴거리며 할 말 다하던 여과장님도 더 이상 말을 못 하겠던지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저 분이 파워가 센 과장님이신가? 혹시 부원장님?’
병원을 옮긴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커다란 병원의 직원 인적사항을 제대로 모르긴 하지만
눈치로 보건데 저 분이 꽤 파워가 있는 분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면박으로 인해 주변에서 나에게 손가락질 하며 웅성거리던 다른 과장들의 태도도 많이 누그러진 듯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태연하게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럴 거라면 날 빨리 내보내 주기라도 하던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가 회의 중간 중간 심부름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갈 기미라도 보이면 이 남자는 언제 알아챘는지 금세 서류를 몇 개 들고서 복사 심부름을 시킨다.
“황휘 씨, 어디 가요? 아직 브리핑 안 끝났는데. 그리고 이거, 아직 복사해야 할 것 남았어요.”
“예?”
“복사. 아직 남았다고.”
“예…….에…….”
‘아우, 씨! 저 남자를 그냥! 일을 시키려면 한 번에 몰아서 시키던가.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이리 나를 열렬히 불러주니 내가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이가 갈릴 만큼.
***
엄연히 병원 환자들과 상담 할 일이 쌓여 있는 사람이 바로 사회복지사 일을 담당한 나였다.
그런데 이 남자. 한방과장 남구덕이 온 후로는 나의 이 커리어가 어쩐지 밑동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있다.
병원 복지 업무에 치중해야 할 전문 인력을 매번 잔심부름에 차출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종국에 가서 따져보면 이 남자와 무관하지 않은 듯 했다.
‘이해가 안 돼.’
가장 이해 할 수 없고 적응 안 되는 일은 바로 저 남자의 뜨겁고도 느끼한 눈빛.
대체 내게 뭘 바라고 저러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저리 노골적으로 날 쳐다보면서 일은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절대로 질척거리고 느끼한 것과는 거리가 멀 것처럼 생긴 냉미남 포스를 갖고도 저리 느끼하게 쳐다보는 것도, 집요하게 날 쫓아다니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집착 본능도……. 그저 대단하다고 감탄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는 나보다 상위 레벨의 한방 과장이니까.
결국 이렇게 난 독안에 든 쥐처럼 앉아서 그가 또 뭔가를 시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병원 의사들이 대부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 난 점점 짜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싫어. 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외계언어를 남발하면서, 여기 날 꼭 놔두는 이유가 뭔데?”
혼자서 중얼거렸다고 생각 했는데 브리핑 도중에 그 말을 들었는지 그가 물어왔다.
“뭐, 궁금한 거라도 있습니까. 황휘 씨?”
“예, 에?”
“궁금한 거 있으시냐고요.”
그러자 주변의 다른 의사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이 섞여들어왔다.
‘나한테 알아들을 수 없는 회의 내용은 왜 묻는데! 그런 거 묻고 그러지 뫜!’
나는 그를 싸늘하게 노려봤고 그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응?”
“궁금한 거, 없는데요?”
그러자 그가 입술을 깨물며 실눈이 될 정도로 눈을 접고 웃는다.
‘저건 분명 날 엿 먹인 거야.’
내 짐작을 확신으로 굳어지게 만든 것은 주변 여의사들의 반응이었다.
“저거 봐! 저거 봐! 회의실에 들어와서도 깨 볶고 있는 거. 여기가 자기들 놀이터인지 아나?”
“연애 할 거면 밖에 나가서 해야지. 뭐 하는 짓이야?”
“그러게 말이다.”
‘깨를 누가 볶았다고!’
피곤하고 또 피곤했다. 그러나 피하기엔 그의 시선이 너무나 촘촘히 날 얽어매고 있었다.
두 시간의 길고 긴 시간이 흘러 겨우 이제 해방 되는가 싶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저녁 식사 합시다.”
“예? 저, 퇴근 시간인데요?”
“병원장님도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에? 병원장님이요? 병원장님은 지금 해외출장 중이신…….”
“낮에 돌아오셨습니다.”
“낮에요?”
“네. 오랜만에 황휘 씨를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망할 영감탱이. 항상 날 안 돕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런 빅 엿을 먹일 줄이야. 출장 갔대서 땡땡이 좀 치려고 했더니 일감만 죽어라 몰아주고…….이럴 거면 차라리 직원이나 더 채용하지. 뭐 하는 짓이야? 끝까지 하나 도와주는 것도 없는 인간.’
“이틀 더 계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말했지만 미약하게 일그러지는 모든 표정까지 다 컨트롤 할 순 없었다.
“일정이 좀 빨리 끝났답니다.”
‘망할. 일정이 일찍 끝났으면 이틀 놀고 오기라도 하지. 왜 갑자기 복귀는 해서는…….’
“자, 갑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한방 과장에 병원장까지 가세한 자리를 대차게 거절하고 도망치기엔 아직 내 간 덩어리가 그렇게 부어 있지 않은 탓이다.